"나중에 나는 우리 집에서 살면 되는데 엄마 아빠는 어디서 살 거야."
얼마 전 퇴근해서 집에 오자 아내가 오묘한 웃음을 지으며 들려준 아들과의 대화 한토막이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뭐야. 우리 보고 집을 나가라고. 늙은 부모를 쫓아내겠다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괘씸한 생각도 든다. 나이라도 적으면 어려서 그렇겠거니 하겠지만 지금 아들의 나이는 28살. 이 정도 되면 진심일 수밖에 없다.
무등을 태운 아빠의 머리를 조그만 주먹으로 때려 경상도 아주머니들로부터 '어이, 싸나이네'라는 얘기를 듣던 쪼그만 꼬맹이였다. 기름이 바닥나기 일보 직전까지 차를 운전하다 아빠가 엄마에게 혼나자 '엄마, 아빠 때리지 마'하며 나를 감싸던 울보였다. 서울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 불꽃놀이를 볼 때 '와! 무지개 대포다'라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아름다운 표현으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던 시인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엄마에게 삐뚤빼뚤한 글씨로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라며 감사패를 직접 만들어 줬던 천사였다. 이런 아들이 서른 가까이 나이를 먹고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마나님은 집을 꼭 배 아파 낳은 자식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다. 아들에게도 항상 얘기했다. '이 집과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은 네 것'이라고. 어려서부터 이 얘기를 듣고 자랐기에 아들에게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내 집'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을 터다. 우리 눈에만, 또는 우리가 볼 때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들은 여전히 철없고 밝고 깨끗한 아이다. 자식이라고는 씻고 벗고 하나뿐이라 유난히 애정을 많이 쏟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 부부는 아들이 결혼할 경우 같이 살 생각이 1도 없다. 두 세대가 오손도손 잘 산다면 어떻게 지내든 무슨 상관이랴. 불행히도 우리 부부는 경험상 그렇게 사는 게 너무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내는 남자만 챙기는 시댁과 처가에 질렸고 남편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쏟아내는 아내의 잔소리가 싫었다. 남남으로 살다가 한 식구가 되면 이런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쳐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럴 개연성이 높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무리 피를 섞은 부모 자식 간이라도 또 하나의 울타리가 쳐지는 순간 감정의 이질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따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요즘은 신혼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운다. 돈 많은 재벌집이나 평생 돈을 쌓아두고 있는 부모를 두고 있지 않다면, 자식과 며느리는 '내 집'을 만들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해야 한다. 아이 낳으면 나라에서 돈도 주고 집도 준다고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될까. 결국 손자 육아는 노부부의 몫이 된다. 젊어서도 내 인생이 없었다. 그저 가족만 보고 왔다. 오해도 있었지만 가족 외 다른 것은 보지도 않았고 볼 생각도 없다. 그런데 은퇴해서, 앞으로 살 날 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운 나이까지 손자에게 내 인생을 소비하라고? 싫다. 이제는 가족을 챙기느라 그동안 못했던 내 인생을 그리며 살고 싶다. 진짜 그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희망만이라도 갖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홀로서기에 대한 각오를 다져야 한다. 하지만 같이 있으면 그럴 수 없다. 자꾸 눈에 밟히는 손주를 모른 채 할 수 있는 강심장을 우리 부부는 장착하고 있지 않다. 결국 방법은 하나. 아들 부부가 무슨 일을 하든 간섭하지 않고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네가 결혼하면 너희 부부랑 같이 사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라는 말은 이렇게 나왔다.
아들은 매우 단순하다. 혼자 자라서 그런지 자기밖에 모른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 최소한 부모와 같이 있을 때는 그렇다. 일본 유학 중인 지금도 아침에 용돈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지 않으면 하루 종일 엄마 휴대폰에 불이 난다. 대놓고 용돈 왜 안주냐는 말은 안 하지만 통장에 새로운 숫자가 찍히기 전까지 문자와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다 상황이 종료되면 전화도 끝. 밤이 될 때까지 소식 두절이다. 물론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은 철저히 별개다.
"이 집은 네 거야"와 "네가 결혼하면 절대 같이 살지 않을 거야"라는 말이 결합하면 둘 중 하나가 결론으로 도출된다. 아들이 분가를 하거나, 우리 부부가 집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따로 집을 마련해서 나가거나. 세상의 중심이 자기인 아들에게 자신이 집에서 나가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남은 것은 하나. 우리가 집을 아들에게 주고 어디 가서 빌붙어 살든 돈을 많이 벌어 새집을 하는 것뿐이다. 그래도 엄마 아빠가 어디서 사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디서 살 거야'라고 묻는 것을 보면.
우리 부부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어쩌면 2030 세대를 자식으로 둔 부모들 모두가 겪을 일 일지도 모른다. 서러운 생각마저 든다. 젊어서는 나이 든 부모와 어린 자녀를 책임지고 중년이 돼서는 자식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먹여 살려야 한다. 은퇴할 나이가 돼 이제 내 인생을 살아볼까 했는데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자녀들이 발목을 잡는다. 집안의 아들은 계속 돈을 벌길 바라는데 집 밖의 아들들은 50대 이상에게 커가는 싹 죽이지 말고 빨리 자리를 내놓고 이제 그만 뒤로 물러나라고 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산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장강의 물결은 언제나 뒤에 오는 물살에 밀려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지금 물러나면 똑같은 젊은이인 내 자식은 어떻게 하나. 노동력은 잃었지만 여전히 창창하신 부모님은 또 어쩌나. 변명 같지만 아직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다. 도대체 나 같은 사람 보고 어쩌라고.
세대 갈등이란 말이 무시로 떠돈다. 틀렸다. 세대 갈등이 아니라 '생존 투쟁'이다. 좌우 갈등, 지역 갈등도 마찬가지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이 사회의 부조리다. 태초에 나타난 흑백만 난무할 뿐, 회색과 주황은 외면받고 버려진다. '초고령화'라는 그림자도 따라붙는다. 죽을 때까지 '낀 세대'일 수밖에 없는 게 베이비부머들에게는 앞뒤 세대와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아들이 결혼하면 우리 부부는 도대체 어디로 떠돌아다녀야 할까.
OTT 드라마 '무빙'에서 고등학생 봉길은 주황색이 싫다는 같은 반 여자 친구 희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황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게 아니라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현실은 우리를 좌절시키지만 드라마는 허구이나마 희망을 남겨준다. 중년의 남성에게도 드라마가 필요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