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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 경 Jul 16. 2023

20장 싸울 것인가 피할 것인가

양이는 도망치기의 명수다. 조금이라도 낯설거나 위험하다 싶으면 쏜살같이 줄행랑을 친다.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 순식간에 없어지고 숨는 곳도 비밀스럽다. 허겁지겁 달려가는 양이의 뒷모습을 보면 귀엽기도 짠하기도 하다. 짠한 이유는 그렇게까지 위험하고 도망칠 상황도 아닌데 공포스럽게 달리기 때문이고, 귀여운 이유는 자기 스스로 알아서 위험에서 벗어나는 모습이 대견해서이다. 평소에 느리고 여유 있는 모습만 보다가 가끔씩 잽싼 양이의 모습을 보면 야생 동물의 본능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심리적인 방어 기제 중에 회피라는 것이 있다. 마주하기 힘들거나 괴로운 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잊어버리고, 골치 아프니 묻어 두기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며 문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회피 행동도 있다. 만나기가 싫은 사람은 핑계를 대고 피하며, 가고 싶지 않은 만남은 적당히 둘러대며 불참하고, 떨어질 것 같은 시험은 다음 번으로 미루는 행동이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되는 일들을 미루는 습관도 회피의 일종이다. 화장실 청소를 미루기 시작하면 화장실을 피하게 되고, 빨래 더미와 설거지가 밀려 있으면 쳐다보지 않으려고 한다. 세금 고지서는 원수인 냥 내팽개치다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컴퓨터를 켠다. 이렇게 회피 행동은 불편하거나 불안이 느껴지는 것으로부터 ‘피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오래 전 인도에서 문자 그대로 도망친 적이 있다. 인도로 인턴십을 하러 온 딸과 함께 델리 시내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여성인권 보호센터를 찾아갔다. 이메일로 오가며 성사된 인턴십이었기에 위치, 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었는데 가보니 무슬림 빈곤층 지역의 허름한 삼층 건물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딸이 혼자서 다니기에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던 차, 건물에 여성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딸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소곤댄 결과는 ‘튀자’였다. 센터장을 만나면 얼굴을 붉혀야 하니 말없이 도망가는 게 서로를 위해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유치하게 뺑소니쳤다는 생각보다 안전을 위해 잘 도망쳤다고 안도하였다. 


회피의 반대는 싸움이다. 심리학에서는 위험이나 위협을 감지하면 싸우거나 도망치는(fight or flight) 능력을, 스스로를 보호하는데 필요한 기술로 설명한다. 원시 시대 생존을 위협하는 자연재해나 야생 동물 앞에서 싸울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를 잘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듯이, 우리도 불안, 우울, 스트레스와 같이 웰비잉을 위협하는 것들에 잘 대처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문제 제기하는 사람과 맞서거나, 억울한 일을 위해 나서고,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따지고, 거짓에 대항해 진실을 밝히는 차원의 싸움이 있는 가하면, 흔히 부부 싸움, 부모와의 갈등, 형제 간의 말다툼, 친구 간의 오해, 직장에서의 불화 등이 있다. 모두가 자신의 웰비잉을 위협하는 일들이기에 전투 모드에 들어가 억울함을 풀고 부당함을 해결하는 행동이다. 


문제는 싸워서 해결되고 마음이 편해지는 일이 있는가 하면, 싸워서 더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부부싸움이 항상 아름다운 용서와 화해로 끝나지 못하는 이유는, 양쪽 모두 싸울 줄 만 알지 제대로 이기는 방법을 몰라서 인 것 같다. 상담에서는 커플들이 싸우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싸우는 과정에서 따지기, 화냄, 비난, 빈정거림, 갑자기 사라짐 등이 등장하는 커플은 비극적 엔딩으로 끝나는 경향이 있다. 서로 너무 심각하고 팽팽하게 대립할 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반면, 싸우는 과정에서 양보, 타협, 사과, 유머가 나오는 커플은, 싸움이 마무리되고 앙금도 없다. 싸움을 해결하는 데 유용한 기술들을 잘 알고 사용하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싸움도 있다. 속상하고 억울한 일을 만나고,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 생기고, 우울하고 실망스러운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부정적인 감정을 잘 다루려면 싸우는 기술과 회피하는 기술 모두가 필요하다. 불안을 예로 들면, 불안한 감정은 덮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불안과 싸우는 방법은 불안에 압도되어 괴로워하는 대신, 바깥으로 털어내는 것이다. 왜 불안한지, 불안한 생각들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운데 불안은 줄어든다.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는 좋은 방법은, 운동, 산책, 요리, 수다, 영화감상, 반려동물과 놀기 등으로서, 몸을 쓰고 몰입하는 활동은 불안을 감소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슬픈 감정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슬픔을 마음 속에 오래 품고 끙끙대는 대신, 바깥으로 끌어내어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잘 싸우는 방법이며, 슬픔을 대체할 수 있는 좋은 만남, 여행, 힐링이 되는 활동도 슬픔을 잊게 하는 방법이다.  


회피는 어느 정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만, 항상 피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싫은 사람을 피하면 그때는 좋지만 다음 번에 만날 때는 또 괴롭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싫은 일도 포기하면 당분간은 살 것 같지만 비슷한 일을 하게 되면 싫은 감정과 싸워야 된다. 싫은 사람과 계속 마주칠 관계라면, 무조건 피하는 대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방법을 찾아보는 가하면, 하기 싫은 일이 정말로 싫은 일이라면 미련을 두지 말고 과감히 새로운 일을 찾는 것도 해결 방법이 된다. 상담에서 잘 쓰는 용어 가운데 ‘직면’이 있다. 문제나 감정을 누르거나 숨기는 대신, 똑바로 마주하고 대면하는 것이다. 문제를 직면하면, 피할 때보다 오히려 두렵지 않고 해결에 대한 의지와 용기가 생긴다. 


잘 피하거나 잘 싸우거나, 두 가지를 지혜롭게 활용할 줄 아는 것은 삶의 수많은 문제들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라이프 스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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