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이는 매사에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 먹는 것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명확하고, 놀이도 좋아하는 놀이와 시큰둥한 놀이가 있으며, 심지어 간식도 좋아하는 브랜드로 정해 놓고 먹는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만 사람도 가려가며 나타나기도, 숨기도 하며 아는 척과 모른 척을 한다. 순둥순둥한 고양이처럼 주는대로 먹고 반응을 잘 하는 고양이와 달리 까다로운 양이를 두고, 가끔씩 길 출신인데 너무 까탈스런 건 아니냐고 혼잣말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양이는 자기의 호불호를 확실히 표현하는데, 집사로서는 편하기도 하다. 양이가 좋아하는 대로 해주면 되고 굳이 싫어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갖고 불필요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우선 양이는 먹는 것에 대한 선호가 분명하다. 초반에는 양이의 식생활을 위해 신경을 꽤 쓴 편이다. 보호소에서도 잘 먹지 않는 고양이로 분류되었던 양이의 건강 회복에 우선 순위를 두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과 동물 병원 자문을 통해 건강에 좋다는 사료와 간식을 바꾸고, 궁디팡팡 고양이 물품 박람회에서 얻어온 수많은 샘플들을 시도해 보았다. 매번 잘 먹을까 좋아할까 설렘과 기대를 가졌지만, 양이는 어김없이 그런 기대를 내려놓게 하였다. 4년이 지난 요즘에도 틈만 나면 좋은 사료와 간식에 대한 미련으로 새로운 종류를 시도해 보지만, 양이는 한결같다. 맨날 똑같은 것을 먹으면서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지만, 양이는 변함없이 잘 먹고 있다.
음식만큼 놀이에 대한 호불호도 분명하다. 소심하고 소극적인 양이를 위해 놀잇감을 다양하게 시도해 보았지만 양이가 반응하는 놀이는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우선 작은 쥐돌이를 갖고 노는 것이다. 3cm 정도가 되는 작은 쥐돌이 인형을 던져주면 달려가서 드리볼을 하고, 그게 귀찮아지면 드러누워 던져준 쥐돌이를 앞발로 쳐내는 놀이를 한다. 양이는 고양이 영상에 자주 등장하는 방울과 반짝이가 달린 깃털 놀이를 싫어할 뿐 만 아니라 방울 소리나 색깔이 요란한 깃털을 흔들면 숨어 버리기까지 한다. 대신 까투리 털로 만든 소박한 깃털은 언제 흔들어도 반응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간식을 빼먹는 장난감, 공굴리기, 빛과 소리 자극이 있는 장난감 등을 시도해 보았으나, 양이는 활동량이 크고 난이도가 있는 놀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양이는 사람도 가린다. 나와 친해지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낯을 심하게 가리는 편이다. 양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 순서부터 나열해 보면, 집에 수리하러 온 사람, 정수기 세척하러 온 사람, 등기우편 배달하는 사람, 가끔 방문하는 친척과 친구들 순이다. 양이는 싫은 표현을 숨어버리는 것으로 하는데, 공통점은 체격이 크고 검은 옷을 입고 목소리가 큰 사람들이다. 반면 체구가 작은 아이들은 경계만 했지 무서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구십세가 넘은 나의 어머니가 집에 오면, 양이와의 미묘한 영역 갈등이 생긴다. 양이가 주로 잠을 자는 거실 소파에 할머니가 앉아 있으면, 조용한 할머니가 싫지 않은 눈치지만 자기 자리를 빼앗겼다는 불편함이 느껴진다. 양이가 아무래도 좋아하는 서열 1위와 2위는 나와 딸이다. 나는 하루 종일 같이 있고 밥주고 똥을 치워주어서, 딸은 양이의 취향에 맞게 놀아주기 때문인 것 같다.
양이의 간식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정말 특이하기 때문이다. 양이에게 고양이들이 좋아한다는 간식들을 종류별로 주어 보았지만, 일편단심 특정 브랜드에서 나온 간식만을 먹는다. 뉴욕 출신인가 하는 마음에 미국 고양이들이 잘 먹는다는 수입 간식과 직접 만든 수제 간식도 바쳐 보았으나 양이는 한가지 간식만을 선호한다. 간혹 고양이를 기르는 지인들이 자기네 고양이가 좋아한다는 간식을 보내오지만 거들떠도 보지 않는데, 그냥 양이의 확고한 취향으로 여기고 있다.
이렇듯 양이의 경우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기에 오히려 돌보기가 쉽다. 사료, 간식, 놀잇감 모두 한 종류로 통일하면서 괜한 기대와 사명감으로 이런저런 시도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종종 나도 양이처럼 호불호가 확실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의 원함이나 요구, 바램을 명확히 알고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렵고 어색하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내키지 않지만 겉으로는 좋다고 하고, 상대방의 부탁이 부담스럽지만 ‘노’라고 하지 못하고, 두리뭉실 ‘예스’라고 해놓고 후회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굳이 나의 의견이나 생각을 말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믿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되면 섭섭함과 서운함이 쌓이고 무력감이 느껴지곤 한다. 심지어 양보하고 희생한다는 생각이 많아지면 피해의식이 생기고 작은 일에도 오해와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주변에서 호불호를 자신있게 표현하는 사람들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센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음식을 주문할 때 다 괜찮다, 아무거나 시키자는 분위기에서, 나서서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는 친구는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단체 여행시 묻어가는 사람과 나서는 사람 사이에서 묻어가는 쪽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고 있다. 의견과 생각을 표현하고 밝힐 줄 아는 것은 이기적이나 자기중심적이 아닌, 자신의 원함과 필요를 돌볼 줄 아는 능력이라고 말이다. 나의 양보나 포기로 인해 상대방과 주변이 잘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은 이타적인 미덕이지만, 가까운 관계에서는 나만 손해보거나 양보하고, 상대방은 자기 맘대로 하고 산다는 원망과 미움이 쌓이기 때문이다.
어느 선까지 나의 원함을 말하는 것이 맞을까 하는 것은 소심한 사람들의 고민이다. 굳이 가이드라인을 정해 보자면, 가족 간에는 항상, 친구나 지인간에는 반 정도, 형식적인 관계에서는 자기 주장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다. 흥미로운 점은 가장 허물없는 가족관계에서 자기주장이 어려운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남이야 남이라 치고 양보하고 무시할 수 있는 것들이, 가족에게는 아쉬움과 억울함, 슬픔 등으로 남는다. 가족 간에 솔직하고 명확한 자기표현이 어렵다면, 조금씩 연습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양이의 확실한 호불호가 돌보는 나에게 편리함을 주듯이, 나의 호불호를 적절히 밝히는 것은 상대방을 오히려 편하게 해줄 수 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올바르게 나를 알게 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나의 자기표현으로 상대방에게도 생각할 기회를 주는 한편, 관계에도 신뢰와 공평함이 쌓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만큼, 자신의 필요와 바람도 적절히 존중받을 때 좀더 행복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