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이렇게 하나도 맞는 게 없을까."
아내가 툭하면 던지는 하소연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 부부는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비슷한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다른 남녀가 어떻게 서로 짝을 이뤄 한 집에서 같이 사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우선 라떼들이 가장 따지기 가장 좋아하는 지연부터 그렇다. 아내는 경상도 출신이다. 울산에서 태어나 어릴 때 서울로 이사를 왔다. 장모도 부산이 고향이다. 돌아가신 장인어른 역시 울산에서 크고 자라셨다.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말 그대로 '싸나이'였다고 한다. 물론 나는 잘 모른다. 내가 결혼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으니. 처가 친척들 역시 모두 부산 또는 경남에 터를 잡고 계신다. 몇 해 전 세상을 뜨신 처삼촌을 문상하기 위해 다녀온 곳도 부산이었다.
반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전라도 분이다. 15년 전 내 곁을 떠난 아버지는 전라북도 익산(예전에는 '이리'라고 불렸다. 잘 모르겠으면 이리역 폭발사고를 검색해 보면 된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어머니도 익산 바로 옆 전주가 고향이다. 이러다 보니 취직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삼촌 두 분, 그리고 이모를 제외하곤 아직도 대부분의 친척이 익산이나 전주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누나와 형, 나도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기는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나는 호남 사람'이라는 뿌리 깊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단순한 지역적 경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념도 갈라 친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광주가 계엄군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있던 어느 날 저녁 고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무 무섭다고. 도로도 막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며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반면 처가에서는 광주에 대한 얘기를 일절 하지 않는다. 가끔 그때 이야기가 들리면 아예 귀를 닫고 만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40년도 더 지난 일을 지금 꺼내서 뭐 하냐고.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선거가 적어도 2년에 한 번꼴로 진행된다. 보궐선거를 빼고 대선, 총선, 지방선거 등 굵직굵직한 것만 3차례다. 그때마다 집안 분위기가 싸하다. 서로 누구를 찍을지 뻔히 안다. 투표소를 나오면 그때부터 아무 말도 안 한다. 30년째 변하지 않은 공식이다.
어디 이뿐이랴. 자라온 환경도 다르다. 아내는 서울 강남에서 평생을 살았다. 어렸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아파트에 살지는 않지만 여전히 강남구민이다. 친구 소개로 아내를 만난 첫날이었다. 강남 고급 아파트촌을 걷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런 곳에서는 누가 살까요." 깜짝 놀랄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 같은 사람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내가 어디 사는지 몰랐다. 괜히 무안해졌다. '이번 만남은 글렀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아내는 처음 날 본 순간부터 "뭐 이런 사람이 있어"하고 생각했단다. 전날 야근해 초췌해진 모습에 양말은 녹색 군용 양말을 신고 후줄근한 외투를 입고 나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의 아내와는 정반대였다. 그런 인간이 자신이 사는 동네를 비꼬듯 말했으니 누군들 좋아했을까. 결혼식장에 같이 들어간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다.
취향도 다르다. 음악이라고는 대중가요와 팝송 밖에 모르고 학창 시절 미술 성적표는 언제나 '미'로 일관했던 남편과는 달리, 아내는 클래식을 좋아하는 미대 출신이었다. 사회에서 만났다면 애저녁에 끊겼을 인연이다.
이런 부부가 벌써 30년째 한 집을 쓰고 있다. 물론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결혼 초반에는 시댁 문제가 중심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정채색이 다툼의 대상이 됐다. 그래도 초가삼간을 태우지는 않았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일 듯이 달려들지도 않는다. 어쩌다 감정을 드러낼 때도 '그래 네가 그렇지 뭐'하고 넘어간다. 표면적인 이유는 아들이다. 자식에게 부끄러운 부모의 모습을 보이기 싫다. '아들이 없었으면 벌서 이혼했어.' 아내의 경고가 허투루 들리지는 않는다.
단지 그뿐일까. 멋들어지게 '다양성을 인정하고 산다'라고 포장하고 싶지만 다들 안다. 그건 그냥 수사일 뿐이라는 걸. 그렇다고 흔히들 말하는 사랑 때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반평생을 티격태격하며 지냈는데 이런 사치스러운 감정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누군가 말했다. '정(情)'이라고.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어느 순간 서로에게 가슴쓰리고 안쓰러운 감정을 느낀다. 과거로 돌아가기엔 그동안 지낸 시간이 너무 아깝고 계속 가자니 혼자서는 외로운 그런 감정. 우리 부부는 그래서 함께 다닌다. 사랑보다 더 진한 정이라는 끈끈함으로 묶인 채.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러기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나태주 시인 '11월')
아내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입 밖으로 잘 꺼내지는 않지만 내 반쪽을 보면 미안함이 앞선다. 결혼 이후 한 번도 뭐라도 풍족하게 준 적이 없다. 시댁과 불화가 있을 땐 모른 척 하기 일쑤였다. 어쩌면 모든 불화의 원인은 나 자신일 수 있다. 게다가 병 때문에 몇 번 죽을 고비도 넘겼다. 꼬박 15년 동안 병간호에 매달린 지난하고 처연한 아픔을 과연 내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어려움에도 항상 그 손을 붙잡고 함께 길을 가는 것, 그 외에는 할 일이 없는 남편이다.
'그래도 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에선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김승희 '그래도 라는 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