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하면 딱, 남편의 식스센스

짝꿍

by 안미정

첫 만남부터 그랬다. 나는 너무나 나다웠고, 그이는 너무나 그다웠다.


무턱대고 일을 벌이는 전형적 막무가내 타입인 나는 첫 모임에 늦었고, 매사에 꼼꼼한 그이는 이미 그 자리에 나와있었다. 동그랗게 모여 앉은 연합동아리 멤버들은 시간이 무르익어 한창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고, 헐레벌떡 뛰어온 나는 끼어들 구멍을 찾고 있었다. 어디 가서 앉지? 빠르게 회전하는 내 눈에 빈자리가 포착되었다. 그리고 그 틈으로 맞은편에 앉은 노란색 티셔츠의 사내가 보였다.


그는 앉아있었지만 한눈에도 키가 훤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실제로 상체가 길다) 나도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에게 향하는 눈길을 방관했다. 그에게서는 온화함과 따뜻함이 묻어났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 따위 전혀 믿지 않았었는데 마치 냉장고 자석이 문짝에 들러붙은 것 마냥 내 눈길은 그의 얼굴에 딱 붙어있었다. 그가 어떻게 웃는지, 목소리는 어떤지, 앉을 때의 자세는 어떤지, 또 손은 예쁜지.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유난히 손이 예쁜 남자를 좋아했는데 그건 아마 둘째 동생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길쭉하고 가녀린 손가락에 예쁜 손톱을 가진 동생의 손을 볼 때면 와하는 작은 감탄이 나오곤 했으니 말이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손은 예쁘지 않았다. 오히려 뭉툭하고 통통하고 뭔가 일회용 장갑에 물을 가득 채워놓은 것 같은 형태였다. 참 튼튼하게 생겼네 정도로 생각을 접었던 것 같다.


시시 탐탐 그를 관찰하던 나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고 어떻게 나를 소개할까 하는 궁리에 빠져있었다. 가슴에 달아놓은 명찰이 좀 더 잘 보일 수 있도록 옷매무새를 만지고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기회는 왔다. 첫 모임을 기념하는 단체사진 시간이 온 것이다. 게다가 그의 성인 시옷(ㅅ)과 내 성인 이응(ㅇ)이 연달아 있어 같이 사진을 찍을 확률이 높았다. (이럴 때는 잔머리가 기가 막히게 돌아간다. EQ천재인가)


그의 이름이 호명되고 다음은 나겠거니 했다. 아뿔싸, 그런데 내 앞에 한 명이 더 있었다! 그것도 굵은 웨이브 넣은 우아한 머리를 휘날리며 걸어 나오는 예쁜 여자 사람! 머릿속이 띵 했지만 얼굴에 희비가 교차되는 표정이 지워지기 전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다행인 건가? 얼굴을 조금 떨군 채 사진기를 들고 계신 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바로 그때, 내 오른발이 묵직하게 밟히는 느낌이 났다. 응? 이건 뭐지 하고 시선이 앞을 향했을 때 노란색 티셔츠의 그이가 앞에 서있었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그가 사뿐히 내 발을 지르밟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너무나 미안해하며 '미안해요, 실수예요'를 연발했다. 아니 이렇게 넓은 대강당에서 고작 세명 걸어 나가는데 내 발을 밟아놓고 실수라고? 평소 같았으면 단박에 쏘아붙였겠지만 나는 실실 웃고 있었다. 분명히 웃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발을 밟게 된 이 남자. 내가 살짝 호감이 있었던 그가 나를 향해 멋쩍은 듯 웃었다. 미안하다며 괜찮냐고 묻고, 명찰에 쓰인 내 이름을 확인했다. 그 짧은 찰나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이름 안 까먹겠지? 나답게 모임에 늦어 놓고선 그를 발견하자마자 나답지 않게 변해가는 내가 보였다. 그에게 더 예뻐 보이고 싶고, 또 나의 이름이 그로부터 불려지길 바라는 나. 이 감정을 딱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의 그 설레는 순간은 사진으로 아주 잘 보관되고 있다. 사진을 처음 받아 들고서는 굵은 웨이브의 그녀를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나눠 선 나와 그의 사진구도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멋쩍게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평소에는 쓰지도 않던 안경을 쓰고 있는 내 모습에 복장이 터졌다. 안경이 쏙 파묻힐 정도로 오동통한 내 볼살도 눈에 거슬리고 좀 덜 웃을걸 싶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올라가 있었기에 살짝 황당함도 있었다.


후회하면 뭐 하나며 고쳐먹은 내 마음이 가관이었다.


그가 내 이름을 기억하겠지? 사람 발을 밟았는데 그게 보통 인연인가? 키가 큰 그를 위해 힐을 신어야 하나? 다음에 만날 때는 어떻게 말을 건네볼까? 이쯤 되니 사진 한 장 받아 들고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들이 충분히 무겁군. 콩닥콩닥하는 마음까지 얹히니 나도 내 마음을 막을 재간이 없다. 나 엄청 콧대 높은 여자인데 이래도 되나 싶네.


나의 순정은 1년이 지나도록 빛을 보지 못하다가 술김에 내뱉은 취중고백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적잖이 놀랐던 그는 농담하지 말라며 귀엽게 넘겼지만 우리는 곧 정식으로 사귀게 되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한순간도 나의 취중고백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에겐 식스센스가 있는 걸까? 며칠째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옛날 노래를 갑자기 흥얼거린다던지, 평소에 가보고 싶던 음식점에 가자고 먼저 말을 건넨다던지 하는 우연들이 심심치 않게 이어졌다. 척하면 딱이라는 말이 적절한 것 같다.


그는 DSLR을 매고 다니며 나라는 피사체를 성심성의껏 찍어주었고, 나는 그의 사진 대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또 입맛이 많이 닮아있어서 데이트 코스(무조건 맛집 위주)를 정하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약속을 칼같이 지켰다. 간간히 들고 나타난 손편지와 꽃다발은 완전 취향 저격. 내 반쪽을 만났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싶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 그 이전의 내가 될 수 없어진 나. 그와의 만남은 결혼까지 이어졌고, 우린 지금도 잘 살고 있다.




요즘 들어 가끔은 척하면 퍽하고 날려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여전히 쿵짝이 잘 맞는 편이다. 어느 날은 내가

이거 거기다 넣어서 저기에 갖다 놔줘.

했는데 그이가

빨래를 빨래망에 넣어서 세탁기에 넣으라는 거지?

라고 풀어서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 뭐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다움이라고 정의했던 것들이 그와 함께하면서 우리 다움이 되어간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이 우리스러움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우리의 말투와 행동을 똑 닮아 참 우리스러운 아이를 보며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이 된 그이의 식스센스가 무뎌지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내가 상처라도 받게 되는 건 아닌지 엄청 경계를 하고 있지만 아직 그런 조심은 없다. 내 생일에 홍합 미역국을 준비하고, 내 연주 날에는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 잡은 뒤 가장 큰 박수와 응원을 보주는 섬세한 사람. 걱정해야 할 것은 내 식스센스인 듯하다.


여보, 오늘은 그거 먹을까?
뭐, 짬뽕?
sticker sticker


어리석은 내 질문에 현명한 대답으로 여전한 나와의 찰떡궁합을 증명해내는 그이가 참 좋다.

오늘 짬뽕 잘 먹었어.






<참고>

최상단 사진: 그이가 집에서 직접 만든 짬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