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이름을 검색해보면 귀엽고 부르기 쉬운 이름들이 수없이 많다. 뚜리, 뽀니, 타니, 도도, 미미 등 작고 귀여운 이미지가 연상되면서 입에 달라붙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모네, 마네, 치즈. 제이 와 같은 세련된 외래어 이름이 있고 우람이, 딸랑이, 두부 와 같은 친숙한 우리 이름도 있다. 이름을 보고 고양이를 보면 정말 이름처럼 고양이가 느껴진다. 두부는 뽀얀 색의 털을 갖고 순둥한 얼굴을 하고 있는가 하면, 뚜리는 똘망하고 애교가 많은 고양이처럼 보인다. 아마도 고양이 이름에 애정과 의미를 담아 반복적으로 부르는 집사의 영향력이 아닐까 싶다.
우리집 고양이는 사 년 전 미국에서 도착하자마자 방문한 동물병원 차트에 이름을 써야 하는데 양이라고 쓴 것을 계기로, 계속 ‘양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유는, 부르기가 좋고 양이가 자기 이름을 알아듣기 때문이다. 양이도 처음부터 양이는 아니었다. 뉴욕 길거리 출신 고양이로 첫번째 주인에게 입양되었을 때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 그 다음에는 어떻게 불렸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아는 이름은 양이가 머물었던 유기묘 센터에서 불리던 데이지란 이름이다. 데이지의 어원을 찾아보니, 태양의 눈이란 뜻으로 태양 광선이 비추면 꽃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이처럼 순수함이란 꽃말도 있다. 이렇게 좋은 의미가 담긴 이름에도 불구하고, 데이지라는 이름을 쓰지 않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세 음절이 입에 붙지가 않아서였다. 데이지~하고 부르면 되는 미국식과 달리, 데이지야 하고 부르려니 네 음절이 되면서 입에 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지를 포기하고 딸과 함께 한국식 이름을 고민해 보았다. 눈동자가 커서 초롱이, 점잖아서 쩜이 등 두어 가지 이름을 생각해 보았지만 양이와는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이름 짓기를 검색해보니, 이름은 부르기 좋고 듣기 좋고 부모의 바람을 담을 수 있는 의미를 갖춘 글자를 적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귀엽고 예쁜 사람이 되라는 이름, 총명하고 성공하라는 이름, 올곧고 주관있는 사람이 되라는 이름 등, 부모의 바람과 소망을 담아 이름을 짓는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개똥이, 칠득이와 같은 이름이 사라지고, 족보를 따지는 돌림이 많이 사라진 요즘에는, 거의 모든 이름이 예쁘고 멋지다. 이름 짓는 것도 진화가 된 탓이다. 많은 경우 한글과 더불어 한자의 뜻과 획을 맞추어 이름을 짓는 우리 문화와 달리 서양에는 아예 작명집이 있다. 예를 들어, 에이미(Amy)는 사랑스러운 이란 뜻, 엔디(Andy)는 강하고 남자다운 뜻의 이름으로, 이름마다 담긴 고유의 의미가 있으니 부모의 소망에 따라 선택하는 식이다. 외국에서 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나의 경우, 큰 애는 한국 이름을 고집해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늘 이상한 발음으로 불렸던 한편, 작은 애는 제니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제니퍼가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른 채 제니퍼라는 이름을 가진 미국 지인이 야무져 보여 따라한 것이다. 작은 딸은 어진 백성이란 뜻의 한국 이름보다 제니퍼를 더 좋아하지만, 그 이름처럼 야무지게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양이라는 이름에 담긴 나의 바램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소심한 겁쟁이 양이가 마음 편하게 살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마음 편하게 산다는 뜻의 이름대로 살게 하려면, 그에 맞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했다. 만지는 것을 안 좋아하니 만지지 않는다, 지저분한 털을 갖고 있지만 함부로 깍지 않는다, 호불호가 분명하니 싫은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등이다. 무엇보다 애교 많고 귀여운 짓거리로 사람을 잘 따르는 이상적인 반려묘에 대한 기대를 접고, 집고양이지만 들고양이처럼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양이는 자기 이름을 알아듣는다. 이름을 부르면 쳐다보기 때문이다. 강아지처럼 반갑게 달려오거나 꼬리를 흔들지는 않아도, 양이와 나 사이에 이름을 부르고 이름에 반응하는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마치 김춘수 시인의 ‘꽃’에 나오는 구절처럼, 양이라고 부르니 나에게로 와서 양이가 된 것이다. 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누가 뭐래도 맘 편하게 살려면, 양이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다.
정성껏 이름을 지어도, 이름에 기대와 욕심을 더하면 서로 간에 실망과 상처가 되기도 한다. 예쁜 사람이 되라고 지은 이름에 예쁘건 당연하고,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사회성도 뛰어나기를 당연시 여긴다면, 종종 실망과 불만이 따라온다. 올곧은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지은 자녀가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원칙적이라면 답답함과 한숨이 올라오는 한편, 대범하고 큰 사람이 되라는 이름의 자녀가 소심하다면 속상한 마음이 든다. 기대에 못 미칠 때 따르는 실망은 관계에 흠집을 내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상대방이 귀할 수록, 상대방을 사랑할 수록, 나의 기대치 대로 따라오길 바라는 것은 독이 될 때가 많다. 기대를 낮춘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내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통제감을 내려놓는 것이다. 통제감을 내려 놓으면, 기대보다 잘한, 기대보다 괜찮은, 기대한 것 이상의 상대방으로 놀라고 즐거워진다.
양이가 자기의 이름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양이를 보살피는 가족이 맘 편하게 살아보라고 하니 그것을 믿고 당당하게 말이다. 새삼 나의 이름을 생각해보니, 나의 이름에도 나를 아끼는 부모님의 소망이 깃들어 있고 나의 일부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 이름을 떠올려 보자. 이름에 담긴 고유한 뜻과 소망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다면, ‘이름’도 특별한 힘이 되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