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봄 드디어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사회 초년생이 1년 후 밥벌이는 하며 살 수 있겠다고 느꼈다. 인생의 첫 허들을 통과했다. 내가 진짜 붙었을까? 혹시 데이터 처리가 잘못되어 내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잘 못 표출된 건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상상도 했다. 필기 합격을 확인하고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에 들었던 벚꽃엔딩은 마치 영화 같았다. 최종합격자 발표 당일 은 하루 종일 영화관에서 영화 수 편을 연달아 보는 것이 불안감을 잊는 내 루틴이었다. 진짜 최종 합격 그다음 날 새벽 지난했던 취업과정을 상기하며 감상에 젖어 흥분해 적어봤다. 지금이 아니면 백수로서 여행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까 봐 3박 4일의 제주행 비행기표를 결제하고 난 직후에 잠이 안 와 쓴 글이다. 비문이 많지만 날 것의 신선함으로 간직하기 위해 거의 고치지 않았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원하는 직장에 바로 붙을 줄 알았다. 왜냐 한 곳만 찍어놓고 준비했기 때문이다. 바로 한국고전번역원. 솔직히 간절히 원하면 다 붙여주는 줄 알았다.
지방 국립대 법학과 다니면서 법학개론 시간에 한자어 위에 샤프로 살살 우리말 써놓는 게 그렇게 없어 보일 수 없었다. 그래서 한자 3급을 준비했다. 시험장 가니 3학년 손들어봐, 4학년, 5학년 하는 것이었다. 나랑 아주머니 몇 분만 어정쩡했다. 굴욕이었다. 그래서 전역 일주일 전까지 한자 1급을 땄다. 그제야 젊은이를 기특해하는 어르신들을 볼 수 있었다.
한자 1급을 따니 법학 서적 읽는 건 당연했고 욕심을 부려 논어 맹자를 읽어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아서 한문교육과 수업도 들었다. 한문이 전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간결하고 심오한 뜻을 풍길 수 있는 유일한 지상 최고의 언어다. 유년 시절에 반지의 제왕이 있었다면 20대 초반을 관통하는 건 한문과 동양철학이다.
반지의 제왕, 한문, 동양철학, 영어를 한 방에 공부할 수 있는 곳이 뉴질랜드라고 생각했다. 뉴질랜드에서 중국인 아저씨 만나 동양철학 토론 동아리에서 영어로 토론하며 영어 많이 배웠다.
사우론이 반지를 만들었던 마운트 둠, 운명의 산, 마오리어로 응가으루호에 산 세 번 가봤다. 반지 제조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학우들 앞에서 발표하니 다들 웃었다.
아무튼 귀국해서 고전번역원 입사를 위해 한자 5000자 외우고, 논어맹자대학중용, 사락통고, 고문진보전후집 읽고 한자 자격증의 최고라 불리는 검정회 사범 땄다. 그때 도올 선생님이 하시던 고전의 향기라는 강의에 가서 내 호로 사인해달라고 했다가 쌍욕을 듣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고전번역원 행사도 찾아가고 고전 활성화 방안도 발표하고.
그러던 2015년 2월. 드디어 고전번역원 행정직원 채용공고가 떠서 썼는데 광탈했다. 한국에서는 알아주지도 않는 아이엘츠 점수를 썼다. 토익 따위 보지 않겠다 생각했던 때였다. 그때부터 멘붕이 왔다.
한문을 배우고 익혔던 지난날이 후회스러웠다. 난 진심이었는데. 정말로. 내가 그렇게 유리 멘털인 줄 몰랐다. 그 후로 토익 980 찍고 한국사 1급 따고 했지만 다들 광탈. 유일하게 내 서류 붙여줄 곳이 농어촌공사일 것이라 판단하고 행정학 공부했다. 농어촌의 아들이라 다행히 붙여줬고 어렵게 최종 면접까지 갔다.
실무진 면접에서 나름 대답 잘했는데. 임원면접에서 뜻밖의 복병이 있는 게 아닌가. 반지의 제왕 작가 이름이 뭔가? JRR 톨킨 하려다가 있어 보이려고 풀네임으로 존 로날드 르웰 톨킨이라고 하니 옆에서 풉풉댔다. 그럼 반지의 제왕이 왜 세계적으로 유명한가? 그다음부터 대답을 잘 못했고 어버버 대니까 그 임원이 상당히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 대답만으로 떨어졌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논문을 쓰고 아라곤의 가계도를 외울 정도로 반지의 제왕에 미치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다 공부해서 다른 곳에 붙었다. 인생 참 내 맘대로 안돼서 짜증 난다.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이 다를 땐 일단 밥벌이하려고 잘하는 것을 해야 하나보다. 반지의 제왕 덕분에 토익 눈감고 lc푸는 스킬 구사로 980 찍을 수 있었고, 한문 공부해서 hsk5급 한 달 공부해서 딴 거면 그래도 헛질은 아닌 거 같다. 가끔 사극 볼 때 서찰 읽어보고 도올 강의 들을 때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으면 됐다.
고전번역원 들어가려고 스토리 만드는 데만 3년은 걸린 듯한데 결국 돌고 돌아 **공사 입소 준비 중이다. 그동안 해외여행하면서 익혔던 언어로 국제협력 분야에서 일하고 싶긴 한데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니 좀 더 기다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