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의 첫째 아이인 도윤이는 예정일보다 3주나 늦게 세상에 나왔다. 출근 때마다 직장 동료들의 애가 아직 안 나왔냐는 걱정을 듣는 것도 부담이었다. 동네 산부인과에서도 예정일을 훌쩍 넘긴 아이가 부담스러워 대학병원에 가라고 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아내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두 시간 거리의 대전의 한 산부인과에서 나는 아내의 왼쪽 다리를, 조산사는 오른쪽 다리를 잡아주는 도움으로 건강하게 도윤이를 낳았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는 아내의 고생 끝에 얼굴을 보인 도윤이가 잉 하고 울 때 코끝이 찡했지만 의외로 무덤덤하게 지켜보았다. 현재 도윤이가 세 돌이 되기 두 달 전이고, 출산까지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산부인과에서 예정일을 잡아 유도분만을 하고 무통주사를 맞으며 제왕절개를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출산하는 보통의 방법이다. 아내도 안전하게 그렇게 낳길 바랬다. 하지만 아내는 자연주의 출산을 고집했다. 아내는 나에게 자연주의 출산이 무엇이고 뭐가 좋은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유난이다 싶었다. 남들 다 하는 대로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공직에 있는 아내는 아이를 임신하고 두 달 정도 뒤에 휴직을 냈다. 그 후로 자연주의 출산 대비를 열심히, 또 힘들게 해나가고 있었다. 매일매일 계단 오르기, 숲길 걷기를 했다. 애 낳는 데 힘과 체력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태교에도 정성을 들였다. 시간 날 때마다 클래식도 듣고 동화책도 읽어주며 하루를 보냈다. 아내는 엄마가 편하고 감정이 안정되어야 아이가 잘 자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매일 밤 아무도 없는 벽에다 하는 것 같은 태담이 부담이었다.
한 번씩 마산에 있는 조산원에 들러 아내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상담도 진행했다. 자연주의 출산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집에서 편하게 낳을 수 있도록 진통이 시작되면 바로 전화를 달라고 했다. 아내는 정말 집에서 낳을 작정이었다. 내심 불안했다.
작은 처형도 둘째 아이는 집에서 출산했다. 건너 건너 알게 된 근처 파독 간호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순산했다고 했다. 사실 아내는 두 시간 거리에서 달려오는 마산 조산사 선생님이 걱정이었다. 혼자서 여러 지역을 다니다 보니 아내와 비슷한 시기에 출산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그래서 아내는 차라리 처형 집에 머물면서 30분 거리의 파독 간호사 선생님이 아이를 받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엔 파독 간호사 선생님이 나이가 많아 아이를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부탁드려보았는데 아마 마지막이 될 거라며 하시겠다고 했다. 독일에서부터 쓰던 혈압계로 아내 혈압을 재고 임신 시기별 특징이 적혀있는 오래된 책자도 보여주셨다. 자긍심이 가득해 보였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독일에 있을 때 아이를 받은 횟수가 많아 기네스북에도 기록되어있다고 했다. 출산 예정일이 코 앞이라 파독 간호사 선생님은 내진을 통해 아내를 진단했는데 아직 아기가 골반쪽으로 덜 내려왔다고 했다.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아내는 처형 집에 머무르면서 출산 준비를 했고 나는 한 시간 거리를 출퇴근했다. 조산사가 가까이 있으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하지만 출산 예정일을 하루 이틀 넘길 때부터 아내는 초조해했다. 근처 계단을 죽어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그러면 운동도 되지만 중력의 작용으로 아기가 밑으로 내려온다고 했다.
사실 아내가 임신 후반기에 대상포진에 걸렸었다. 3주 정도 앓았는데 약을 먹을 수 없으니 참고 또 참으면서 버텼다. 논문을 찾아보니 태아도 그때 성장을 멈춘다고 했다. 다행히 태아에겐 영향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출산이 늦어지나 싶었다.
아내는 배가 아픈 느낌이 있고 똘똘 뭉친 것 같다며 드디어 진통이 시작되나 기뻐했지만 고통이 이내 누그러졌다. 여보 진통은 진짜 죽을 것 같대 그 정도 아파서는 안된다며 아내에게 농담을 여러 번 했다. 아내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2주가 지났는데도 출산 기미가 없어 파독 간호사 선생님 집에 방문해 내진을 받았다. 태아가 전 보다 많이 내려오기는 했는데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내는 자책하며 매일 밤 울었다.
그즈음 처형도 셋째를 임신한 극 초기였다. 그런데 유산하고 말았다. 아내는 언니와 형부에게 미안하다며 울었다. 아내는 기다리는 아기는 나오지 않고 오히려 언니가 유산했다며 오열했다. 아내는 심리적으로 사면초가였을 것이다. 분명 들렸던 태아의 심장소리가 이번엔 들리지 않는다는 진단에 처형도 눈물을 흘렸다. 임신중절 수술도 해야 했고 산후조리도 해야 했다.
더 이상 처형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처형은 아내가 더 중요하다며, 태아가 기형이었을 확률이 높아 자연유산이었을 거라며 위로했지만 너무 염치가 없고 죄송해 짐을 쌌다. 아내는 울었고 이렇게 쫓기듯 가면 언니와 형부가 더 미안해 할 수 있다며 며칠 더 있자고 했지만 설득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처형은 동생을 기다리는 두 아이들에게도 언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라 더 슬펐을 것이다.
아내는 자연주의 출산이고 뭐고 이젠 안 되겠다며 대학병원을 가자고 했다. 그래도 자연주의 출산을 준비한 것이 아깝다며 아내를 설득해 자연주의 산부인과를 알아봤다. 그곳에서도 안된다고 하면 그때 대학병원을 가보자고 했다.
대전에 자연주의 출산을 하는 산부인과가 있었다. 조산사가 아이를 받고 의사는 응급상황만 대기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고 했다. 차라리 집에서 아이를 낳는 것보다 백배는 낫겠다고 생각했다. 한 달 전에 싸놓은 출산용품을 챙긴 출산가방을 가지고 대전으로 향했다.
다행히 의사 선생님은 예정일이 3주가 지났지만 자연주의 출산을 해보자며 내진을 세게 했다. 그렇게 진통이 온 경우가 종종 있었다며 아내를 안심시켰다. 아내는 많이 아파했다. 조산사 선생님은 혹시 진통이 올지 모르니 점심을 근처에서 먹고 산책 좀 하다 진통이 오지 않으면 그냥 집으로 가서 더 기다리라고 했다.
우리는 점심으로 공주에서 추억의 김치치즈 탕수육을 먹었다. 그때였다. 아내는 배가 아프다고 했다. 죽을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조산사 선생님에게 전화를 하니 입원하라고 했다. 확인해보니 정말 진통이 시작됐다. 아내는 아프지만 기뻤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힘들어하는 아내의 손을 잡아주거나 정말 죽을 것 같냐는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는 것뿐이었다.
아내는 일반 가정집처럼 꾸며진 방으로 옮겼고 태아의 심장박동만 체크해주는 기계를 배에 달았다. 의사 선생님은 정말 출산과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한 번씩 지켜만 볼 뿐이었다. 아내의 호흡이 옅어지면 기계에서 태아가 위험하다며 삐삐 소리가 났다. 그때 내가 할 일은 흡흡 하하 하며 아내의 호흡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내 손을 잡은 아내의 손에 힘이 세질 때마다 아내는 살려달라며 애원했다.
드디어 아기가 나오기 시작했는지 나도 아내의 왼쪽 다리를 붙들어야 한다고 했다. 아내가 힘을 주면서 다리를 밀 때마다 나도 응하면서 밀어줬다. 조산사 선생님은 오른쪽 다리를 맡았다. 조산사 선생님이 힘을 길게 줘보라는 말을 듣고 아내의 호흡에 따라 셋이서 힘을 줬다. 머리카락이 보이기 시작했고 드디어 몸 전체가 나온 아들이 잉하고 울었다. 아내는 울었고 나도 코끝이 시렸다.
탯줄도 잘리지 않은 아기를 아내와 내가 번갈아가면서 안았다. 잘 못 잡으면 부서질 것 같은 아기가 가슴에 안겨 응애응애 울었다. 나는 그때 아기의 존재를 처음 실감한 것 같다. 가상이 아니라 실존으로 다가왔다. 아내는 호흡이 안 되는 상황에서 내가 옆에서 흡흡 하하 할 때 짜증이 났다고 했다. 그랬냐며 웃었다. 그렇게 3주나 속을 썩였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