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연 Aug 20. 2020

미국에서 미국인처럼 말했습니다.

너 영어 참 잘한다는 칭찬 기저에 깔린 심리, 그리고 선량한 차별주의자

어렸을 때 아버지 직장 때문에 미국에 체류한 경험이 있어서 영어 발음에 한국 억양이 거의 없는 편이다.

학부 시절 한국계 미국인(Korean American)으로 종종 오인받기도 했는데, 간혹 나에게 이런 류의 말을 하는 백인 학생들이 있었다.

"Wow, your English is great! I think you speak better English than I do."
(와, 너 영어 진짜 잘한다! 네가 나보다 영어 잘하는 것 같아.)

또는

"Wow, how do you have no accent?
(와, 너는 억양이 없네?)


이 문장들은 칭찬일까? 한국어가 확실한 모국어인 나에게 이 말은 어쩌면 칭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첫째, 나의 출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 말을 했다는 것이고, 둘째, 미국에서 나고 자랐으며 엄연한 미국 시민인 아시아계 미국인들(Asian American)에게도 이런 말을 종종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을 했던 것은 소수의 학생들이고, 나의 출신과 배경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 노력해준 고마운 친구들도 많이 만났다.)


하지만 나는 위와 같은 말들을 내가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할 만큼은 자주 들었다.

자, 여기서 왜 같은 학교를 다니는 다른 학생이 굳이 나의 영어 실력을 칭찬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동양인은 "미국인"이 아니라는 심리가 기저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 학생들이 나에게 "와, 너 영어 참 잘한다."라고 한 것은 내가 같은 한국인에게, "와, 한국어를 참 잘하시네요."라고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인 것이다.


"말을 참 조리 있게 잘하시네요"라든가, "말솜씨가 좋으시네요" 등의 칭찬은 할 수 있지만, 보통 한국인들끼리 "한국어를 잘한다"는 칭찬을 주고받지는 않는다. 또, 내가 왜 나의 학문적인 성과나 수업 시간에 했던 발언이 아닌, 영어 실력에 대한 칭찬을 들어야 하는가? 여기는 영어 학원이 아닌데.


즉, 동양인인 나의 외형만 보고 나를 "외국인"이라고 판단하고, 나의 영어 실력, 특히 외국 억양이 없는 "발음"을 칭찬하는 것은 사실 참으로 차별적이고 무례하다. 그러나 그들은 선량한 얼굴로, 정말로 너를 칭찬하고 싶다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으며 이 말을 하곤 한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김지혜 교수의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나오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이 바로 이들인 것이다.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져 사는 미국이지만, 화이트 프리빌리지(white privilege, 백인들의 특권)는 여전히 뿌리 깊이 존재하고 있다. 나는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한다고 믿고,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위해 노력한다는 미국의 의식 있는 대학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여기에서 내가 그들보다 윤리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나 역시도 선량한 차별주의자일 수 있으며 (사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며),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차별적인 말이나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그저 내가 미국에서 유학하며 만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과, 그들의 심리에 대한 나의 의견을 제시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상술한 경험은 비단 나만 겪은 것이 아니다. 대학교 2학년 때 Bilingualism (이중 언어 구사)이라는 수업을 들으며 만난 아시아계 미국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 또한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들과의 대화가 나를 일깨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더 시야를 확장해서 보면, 동양인을 미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의 심리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 불거진 "동양인 혐오"와도 본질적으로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7월 2일 자 CBS 뉴스의 한 기사에 따르면, 코로나 팬데믹 동안 미국에서 2120건의 "동양인 혐오"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특히 중국 우한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중국계 미국인, 중국인 이민자들, 중국인 유학생들 모두 혐오와 차별의 타깃이 되었다. 이들은 "원숭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으로 불리거나, "집에 가라 (Go Home)"는 인종 차별적인 언사에 노출됐다.

기사 원문: https://www.cbsnews.com/news/anti-asian-american-hate-incidents-up-racism/


그래서 내가 결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소수 인종의 목소리, 그리고 가려졌던 그들의 삶이 백인들의 그것과 동등하게 미디어에서 다루어지고 정치와 정책에 반영되어야만 한다. 이제는 "멜팅 팟"이 아니라 "샐러드 볼"을 자처하는 미국에서라면 더더욱.

매거진의 이전글 배움: 학생, 선생, 그리고 연구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