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나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의 문제로 귀결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20년 가까이 가지고 있었던 '이숙영자기계발클리닉' 홈페이지 www.newlife4u.co.kr를 블로그 https://blog.naver.com/sylove125 로 이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제는 정리하다 보니 새벽 6시더라고요. 20여 년 간의 방대한 내용이라서 모든 자료를 가져올 수는 없겠지만 몇 가지 추려보면서 제가 살아왔던 흔적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89세 되신 저의 엄마는 딸이 이사를 한다는 데 방에 앉아서 컴퓨터로 어떻게 한다는 건지 이해를 잘 못하셔서 조만간 자세히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엄마 같은 인생은 살고 싶지 않아서 엄마 인생에는 관심도 없고 친절하지 않던 제가 이번에는 엄마에게 자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뜬금없는 효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야기해주는 것을 좋아하시거든요.
이번 홈페이지를 정리하면서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그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사이 얼마나 변했을지, 사람에 대한 진정한 호기심이 이런 걸까 싶었습니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그리고 과거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이지만 20여 년의 흔적을 되돌아보면서는 가슴 한 편이 뭉클해져 옵니다.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을까?"도 새삼 생각해보게 되고요.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소통하고 싶은 욕구는 그대로 인 것 같아요. 아마도 이러한 소통 욕구로 인해 브런치에도 글을 쓰고 있는 것이겠지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마음의 병을 얻게 됩니다. 저 역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할 곳이 없었겠지요. 진짜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었을 겁니다.
나는 혼자였다. 철저히 혼자였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있어도 그들과 하나라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남편과 같은 침대를 쓰면서도 혼자라는 느낌이 언제나 나를 힘들게 했다. 사실 이 세상을 살면서 글자 그대로 혼자인 사람은 거의 없다.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이웃들이 있기 때문이다. 혼자라는 것은 이들과의 관계가 나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지 못해서, 함께하는 경험을 쌓지 못해서 받는 느낌이 아닐까 싶다.
- 이숙영의 『엄마, 행복해?』 프롤로그 중에서
그 당시 홈페이지를 만들어 그곳에 매일 글을 쓰면서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많은 치유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서로 치유되는 공간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결국 지금은 상담을 하는 사람이 되었네요. 정리하다 보니 2010년 10월 8일에 <나는 이 사회의 희망인가요?>라는 제목으로 올려놓은 글이 있네요.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나는 이 사회의 희망인가요?
그렇다면 무엇을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나의 선택으로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희망 그 자체입니다. 지금은 어렵고 힘들어도 나의 작은 선택으로 인해 내 미래의 삶이 바뀔 수 있다면 지금의 어려움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는 게 우리 인간의 타고난 능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할 수 없는 자, 그는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나요? 그건 그만큼 선택에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말하기 전에, 나는 선택을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먼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좇는 존재라고 합니다. 자살 역시 인간은 행복을 좇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자살한 그에게는 살아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여겨지기에 하는 선택일 테니까요.
오늘은 윗집의 새벽 싸움과 최윤희 씨의 자살로 인해 마음이 울적하다 못해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며,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선택하는 대로 방향을 틉니다.
그리고 선택의 몫은 온전히 나의 책임입니다.
직업은 돈벌이의 수단이기 이전에 내 삶입니다. 삶을 떠나 직업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직업은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에 대한 것입니다.
나와 나의 삶이 빠져버린 취업준비, 직장생활, 스펙 쌓기, 돈 벌기...
결국은 인생의 불행을 자처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일'은 나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나'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할까'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