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가 특별하다고 믿는 이유

by 안미정

태생적으로 무의미하게 시간 때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뭔가 가슴 뛰는 일, 마음이 움직이는 일, 머리와 마음이 맞닿는 일을 하루에 하나 정도 일궈내야 ‘오늘도 잘 살았구나’라고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체질이다.


이런 나를 보고 없던 일도 만들어서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타입이라며 날 잡아서 푹 쉬라고 조언해주시는 분들도 많다. 물론 마음이 앞서 몸이 지치는 날에는 나도 쉰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언제까지 쉴 것이며 그 이후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계획하고 쉼에 들어간다. 미래에 일어날 일이 예측되지 않으면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닌 것이 된다.


이렇게 계획에 살고 계획에 죽는 나에게, 즉 일과 쉼의 경계 없이 삼십여 년을 살아온 나에게 결혼, 출산, 육아의 과정은 그야말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했던 큰 도전이었다. 오랜 시간 갈고닦아 온 “나”라는 자아를 묻고, 썩힌 뒤 어디선가 날아와 자리 잡은 “아이”라는 씨앗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갖은 영양분을 머금어야 했다.


처음에 씨앗은 나의 토양과 잘 맞지 않는 듯했다. 워낙 싹이 트는데 오래 걸리기도 했고, 아무리 좋은 영양분을 끌어다 주어도 받아먹질 않았다. 찾아오는 바람이 무서워 머리를 감추고, 혹여나 벌레를 보게 될까 두려워 눈을 질끈 감고 있기 일쑤였다. ‘그러다 갇히게 돼. 눈을 크게 떠!’라고 아무리 말해주어도 아이는 세상을 알아가는데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뿌리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는데 줄기는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아니 뿌리가 이렇게 깊은데 왜 이렇게 못 뻗어나가는 거야!’ 하고 나의 불만이 가득해졌을 때, 나는 내 아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최선을 다해 키워보겠다며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온갖 것을 끌어모아 놓고 ‘너도 좋지?’하고 아이에게 동의를 구해왔었다.


실제로 나는 아이를 참 몰랐다. 어떤 기온을 좋아하는지, 어느 정도의 수분이 필요한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느 속도로 자라날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계획하는 습관이 모질게 남아 있어서 싹 틔우는데 더디고, 주위와 잘 섞이지 못하고,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는 아이가 못마땅했다.

그러다 아이가 아팠다. 숨도 잘 못 쉬고, 햇빛을 받아야 할 잎사귀는 축축 처졌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하고 걱정할수록 아이는 더 야위여 갔다. 내가 더 안절부절못하고 긴장하고 굳어져갈수록 아이는 힘들어했다. ‘엄마 숨 막혀.’라고 아이가 힘겹게 이야기했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너무도 거칠게 아이의 뿌리를 옥죄고 있었다는 것을. 물도 들어가고, 공기도 들어가고, 햇볕이 와 닿을 공간도 없이 꽁꽁 싸매고 있다는 것을.


‘미안해. 아가야 미안해.’ 하고 마구 울었더니 그새 주위가 촉촉해졌다. 층층하게 물이 적셔지자 나도 편해졌다. 부스럼이 생겨 바람에 날리던 것들도 사라지고 생기가 돋았다.. ‘엄마 예쁘다.’라고 아이가 말해주니 잃었던 자존감도 생겨났다. 내가 내가 되니 아이는 아이가 되었다.


아이의 길쭉하고 시원스럽게 뻗어 난 뿌리와 뭉툭하고 도톰한 뿌리 끝자락이 오물오물 움직이는 것이 귀여워서 ‘너는 참 특별하구나.’ 말해주었다. 아이는 뿌리 끝자락을 움츠렸다 펴는 동작을 반복하며 ‘이렇게 빨리 달릴 수도 있어요.’ 했다. 아이가 특별하다고 먼저 믿었더니 모든 순간들이 아이가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특별함은 계획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는 발견될 수 없다. 그저 바라보다가, 들어보다가, 만져보다가 드러나는 것이다. 살짝 왼쪽으로 치우쳐 자라나는 아이, 커다란 새소리가 들리면 솜털을 세우고 긴장하는 아이, 햇살 좋은 날 ‘ 아 좋다.’ 하면서 천상의 미소를 보여주는 아이의 모습은 계획된 것이 아니다. 타고난 것이 누군가에 의해 관찰된 것이다. 그래서 지극히 주관적일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셀 수 없이 많은 특별함으로 드러날 수 있다.


자신을 특별하다고 믿게 된 아이에게는 진짜로 특별한 기운이 감돈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용기가 그것이다. 용기 내어 가지를 뻗어보고, 새순을 피워내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삶은 누군가의 계획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게 실감 난다. 그렇기에 내가 아닌 그 타인의 삶을 쉽게 판단하고 계획하는 것은 넘보아서는 안될 영역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만족해야 할 것은 아이 고유의 특별함을 발견할 수 있는 최측근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것 정도 인듯하다. 아이의 뿌리를 잡아주되 그 뿌리가 되려고 욕심내는 것은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고 결심해보며 오늘도 간질간질 뿌리를 내리는 아이 덕분에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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