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이야기
상열은 이제 60대 중턱을 넘긴 사내이다. 그는 어렸을 때 앓은 천연두로 얽은 얼굴, 작고 아담한 체구에 그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다부진 몸을 가져 아직도 힘은 젊은 사람 못지않다고 자부한다.
인물없는 처(妻)가 싫다며 일본으로 도망친 아버지를 찾아가 어머니는 형과 누이를 낳았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의 부모는 고향 동네에 터전을 잡아 그를 낳고 살았으나 없이 살기는 어디서나 매 한가지였다. 가방끈이라고는 국민학교 3학년쯤 아들의 책을 찢어 불타는 아궁이에 넣는 아버지 때문에 그는 학교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 후로 남의 집 머슴으로 들어간 그는 품삵으로 받은 쌀들을 집으로 보내야 하는 3남매 막내로 태어났지만 막내노릇 해 본적 없는 사람이다. 바로 위 누이는 도시로 식모살이 하러 떠나고 동네에서 놀림 받기 일쑤인 약간 부족한 형만이 장남이라는 이유로 부모님께 대우 받았다. 6.25 난리통에도 아버지는 그의 형만을 안고 피난가려 했다 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두 살이었다. 그런 그였지만 동네에서 장난하면 빠지지 않는 개구쟁이였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 놀리기, 동네 밭 서리 등 모든 말썽 속에는 항상 그가 중심에 있었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동네에 아이스께끼 장사꾼이 왔는데 친구들과 짜고 그를 놀려 화나게 했다. 성난 그가 아이들을 잡으려고 지게를 내려놓고 달려오는데 그 사이 아이들이 아이스께끼를 가지고 도망한 간 것이다. 또 동네에 미군들이 왔을 때 초콜릿을 달라고 하는데 미군이 주지 않아 예전에 그네들에게서 배운 온갖 영어 욕들을 퍼부었다고 한다. 거기에 화가 난 미군이 그를 잡으러 뛰어와 가까스로 도망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장난치기 좋아하는 그도 배곯음에는 서러움이 많았다. 일하기 싫어하는 아버지는 쌀이 한 되만 있어도 술을 빚고 노름질이다. 행여 어머니가 나무나 해오라면 아침에 올라간 산을 해거름에 거의 빈 지게를 이고 내려오는 때가 많았다. 한퇴기 밭도 없던 어머니는 남의 일을 해 겨우 끼니를 마련할 수 있었으나 그것도 항상 부족해 굶기 매일반이다. 한겨울에도 얇은 한 겹의 바지만을 입고 논두렁이나 개울에서 팽이치기를 했다. 어느 날은 그 바지도 찢어져서 그 틈으로 억세바람이 불어왔다. 그렇게 놀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나물만 잔득 넣어 끓인 묽은 죽을 한 그릇 떠주었다. 머슴살이 때도 허기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창 때였던 그는 식욕이 왕성했다. 명절 전 주인집에서 쌀을 가져다가 읍내에서 떡을 뽑아오라고 하면 그 떡을 한 지게 들고 오면서도 그 떡이 너무나 먹고 싶어 몇 개를 빼먹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면 주인의 성난 얼굴에 가슴을 조리곤 했다. 겨울이 되면 그가 자는 창고로 쓰는 방에는 고구마가 멍석을 사이에 두고 쌓여 있었다. 밤에 너무 배가 고팠던 그는 나무 꼬챙이를 몰래 꺼내어 생고구마를 씹어 먹었다.
어느덧 17.18살이 된 그는 손이 맵고 힘도 장성해서 여기저기서 일해 달라는 부탁도 많이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모아둔 품삵으로 아버지의 회갑잔치와 형의 결혼자금, 누이의 혼수까지 대 주고 나니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혼기가 차도록 남을 일을 도우며 소처럼 일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이름의 밭도 하나 장만하게 되었다. 인물도 배운 것도 없는 그였지만 부지런한 그를 좋게 본 동네 어른의 소개로 한 처녀를 만났다. 그도 오랫동안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다가 혼담으로 친정 부모님의 연락을 받아 내려온 것이었다. 몇 달을 만난 후 그는 결혼도 하고 작은 집 한 채도 장만하였다. 그가 장가들어 홀어머니와 형네부부는 예전처럼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어 주지 않는 그에 대한 불만으로 티격태격하는 일도 많아졌다.
“여기선 애들 학교도 보내기 힘들어요, 굶기지만 않아도 다행이 예요...”
아내는 4남매와 밭 하나 농사져서 먹고 살기 힘들다며 청주로 이사 가자고 했다. 그는 한 번도 그 시골 동네를 벗어나 살아 본적이 없어 두려움이 많았다. 어찌어찌 마련한 돈 백만 원을 들고 무작정 청주로 와 단칸방 전셋집을 얻었다. 돈도 없고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한 적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인분을 푸거나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일하는 것뿐이었다. 저녁에 인분이 잔득 묻은 작업복을 아내는 손 비벼가며 빨았다. 아내는 반찬값이라도 벌 생각에 집에서 장식용 우산이며 소품들을 만드는 일거리를 찾았다. 풀을 끓여서 재료를 붙이면 되는 단순한 일이였지만 하루 종일 일해도 받는 돈은 늘 푼돈이었다. 하루는 다 만든 우산이 뒤집어져 있던 것을 어린 아들이 보지 못해 밟아 우산대로 쓰던 이쑤시개가 아들의 발바닥에 박혀 다친 일도 있었다.
갖은 일을 하다가 그가 찾은 일자리는 방직공장이었다. 그는 늘 곤색의 방직공장 점퍼를 입고 다녔다. 오랫동안 입은 그 점퍼를 벗은 것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전기공사인부로 전봇대를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일을 했다. 하루 종일 밖에서 하는 일이라 그렇지 않아도 검은 그의 피부는 나날이 더 짙어졌다. 그 사이 아내는 아직 어려 학교에 가지 않은 막내아들을 데리고 리어커를 끌며 채소며 과일을 팔았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아내가 과일 장사할 때를 제일 좋아했고 그날 저녁엔 다 못 팔고 남긴 과일을 먹으려고 아우성이었다. 늘 흙이 묻은 작업복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그는 아이들을 보기위해 가끔 아이들의 학교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얼굴이 붉어지며 그에게 빨리 가라고 손짓했다. 그런 일이 몇 번 있은 후 그가 아이들의 학교를 찾아가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그가 하는 일은 위험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일하는 도중에 무거운 것이 그의 발등에 떨어져 뼈들이 으스러진 경우도 있었다. 그가 몇 달동안 일을 하지 못했을 때 아이들은 한창 중학교나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다. 생활이 망막했던 그는 가족들 앞에서도 세상을 원망하기도 부모를 원망하기고 했다.
발이 치료가 된 후 그가 찾은 일자리는 시장에서 물건을 적재하는 인부였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콩을, 어떤 날은 쌀만 나르기도 했다. 쌀 한 자루를 나르면 오십 원, 백 원을 받았다. 무거운 것들 매일 나르다보니 탈장이 두 번이요, 허리며 무릎에 파스 냄새를 달고 살아야 했다. 자전거로 다니다보니 가볍게 차에 치이기도 몇 번이요, 공중을 날아 넘어져보기기 몇 번이다. 그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돌아오면 자식들은 그에게서 발 냄새며 땀 냄새가 진동한다며 난리다. 그는 씻고나와 하루 동안 번 돈을 세어 가면 열심히 장부에 기록한다. 2년마다 적게는 1년마다 전셋집을 옮겨 다니는 게 귀찮아진 그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시골에서 이사 온지 12여년 만에 융자를 낀 작은 집을 장만했다.
그는 TV에서 축구나 운동경기를 해도 보지 않았다. 왜 사람들이 넓은 잔디밭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이 재미있다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주변에서 등산을 가는 사람을 봐도 혀를 찼다. 왜 비싼 밥을 먹고 기운 빼러 산에 가냐는 것이다. 자식들은 그의 무식함에 소리 없이 웃었다. 겨우 한글을 깨친 그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가져갈 봉투에 글을 쓸 때 한없이 작아진다. 그럴 때면 작은 소리로 자식 중에 하나를 불러 대신 글을 써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마다 선거일이 되면 아침 일찍 아내를 데리고 투료하러 가는 그에게 고등학생 딸이 “아버지 투표할 사람 없으면 안 해도 된데요” 하니 “ 그게 아녀. 투표 안하면 주민등록증이 말소가 된다네. 사람들이 그려.” 한다. 그런 대답에 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상열은 이토록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믿어 온 것은 그의 주먹 뿐이었다. 그래서 일할 땐 힘들어도 번 돈을 주머니에 넣으면 그간의 고통이 다 사라지는 듯 청춘이 부럽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도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자전거를 타고 그는 시장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