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주재원으로 일할 때다. 외국인들이 나를 부를 때 자꾸 “숭늉”이라고 불러댔다. 그들에게는 Sung Yoon을 “성윤” 보다는 “숭늉”이라고 발음하기가 더 편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In Korea, 숭늉 is something you make out of left over rice in the cooker”
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잠시 발음 교정의 시간을 가진다.
“Ok follow me, sing-sang-sung 'SUNG', 'Yoon' as in YOU~n. 성윤!”
“숭늉!”
숭늉이 뭔지 안 다음부터는 더더욱 짓궂게 숭늉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남의 이름 갖고 장난을 쳐도 내가 워낙 성격이 좋다고 소문이 난 코리안이라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외국인을 만나 이름을 얘기하면서 매번 숭늉에 대해 교육을 할 수는 없었다. 재밌으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들에겐 숭늉 레퍼토리는 재밌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지겨웠다. 게다가 중국인들은 나를 “청룬”이라고 불렀다. 성윤(成潤)의 중국식 발음이다. 성룡(成龍)을 "청롱"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린 이제 모택동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 발음대로 마오쩌뚱이라고 불러주지 않는가? 근데 왜 내가 청룬인가?
그래서 영어 이름을 짓기로 했다. 외국인들 - 서양인들-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You look like a…
“Steve”
“Chuck”
“Larry”
여러 후보가 나왔다. 그중 한국 음식에 조회가 깊은 Ruth가 말했다.
“How about Bob? Bob Kim. Kim Bob. 김밥!!!”
모두가 또 한 번 박장대소를 했다. 내가 자꾸 김밥을 스시롤이라고 부르는 외국인들에게 이건 스시롤이 아니라 김밥이라고 교육을 시켜 놓았더니만 그새 응용을 하고 앉아 있다.
Bob Kim, Kim Bob. 생각해 보니 귀여운 이름이었다. 그래도 이젠 한 회사의 사장인데 김밥으로 불릴 수는 없고, Robert의 약칭이 Bob이니 Robert Kim으로. 이렇게 내 영어 이름 Robert Kim이 탄생했다. 그렇지만 Sung Yoon이라는 한국 이름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Robert S. Kim으로 명함에 새겨 넣었다.
외국인들에게 스스로를 Robert Kim이라고 소개하면서 산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러나 영어교육 사업을 하고 있는 지금 나는 후회한다. 그냥 Sung Yoon이라고 밀어붙일 걸.
인도 사람들을 보면 도저히 발음하기 힘든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다. Taarush Deshmukh, Subrahmanyan Chandrasekha... 읽기도 힘들고, 기장도 무지 길다. 터키, 태국, 베트남 이름들도 길고 발음하기 힘들지만 이들은 웬만하면 남 부르기 쉬우라고 영어 이름을 짓지는 않는다. Shantanu Narayen (Adobe), Sundar Pichai (Google), Satya Narayana Nadella (Microsoft) 등 실리콘밸리를 주름잡는 CEO 다수가 인도계인데 어느 누구 하나 영어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막상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일수록 정체성이 명확하다. 아~ 부럽다. 나도 그냥 Sung Yoon으로 고집할 걸.
이름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고 있었으나, 남을 배려한답시고 부르기 쉬운 영어 이름을 지은 내가 어리석었다. 그들이 나를 Robert라기보다 Sung Yoon이라고 부를 때 더 존중감을 갖고 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
판교에 있는 스타트업들 직원들이 영어 이름으로 서로를 호칭한다고 들었다. Brian, Jeff, David… 수평적 조직문화를 위해서라나. 나는 속으로 ‘영어도 못하는 것들이 웃기고 자빠졌네.’하며 비웃다가도 나도 영어 이름이 있으니 할 말이 없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회의를 하면 David 대표님, Jeff님, Brian께서 … 결국에는 존칭 붙이게 된다나. 서로 이름 부른다고 수평적 관계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다.
그래서 내 딸에게는 글로벌한 이름을 지어주었다.
“리나” “Lina” “利娜”
한국어로 리나, 영어로도 리나, 중국어 발음도 리나.
우리 딸에게 틈만 나면 얘기해 준다. 엄마 아빠가 얼마나 심사숙고해서 '리나'라는 이름을 지어줬는지. 아빠는 영어 이름 지은 걸 후회한다고.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되돌리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Robert Kim, Kim Bob으로 알려졌다고.
그러던 어느 날, 마침 영어 이름에 대한 후회로 우울하던 차에 우리 딸 카톡 프로필 이름이 바뀐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