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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달 Dec 20. 2020

79일 차

인형을 빨 수 없는 이유

 주말이다. 오래간만에 대청소를 시작한 남편을 뒤로하고 정신없이 끼니 준비와 설거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방에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남편이 먼저 아이들을 말리다가 혼내고 있었고 나는 조금 상황이 진행된 후에 들어갔다.


 요즘 들어 부쩍 아빠에게 자주 혼나서 서운함이 쌓인 둘째. 마음을 풀어주려고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왜 아빠에게 혼나게 됐는지 물어보게 되었다.

어, 언니가 자꾸 내 인형을 놀리잖아. 지저분하다고.”라고 동생이 대답하기 무섭게 언니가 받아친다. “맞아, 니 인형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라며 자신의 뽀얀 인형을 들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에 할머니 댁에 갈 때 두 녀석 모두 자신의 인형을 가지고 갔는데, 언니 인형만 빨아오고 동생 것은 그대로 가지고 왔기에 두 인형의 색이 확연히 달라 보이긴 했다. 놀리는 언니도 잘한 것은 아니지만 인형이 지저분한 것이 사실이라 아이에게 인형을 세탁하자고 권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울음이 터진 작은 녀석이 한 마디 한다.

 

 “그럼 이제 평생 (인형 하고) 못 만나잖아요!!!!”


 이건 무슨 뜻일까? 세탁을 하고 나면 그동안의 기억과 추억이 다 사라질지도 모르다는 말일까? 아니면 친구(인형)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겠다는 말일까? 한시도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말일까? 그러기엔 유치원에도 안 가져가는 이 인형이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말이지?


 우는 아이를 겨우 달래도 들은 대답은...


 지금 우리 집은 포화상태다. 각종 화구와 책 등으로 짐이 많은 나, 필요한 것이 많은 아동 둘이 합쳐지니 우리 집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한 번 물건을 사면 몇 년간 혹은 평생 쓸 수 있는 어른과 달리 아이들은 계절마다 옷도 바꿔줘야 하고 발달에 맞는 책과 장난감도 새로 장만해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내 생각에는 집도 좀 여유 있게 쓸 겸 하여 당시 아이들이 가장 관심 없어하거나 혹은 연령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장난감들을 추려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겨두었다. 치우고 나서 초반에는 아이들이 없어진 장난감의 행방을 궁금해했지만 이내 묻지 않았고 새로운 관심사를 찾아갔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따금씩 장난감이 없어진 이유를 물어볼 때면 남편과 나는 “고장 나서 고치러 병원에 갔어”, “너무 지저분해서 세탁하러 갔어” 등의 말로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이 말이 아이 마음에는 꽤 깊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훌쩍)... 파란 토끼도 (훌쩍) 흰둥이도 (훌쩍) 다 빤다고 해놓고 다시는 안 왔잖아~~(엉엉엉). 그러니까 이거 못 빨아, 평생 못 만나잖아(엉엉엉)”


한 번 세탁하러 간 장난감은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고 오랫동안 혼자 생각했던 아이의 마음이 귀엽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다. 그래도 더 이상 인형을 빨지 않은 채로 지낼 수는 없었다. 아이에게 함께 인형을 세탁해서 더 깨끗하게 해 주자고 설득해서 겨우겨우 세탁을 마쳤다. 그리고 수건으로 물기를 덜어낸 인형을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널어두는 것은 아이에게 부탁했다.



 그동안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을 거란 사실에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상처되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랐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들에겐 이렇게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음에 책임감이 느껴진다. 인형이 뽀송하게 말라서 다시 꼭 껴안고 자면서 그동안 혼자 고민했던 아이의 마음도 조금이나마 나아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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