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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영 Oct 14. 2024

이수영의 [디지털 ‘제지소’]

제4편 / 조용호 과장님과 소기옥 부회장님 제 지인을 소개합니다.

제지소(製紙所, paper mill)는 말 그대로 ‘종이 제작소’이다. 종이는 정보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지혜의 숲’이라고 할 수 있다. 종이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와 같다. 이런 관점에서 인사이트를 주고받는 공간인 4차산업혁명 시대의 ‘디지털 제지소’를 열었다. 나의 지인 소개와 동시에 내가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며, 그들로부터 배운 것들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소통하는 즐거움을 위해 시작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내 또래의 지인들 소개해와서 조금 다른 관점에서 두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3편에서 다룬 조용호 전 법제처 과장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2015년 지금으로부터 약 10년전 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지만, 법제처의 국민법제관으로 활동을 시작해왔다. 그리고, 당시 법제처에서 법령정비과장이었던 조용호 과장님과 함께 일했다. 우리 담당 과장님이면서 늘 알뜰살뜰 나를 챙겨주셨다.      


그리고 법제처는 나와 인연이 많다. 당시 제정부 법제처장님은 박근혜 정부에서 처음으로 내부인사가 처장이 된 사례로, 내가 재학 중인 대학교의 대선배이기도 하셨는데, 법제처에서 퇴직한 이후에는 모교에 석좌교수님으로 계시기도 했다. 또한, 문재인 정부 이후, 김외숙 법제처장님도 우리학교 교수님으로 노동법 강의를 담당하신 변호사기도 하셨다.     


여튼 돌아와서, 조용호 과장님은 법제처 내부에서도 가장 일이 많은 법령정비과장으로 오래 재직하셨다. 조용호 과장님은 시대변화에 뒤떨어진 낡은 법령의 개선, 그리고,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법령을 중심으로 법을 정비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나 역시도 공유경제를 비롯한 디지털 신기술의 도입과 활동 등 4차산업혁명 시대의 도래에 따른 법령 정비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산림청에서의 드론 도입에 따른 행정 발전 등 신기술의 활용으로 행정적 기반을 마련하는데에도 비슷한 의견을 가지게 되었다. 나아가, 민법 내에서 과거 한정치산, 금치산제도가 성년후견인제도로 정비되면서 본래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게 운용되지 못함에 따라, 이를 일괄 정비하는 방향에서도 함께 고민하기도 했다.     


나는 당시 나이는 어렸지만, 입법에 대한 경험과 내 나름의 전문성을 살려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비치는 편이었다. 당시 법제처 국민법제관은 학계, 시민사회, 법조계 등 전문 분야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특히, 판검사, 변호사가 아주 많았는데, 나의 의견을 가장 잘 수용해준 분이 조용호 과장님이다. 이후에도 법제처 워크숍에서 발제와 토론자로 초청해주셨고, 지식과 이론을 현장에 잘 적용하여 법령을 정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신 분이기도 했다. 내가 법제처를 더욱 좋아하게 된 것도 조용호 과장님과의 활동이 즐거워서였다.      


정말 운이 좋게도 2020년 청년기본법이 제정되기 전,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이 법이 적용되어 현장에 최근에 적용되기 전에 나는 20대 초반의 청년의 나이로 법제처에서 전문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배우고 익히며 성장할 수 있었다. 이 때 만난 사람 중 한 분이 또 소기옥 부회장님이다. 잠시 소기옥 부회장님에 대해 이야기하면, 소기옥 부회장님은 법제처에서 나와 함께 간담회와 회의에 참석하셨고, 같은 주제로 제도 정비에 대한 찬반부터, 개선방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이 때 소기옥 부회장님도 나의 입장을 아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신 한 분이셨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수영 법제관 하면서, 나에게 존대하시는 분이다. 조용호 과장님과 소기옥 부회장님의 자녀가 아마 나와 같은 또래일텐데, 늘 나를 존중해주고, 부족한 의견을 보완해주며, 나를 격려해주셨다.     


소기옥 부회장님은 재난과 안전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신 분이다. 첫 시작은 지방직 공무원이셨다가 지금의 행정안전부에서 과장으로 재직하셨다. 퇴직 이후에는 한국승강기안전공단 기획이사로, 또 민간 감리업체인 도화엔지니어링 기술총괄 부회장님으로 재직하고 계신다. 내가 소기옥 부회장님을 너무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분명히 많은 경험과 능력을 가졌음에도 겸손하신 분이다.      


또한, 청년의 입장에서 늘 많은 것을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며, 직원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본인이 책임지기 위해 그 자리에 있음을 가장 잘알고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적극행정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공직자이다. 이런 소기옥 부회장님은 조용호 과장님과 함께 일하기도 했는데, 이 두 분이 친한만큼 나 역시도 지식과 태도를 배우고 익힐 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로 비슷한 점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이후에 한영수, 김형수 법제국장님도 그러했다. 조금만 더 이야기하자면, 한영수 국장님은 현재 한국법제연구원장으로 재직 중이시고, 김형수 국장님은 내가 자문하고 있는 병무청의 대체역심사위원장으로 오셨다. 나와 함께한 분들은 정말로 징하게 깊은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조용호 과장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조용호 과장님은 법제처 재직 당시, 나 뿐만 아니라 청년세대의 전문가들의 의견을 잘 수용했는데, 전문가로서 국민법제관으로 있기 때문에 나이가 어리다고해서 의견이 가볍지 않다고 하신 분 중 한 분이었다. 또한, 기존에 평가위원 구성에서 경험이 아닌 단순히 연령이 높은지를 기준으로 하는 시스템이 고착화되어 있었는데, 이를 개선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8년 법제처장 표창 수상 당시, 내 나이가 겨우 28살이었다. 상이 아닌 표창을 받은게 처음이었고, 20대라는 어린 나이였다. 역대 수상자 중 가장 어렸고, 나와 같이 수상한 공익법무관도 30대 초반이었다. 법제처장님과 헤드테이블에 앉아 식사도 하고, 여러 의견을 개진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김외숙 법제처장님은 우리 학교의 교수님이기도 하셔서 법제처 같은 직장으로 오는게 어떠냐는 제안을 해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내 역량의 부족으로 법제처 직원으로는 일하지 못했다. 물론 다른 생각이 있기도 했다. 당시, 정의화 국회의장님께서는 나의 멘토이기도 하셨는데, 입법은 국회와 법제처 모두에서 하기 때문에 나의 생각은 국회에서 일하고 법제처와 협력 업무를 하는게 더 좋은 방향 같았다. 물론 지금까지 정책연구를 했을 뿐이다. 


하지만, 정의화 국회의장님은 어린 나에게 늘 기회를 주셨고, 어떤 순간이어도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셨는데, 그 덕에 나는 정말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가 어린 나이에 여기저기서 자문을 하고, 고위직 인사들을 만나고 다녀서 엄청난 빽이나 집안이 부유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나는 아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떻게 보면 더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성인이 된 이후, 학자금과 생활비 대출 등 몸만 큰 어른으로서 경제적 책임을 다해야했으니 말이다. 그런 나에게 이런 귀한 분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은 어떻게 보면 인복이기도 했다. 내 인생 초기에 복을 다 쓴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튼 정의화 전 국회의장님에 대한 이야기도 나중에 써보겠다.     


계속해서 샛길로 새는데, 조용호 과장님은 법령정비과에서 법제교육과로 인사이동을 하셨다. 지방자치와 관련된 법령을 강의하셨고, 또한, 공직자들이 업무를 추진하는데 필요한 멋진말로 법치행정을 펼치는데 필요한 법을 교육하셨다. 이 때, 부서 이동으로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퇴직 후에 좀 더 자유롭게 자주 만나고 교류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조용호 과장님은 퇴직 후에 제2의 인생을 준비하셨다. 원래 고향인 춘천으로 돌아가 변화와 혁신을 위한 변혁법제정책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셨고, 강원특별법이 통과되는데 큰 기여를 하셨다. 지방분권과 강원도의 발전을 위한 정책을 총괄하셨다. 이외에도 ESG 경영 등 다방면의 사회활동을 하셨고, 현재는 강원연구원에서 객원연구위원으로 지역정책을 기획하고 계신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 조용호 과장님은 대학에서는 행정학을, 석사는 미국에서 법학을, 박사는 한국에서 다시 공학박사를 취득한 소위 말하는 창의융합형 인재이다. 마치 내가 소개한 재명이 형과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이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은 매우 친한 관계이다. 내가 조용호 과장님을 통해 배우는 점은 학문간 연계, 통섭형 인재로의 성장이다. 그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늘 배움으로써 성장하는 사람이다. 예컨대, 공학박사를 취득할 당시, IT법제도 관련한 논문을 준비하는데, 같이 박사과정에 있는 청년들과 함께 했기에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씀해주신다. 담백하다못해 나 역시도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함께 성장하는 가치를 중요시 여김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국인터넷거버넌스포럼에 함께할 때도, 현재 과기정통부의 인터넷주소 소위원회 활동을 비롯해 여러 사회활동을 할 때에도 큰 금전적 보상이 따르지 않았지만, 조용호 과장님은 나와 함께 해주셨다. 퇴직 후 여기저기서 역할을 맡아 바쁜 와중에도 나를 챙겨주셨다. 내가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20대였던 나는 특별한 직장도, 빽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나를 늘 자식 대하듯, 그리고 전문가의 시선에서 경청해주셨다. 나는 조용호 과장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가 서로 많은 부분이 닮아있음을 느낀다. 관심사와 최근 사회 이슈에 이르기까지 생각이 달라도 토론이 즐거운 사람 중 한명이 바로 조용호 과장님이다. 소기옥 부회장님도 그러했다.      

소기옥 부회장님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서울에 일이 있어 왔을 때인데, 소기옥 부회장님의 사무실은 강남이고, 나는 용산에서 강의를 했어야해서 이동할 수가 없을 때였다. 이 때 소기옥 부회장님은 나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내가 있는 곳으로 와주셨다. 오래간만에 서울에 왔고, 내 입장에서 뵙고는 싶은데, 시간과 거리, 장소가 맞지 않아 나를 보러 와주신 거다. 그리고 식사를 대접해주고 싶다고... 미리 결제를 하고오셨다. 그 때의 감동은 절대로 잊지 못한다. 내가 뭐라고, 부회장님이 여기까지 와주신건지. 지금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다. 이런 소기옥 부회장님이 왜 조용호 과장님과 친한지, 또 왜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셨는지 알 것 같았다. 진정한 어른이 바로 이 두 분인 것이다. 


다시 또 돌아와서 조용호 과장님은 나에게 법적, 제도적 인사이트를 많이 주셨다. 열린정부 파트너십 회의에서 토론를 해주셨을 때도 그렇고, 내가 인천시에서 청년정책과 관련한 발제를 요청드렸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강의 내용이 생각지 못한 부분이 많아서, 법과 제도가 청년의 창업이 활성화될 수 있게 여러 관점에서 지원되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자신의 전문성과 더불어 여러 법적, 제도적 관점에서의 시각을 제공해주셨다. 최근에는 에듀테크와 관련한 세션에서 인공지능이 교사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점에서 교사의 교육행위가 법률행위로, 인공지능이 이를 대신한다면 상당히 과감한 법적 기반이 필요함을 시사해주셨다. 우리가 인공지능의 능력을 토대로 교사의 교육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집중할 동안, 기존의 법제도가 어떻게 바뀌어야하는지에 대한 부분을 지적해주신 것이다.      


내가 조용호 과장님을 통해 배운 것은 바로 리걸 마인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리걸 마인드에 늘 사람이 있어야 하고, 현장을 모르는 법이 무의미할 수 있음을 지적해주신 것이다. 덕분에 청년정책과 관련한 활동을 할 때에도 조례의 미비성이나 정책 추진과정에서의 과도한 서류 요구로 인한 청년들의 정책 접근성을 지적하는 등 괄목할만한 성장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어른을 만나 내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나보다 많은 경험과 전문성을 가지신 분들이 나를 존중해주고, 챙겨줌으로써, 내가 지금의 노력으로 이렇게 있을 수 있는건 아닌지 되돌아 본다. 그리고 학교에서 나를 가르쳐준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회에서 만난 진정한 스승이 여기 있을 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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