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하려고 현관으로 가다가 무심코 보게 된 나의 오른쪽 양말. 앞코와 발꿈치는 갈색으로 되어 있고 복숭아뼈에서 한 뼘 정도 되는 발목까지는 보라색 바탕에 갈색곰이 그려져 있는 귀여운 디자인 때문에 작년부터 즐겨신었던 양말이다. 그런데 외출 직전에 본 양말의 갈색 앞코에 검지 손톱 만한 반투명한 부분이 생겨있었다. 완전히 구멍이 나지는 않아서 그냥 신고 외출했더니 역시나 목적지에 도착해서 신발을 벗으니 아까 그 반투명했던 부분은 시원하게 뚫렸고 그 사이로 수줍게 엄지발톱에 물들인 봉숭아 물 자국이 보였다. 어렸을 때 남의 집에 놀러 가는 날이면 꼭 있던 양말구멍. 어떤 때는 부모님 지인 차에 탔는데 양말의 발꿈치 부분까지 구멍이 보여서 민망했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양말에 구멍이 생기면 꼭 바느질해서 기워서 다시 신고는 했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일이 없어진 것 같다. 양말의 질이 좋아져서 일수도 있지만 내 양말에 구멍이 잘 생기지 않는 비밀을 공개하겠다.
나는 평균적인 여성들에 비해 발 크기가 꽤 큰 편이다. 한참 키가 크기 시작할 무렵부터 매년 혹은 반년마다 신발을 새로 사야 할 만큼 내 발은 엄청나게 빨리 자라는 느낌이었던가보다. 여자아이 발이 너무 커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신 엄마께서 어느 해부터인가 더 이상 발에 맞는 큰 신발을 사주지 않으시고 작년부터 신던 발이 꽉 끼는 크기의 신발만 신게 하셨다. 어머니의 정성이 통했는지 내 발은 전보다 자라는 속도가 조금은 더디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내 발 크기는 247mm가 되었다.
247mm의 발로 신발을 사러 가면 늘 결정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대부분의 신발은 5mm 단위로 나오는데 구두를 기준으로 245mm를 신으면 신발에 발이 꽉 끼고 뒤꿈치가 아파서 참기가 어려웠고 250mm 구두를 신으면 걸을 때마다 구두가 벗겨지곤 했다. 떨이세일하는 판매대에서 어쩌다 예쁜 구두를 발견해도 발 사이즈가 애매하여 점원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대부분 창고에서 발 모양 모형이 달려있는 기계를 가져와서 245mm 신발을 늘려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한다. 슬프게도 점원의 노력과 상관없이 그렇게 구입한 신발은 불편해서 딱히 오래 신지 못하고 버려지기 일쑤였다. 직장에 다니고 돈이 생겨서 나 자신에게 어느 정도 투자할 수 있는 때가 되면서 신발에 내 발을 맞추기보다 수제화 매장에 방문해서 내 발 크기와 모양을 종이에 그려서 나만을 위한 신발 제작을 맡기기도 해 보았다. 하지만 보세 가게나 특가 세일 판매대에서 파는 싸고 예쁜 디자인의 신발은 언제나 내게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구두나 샌들은 수제화 제작으로, 운동화는 끈으로 신발 폭을 조절할 수 있는 250mm 제품으로 구입하면서 신발로 인한 어려움은 어느 정도 극복하였다. 하지만 양말은 신발보다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양말은 크게 아동용과 성인용으로 나눈다. 아동용은 발 크기에 따라 굉장히 섬세하게 세분되어 제작되고 판매된다. 하지만 성인용은 다시 크게 여성용과 남성용으로 구분된다. 대부분 여성용 양말의 길이는 대개 23cm~25cm의 발 크기에 적합하다고 표기되어 있다. 247mm의 내 발이 여성용 양말을 신으면 일단 양말이 찢어지기 직전까지 늘어나서 내 발끝이 아파서 괴로워한다. 그렇게 늘어나서 얇아진 양말 앞코는 금세 구멍이 나거나 발목이 쉽게 늘어나서 제대로 양말의 역할을 다해보지도 못하고 한두 번 신고 나면 버려야 할 정도가 되었다. 여름이나 긴 양말이 어울리지 않는 옷에는 어쩔 수 없이 발목 양말 혹은 페이크 양말을 신어야 하는데 여성용 양말은 내게 일회용일 뿐이라 양말 고르는 것도 여간 고민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발견하게 된 것이 바로 남성용 양말이었다! 남성용 양말은 대개 25cm~27cm의 발에 착용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물론 여성용에 비해 예쁜 그림이나 디자인은 거의 찾기가 어렵고 대부분 단색만 있어서 시각적으로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남성용 양말은 내 발은 편안하게 감싸면서도 발끝에 압박을 주지 않아 양말이 구멍 나는 경우가 거의 생기지 않았다. 오래 걸어도 벗겨지지 않았고 단색의 양말을 사면 정장과도 어느 정도 어울리기 때문에 패션과의 조화도 어느 정도 타협을 볼 수 있었다. 배우자와 함께 신을 수도 있고 여러모로 괜찮은 선택이었다. 가장 좋은 선택은 남녀공용 양말을 찾는 것이다. 이런 경우 길이도 부담 없고 디자인도 다양하고 예쁘기 때문에 시각적, 기능적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해서 양말 브랜드를 찾게 되었고 품질에 비해 다소 비싼 가격이었지만 큰 맘먹고 5켤레 정도를 구입해서 작년부터 잘 신고 다니던 차에 처음으로 양말에 구멍이 생긴 것이다. 구멍 난 양말이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내가 양말을 꾸준히 신어 값어치 이상으로 활용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뿌듯한 기분이 피어오른다. 역시 이런 기분으로 양말을 새로 사면 행복해질 것이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