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국일보 <여성의 창> 기고 13
별 볼 일 없는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되풀이 일정이 있다. 바로 도자기 수업이다. 나는 주 1회 방문하는 도자기 수업을 통해 흔들리고 흔들려서 한쪽이 뒤틀려 버린 나를 바로 잡는 점검의 기회를 얻는다. 흙과 맞닿은 손끝에 집중하는 동안 온전히 나로 머물며 마음을 정돈하고 새로운 한 주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토요일 오전 세 시간이라는 자유를 쥐어 준 남편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되새기며.
물레에 처음 앉던 날, 작은 흙덩어리를 두 손으로 꽉 붙들고도 중심을 잡지 못해 이리저리 휘둘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레가 돌아가는 힘이 그렇게 센 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돌아가는 물레 위에서 흙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용기에 바탕을 둔 결단이 필요했다. 나의 경우 ‘너 딱 걸렸어’의 마음으로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 에너지를 모으고, 그 안에 흙을 가둔 뒤 순간적으로 압축하는 힘과 물레의 빠른 원심력을 이용하여 중심에 다가갔다. 시도는 좋았으나 내게 부족했던 건 ‘중심의 고요’에서 멈추는 일이었다. 중심이 잘 잡힌 흙에선 스스로 존재하는 듯한 ‘있음’이 묻어나는데 나는 그 ‘있음’이 긴가민가하여 조금 더 힘을 주는 바람에 줄곧 흙의 중심에서 벗어나곤 했다. 시간이 지나 그 ‘있음에 대한 감’을 잡았을 때에도 나는 기분에 따라 무너지기 일쑤였다.
한 번은 8살 아들과 도자기 수업을 함께 찾았다. 엄마의 취미생활을 궁금해하는 아들 앞에서 나는 잘하고 싶은 마음에 더 열심히 고군분투했다. 그런 날 지켜보던 아들이 슬쩍 다가오더니 나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엄마, 내가 중심 잡는 거 도와줄게.”
아들의 백허그에 없던 힘도 솟아나는 듯했다. 동서남북 분주하게 흔들리던 흙은 우리 둘의 맞잡음으로 곧 ‘고요’해졌다. 이 경험은 나에게 여러모로 큰 경험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육아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일방적일 수 없고, 상호 보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 육아도 자신만의 궤도를 찾아 흔들리며 나가는 아이가 중심을 찾아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 잡아주는 일 정도에서 멈출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권력으로 세상의 중심을 대신 찾아서 아이를 세워둔다 할지라도 스스로 버텨낼 힘이 없는 아이는 빠른 원심력과 함께 중심을 잃고 날아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흔들리는 양육자가 어린아이를 올곧게 붙잡아 줄 수 없다는 확신도 들었다.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도자기 수업을 통해 중심 잡기의 기술에 대해 제대로 배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