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의 꾸밈말 2
노랗게 노랗게 물들었네
빨갛게 빨갛게 물들었네
파랗게 파랗게 높은 하늘
가을 길은 고운길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에게 한국어 동요를 알려주었던 지난 늦여름이 떠오른다. 공원 한가운데서 노래를 부르다가 아이들에게 ‘우리 노란 나뭇잎, 빨간 나뭇잎을 찾아볼까?’라고 제안했으나 머쓱하게도 온통 초록 나뭇잎만 가득했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겨울이 코앞이다. 지나가는 가을 동안 무엇이 가장 아쉬운지를 꼽아 보자면 지난 8년간 꼭 지켜왔으나 이번 해에는 지키지 못했고, 아마 내년부터는 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무엇’이 떠오른다. 그건 바로 ‘아들과 함께 낙엽더미에 뛰어들기’다.
'바사삭바사삭'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는 '부스스부스스' 어린잎들이 비벼대는 소리와 '뽀드득뽀드득' 눈꽃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 중 하나다. 높고 풍성하게 낙엽더미를 쌓으면 아들이 제일 먼저 더미에 뛰어들었다. ‘내가 제일 먼저’를 외치면서. 그렇게 아들의 독무대가 끝나면 아들의 제안으로 온 가족이 동시에 낙엽더미에 뛰어들기를 했다. 손을 마주 잡은 채로 낙엽더미를 둘러 서서 셋 둘 하나를 외치며 뛰어들었다. 서로 더 가까이 뛰어드는 움직임과 낙엽더미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과 넘어지려는 서로를 잡아주는 느낌은 살아있음의 감각을 깨워주었다. ‘아, 행복이란 게 이런 거구나’를 가볍게 느끼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낙엽더미가 부스러지기 쉬울 정도로 물기 없이 아주 보송보송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손을 마주 잡을 관계가 무너져 내릴 듯 빠삭빠삭 말랐기 때문’이었다.
여름을 지날 무렵 우리 세 가족의 관계는 아직 보삭보삭(가벼운느낌)했다. 생기 있고 윤기가 흐르는.
유난히 더웠던 이번 여름. 나는 입천장이 바짝 말라가던 차에 ‘김’을 발견했다. 그 김은 보통 김과는 달랐다. 지인이 한국에서 공수받은 김을 우리 가족에게 선물을 한 것인데 빳빳하고 결결이 살아있는 자태가 참 도도했다. 에어컨이 없는 집 안에 앉아 땀을 쏙 빼고 있자니 잘 챙겨 먹어야만 할 것 같아 얼떨결에 김을 굽기로 했다.
우선 인덕션 위에 제법 넓은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예열을 시작했다. 그다음 갈색 병에 담긴 참기름을 야무지게 입을 오므린 접시에 졸졸 따라 놓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고소하다 못해 구수한 향기가 코끝에 울려 퍼졌다. 나는 참기름 냄새를 맡으면 꼭 깨 볶는 소리가 환청처럼 함께 들리곤 하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냄새를 맡자마자 톡톡 오감이 날뛰었다.
재료 준비만을 마쳤을 뿐인데 이마에도 코끝에도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앞치마도 거추장스러울만치 뜨거운 더위 앞에서 김 한 장을 꺼내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았다. 그 위에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툭툭. 약불이었는데도 제법 뜨거웠는지 김이 소리를 냈다.
바삭바삭
거무 튀튀 했던 김들이 참기름 치장에 소금 마무리로 자갯빛 영롱함을 머금은 채 초록색으로 피어나니 내 얼굴도 덩달아 펴졌다. 김 좋아하는 아들 손에 바삭바삭 버무려져 입에 쏙 들어가는 모습, 식성 좋은 남편 젓가락에 쌍으로 뽑혀 쭉-편 자세를 유지한 채 입속으로 투하되는 모습, 떨어진 김조각이 아까운 내 두 손에 바스러진 김조각이 모여 흰쌀밥에 뿌려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아들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코를 킁킁댔다. 냄새가 너무 좋다며 야단이었다. 그리곤 얼렁뚱땅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아 김하나를 집어 든 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내 마음도 덩달아 바스락바스락. 맛있는 한 끼를 먹고 부풀어 오른 배가 가라앉기까지 심심한 시간을 보내던 아들이 느닷없이 연필로 따라 그리기를 하자고 했다. 둘이 마주 않아 연필을 한 자루씩 쥐고 마음에 드는 그림을 따라 그리는데 아들이 그랬다.
바삭바삭. 연필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나!
김에서 묻어온 소리인가? 연필이 바삭바삭 소리를 낼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나는 한껏 웃어 젖히고 연필을 다시 쥐어 잡았다. 이날을 기억하는 바삭바삭 메모를 적어놓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ChatGPT에게 말을 걸었다. 연필에서 바삭바삭 소리가 난다는 표현을 어떻게 생각해?
연필에서 "바삭바삭" 소리가 난다는 표현은 일상 대화나 문학 작품에서 연필을 사용하는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바삭바삭"은 주로 식품이나 과자와 관련된 표현으로 사용되지만, 연필을 사용할 때 연필의 목재나 연필심이 마찰하면서 나는 소리를 표현하는 용어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문학 작품에서 연필 사용의 즐거움이나 소리의 생생한 묘사를 통해 독자에게 더욱 생동감 있는 경험을 전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연필을 사용하는 장면이나 소리를 통해 작품의 분위기나 캐릭터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에도 활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연필에서 "바삭바삭" 소리가 난다는 표현은 문학 작품이나 생동감 있는 서술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여름의 바삭바삭은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품고 있다. '바삭바삭'은 부사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전적 의미를 갖는데 2번의 느낌과 비슷하다.
1. 가랑잎이나 마른 검불 따위의 잘 마른 물건을 잇따라 가볍게 밟는 소리. 또는 그 모양.
2. 보송보송한 물건이 잇따라 가볍게 바스러지거나 깨지는 소리. 또는 그 모양.
3. 단단하고 부스러지기 쉬운 물건을 잇따라 깨무는 소리. 또는 그 모양.
하지만 ChatGPT의 답변처럼 한 편의 문학 작품 같았던 우리 세 가족의 관계는 가을에 들어서며 확연히 달라졌다. 빠삭빠삭(센 느낌)을 지나 파삭파삭(거센 느낌)으로.
바삭바삭이라는 표현은 19세기부터 한국 문학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바삭바삭을 표현하는 다른 나라의 언어를 검색해 보다가 바삭하다를 표현하는 한자어가 연할 취, 脆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단어는 연하다, 가볍다, 무르다, 부드럽다의 네 가지 의미를 포함하는데 ‘겉바속촉’ 이라는 표현에도 사용되고 있었다. (外脆內軟) 그것은 우리 세 가족의 관계를 바라보는 사고의 전환을 불러오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촉촉할 수 있다.
더위에 못 이겨 얼떨결에 김을 구웠듯이 매서운 추위가 찾아오기 전 얼떨결에 위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우리 세 가족을 겉도는 푸석거림 안에 숨겨진 뽀얗고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내기로 말이다. 보삭도 빠삭도 파삭도 다 취향이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