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차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

by 글쓰는 달

큰아이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디저트를 먹을 곳을 찾을 겸 식당 근처를 산책했다. 옆 동네에 오는 것이라서 집에서 미리 아이와 가기 좋은 곳을 검색해봤지만 딱히 끌리는 곳이 없었다. 그나마 눈에 들어온 곳은 주차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갈까 말까 하고 고민하던 차에 십 년 전에 남자 친구와 데이트하러 종종 왔던 카페를 발견했다.


이곳의 마지막 기억은 눈이 아주 많이 오는 날에 데이트했던 모습이다. 당시 남자 친구는 타지에 살아서 주말이면 나를 보러 내가 사는 도시로 오곤 했는데 그 날 따라 눈이 펑펑 내리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눈은 멈출 생각이 없이 계속 쌓여만 갔다. 그가 다시 본인 차를 운전해서 집에 돌아가야 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만나서 함께 있는 시간이 가끔이라 이대로 보내기 아쉽고 헤어지기 안타까워서 서로 먼저 말도 못 꺼내고 있었다.


그때 내게 전화가 왔다.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내게 전화하셔서는 '길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어서 (네 남자 친구를) 집으로 보내라'라고 강하고 길게 말씀하셨다. 쌓여가는 눈 때문에 그는 집에 돌아가는 것에서 끝이 아니라 바로 본인 회사로 가서 비상근무를 해야 할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못 이기는 척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고,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을 때까지 나는 마음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고 나니 전에 왔을 때와는 테이블 방향도 좀 바뀐 것 같고, 카페에 있던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많이 줄어든 게 느껴졌다. 여기는 브런치 같은 메뉴도 제법 맛있었는데 계산대 옆 메뉴 소개판에는 음료 사진들만 잔뜩 붙어있었다. 사진 외의 메뉴 주문이 가능한지 물으니 사장님이 난감해하신다. 자몽은 시즌 메뉴라 안되고, 오늘 장을 못 봐서 바나나 메뉴도 안되고 케이크류도 안된단다. 그래서 우리가 카페에 들어오려고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당황하셨구나. 하하하.


상호명도 그대로이고 자리도 그대로이고 인테리어도 크게 변한 것 없이 그대로이지만 내게는 전과 같지 않았다. 지난 글에서 말한 그대로 있어주길 바라는 장소 중에 하나였지만 내가 기대한 느낌은 아니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내가 원하는 ‘그대로’란 무엇일까.

이 카페는 내가 좋아하던 만화책이 많아서 좋았는데 놀랍게도 그 책들이 그래도 책장에 꽂혀있었다. 다만 약 10년간의 세월을 그대로 받아 색이 바래져서 그림이 희끗희끗해져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자리에서 보이는 장식장의 뒷면은 손님들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잊지 않고 간직한 것처럼 거뭇하게 자국이 무수히 나 있었다. 소품들도 자세히 보면 앤틱 한 것들도 있지만 과하게 귀엽거나 카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지저분해진 것들이 꽤 많았다. 그랬다. 내가 원하는 ‘그대로’라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전에 존경하는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사람이 아무런 발전이 없으면 그것이야 말로 정말 슬픈 일이라고. 아기가 점점 자라고 성장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의 마음은 벅차오르지만 귀엽고 착한 그 모습 그대로 영원히 나이 들지도 않고 혼자 걷지도 않는 갓난쟁이의 모습으로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사람은 발전하고 계속 변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 카페는 어찌 보면 정말 처음 생겼던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십 년간 아무런 발전이 없고 늘 그 자리에 머무르는데 그치지 않고 퇴보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아마도 그래서 내가 미리 이 동네에 있는 카페에 대해 검색했을 때 추천은커녕 한 줄 글도 찾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사랑 노래 가사에 보면 ‘나는 그대로 여기 있을 테니 당신은 언제든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는 표현이 있다. 누군가를 그렇게 열렬히 기다려주고 원한다는 것은 한 번쯤 꿈꿔본 사랑에 대한 로망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구나 새삼 느낀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머무르지 않는다. 계속 떠밀려가고 내가 그 흐름에 묻히지 않으려 발버둥 치기도 하고 때론 그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야 할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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