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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자연인 Jul 17. 2022

비파나무

나만의 슈필라움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비파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왜 그게 하고 싶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렸을 때 슈퍼마켓을 하던 친구는 뭐든 집어먹을 수 있었겠다며 부러워하던 시선과 약간 비슷하다. 김정운 교수는 어렸을 때 꿈꾸던 것을 하는 것이야 말로 행복한 삶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바로 앞에 멋진 몽돌해변이 펼쳐져있었지만 마당은 없었다. 당연히 나무가 자랄 공간도 없었다. 생업에 바쁜 부모님이나 별생각 없이 자라던 나도 나무를 심을 생각이 없었다. 비파나무는 우리 동네 이집저집에 흩어져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지나가다 몰래 따먹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비파나무가 있는 집은 잘 아는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 집이었을 텐데 비파 한주먹 따먹어도 되냐고 물어보지 않았을까 이상해진다. 괜스레 물어보기가 남사스러웠을까? 아니면 몰래 따먹는 게 더 맛있었던 것일까? 모르겠다. 껍질을 벗기면 샛노란 과육에 물이 흥건하고 입에 통째로 넣으면 달콤 새콤 참 맛있었다. 입 안에 과육만 남기고 큰 씨앗은 길가에 툭 내뱉어버리는 재미도 있었다.


땅을 구하기로 결심했지만 내 땅에 비파나무를 심는 일은 생각만큼 쉽게 되지 않았다. 국유지를 빌리기로 한 일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장하면 보습 데일 땅이 없었던 일제강점기의 농민의 심정이 이랬을까. 은행 대출을 받아 조그마한 땅이라도 사는 게 정신건강에 더 이로웠을 것이다.


땅을 찾는 것과는 별개로 적당한 비파나무를 찾는 것도 과제였다. 비파 농장을 직접 찾아다니기보다는 인터넷 쇼핑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구매자 리뷰가 많은 비파나무를 찜해놓았었다. 땅만 구해지면 여차하고 심을 요량이었다.


그러다 회사에서 조경 업무를 담당하는 동기에게 나무 심기에 대해서 조언을 구하던 중 뜻밖의 사실을 알았다. 인터넷에 파는 비파나무를 대충 심었다가는 열매를 보기까지 8년은 걸린다는 것이었다. 동기는 접목묘를 찾아보라는 황금 같은 말을 해주었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며 동기를 입이 마르게 추어올렸다. 내가 8년을 허비하지 않게 도와준 은인이다. 잠시 조경이란 돈으로 세월을 살 수도 있는 꽤 멋진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여수에 접목묘를 전문으로 분양하는 비파 농장이 있었다. 그곳 농장의 네이버 블로그를 즐겨찾기만 해두었고 여전히 힘들게 땅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2021년 봄에 나의 슈필라움이 구해졌고 어떠한 사정으로 인해 봄에 비파나무를 심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늦가을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비파 농장에서는 이미 봄에 가을 분양분까지 다 팔렸다는 글을 올렸다. 그래도 전화로 사정은 말해봤다. 여수가 고향이라는 말과 사장님의 비파나무를 우연히 알게 되어 블로그를 자주 들락날락 거리며 살 시기만 저울질하고 있었는데 여의치 않아 이제야 연락드렸다고 했다. 사장님은 흔쾌히 두 그루 정도는 괜찮다며 농장에 오라고 했고 나는 기뻤다.


아들과 임신 중인 아내를 데리고 비파 농장에 들러 친절하신 사장님의 안내를 받아 꽃이 많이 피어있는 두 그루를 골랐다. 정말 은은한 향이 났다. 잘하면 돌아오는 초여름에 열매를 볼 수도 있다고 했다. 분을 크게 떠서 슈필라움에 가져가 적당한 자리를 골라 삽으로 땅을 팠다.


삽질하는데 아들이 옆에서 난리를 쳤다. 자기가 하겠다며 삽을 뺏고 아빠는 위험하니 옆으로 비키라는 것이었다. 본인이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시기라 삽을 쥐어주니 몇 번 시늉을 내보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시 삽을 나에게 건네줬다. 힘들게 나무를 심고 땅을 밟아 다지고 있었는데 아들이 또 아빠는 위험하다며 옆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작은 발로 동동거리며 제법 잘 다졌다.


그렇게 드디어 꿈꾸던 바다가 가까운 땅을 구해 비파나무를 심는 임무를 완수했다. 이걸 하려고 이렇게 어렵게 땅을 구했구나 뿌듯했다. 그러나 글을 쓰고 있는 2022년 7월 현재 겨우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모두 허공에 날려 보낸 나의 비파나무 두 그루는 올해 열매를 맺지 못했다. 인생도 제 마음대로 안 되는 법이지만 마찬가지로 무정한 자연은 우리 앞에 쉬이 열매를 내어주지 않는 야속함을 받아들여야겠다. 하지만 올해 봄에 비파 나뭇잎이 다시 돋아났고 겨울에 피울 꽃을 기대하고 있다. 거대한 자연 앞에 기다리는 것만이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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