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왕고래 Jan 05. 2016

억압과 억제의 차이

영화 '타이타닉'


우리의 몸에는 면역체계가 있습니다. 외부의 감염이나 질병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죠.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속에도 일종의 면역체계가 있습니다. 특정 상황으로 인해 자아가 위협받는다고 느껴지면 여러 보호장치가 자동으로 작동하며 온전한 상태를 유지시키는데요. 이 신박한 면역시스템을 '방어기제'라고 부릅니다. 예전에 비해 심리학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어서 평소 관심이 있던 분이라면 아마 방어기제라는 말이 생소하진 않을 것입니다. 이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친구랑 말싸움할 때 사용하는 기법이 아닐까'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방어기제의 정의는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여,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 의식이나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요. 심리학은 말을 참 복잡하게 하는 것 같아요. 좀 더 풀어보자면 '불안한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자동 장치'정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방어기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식체계' 그리고 '삼원구조이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요. 단어도 괜스레 어렵고, 지금 알아보기도 귀찮으니 쿨하게 넘어가자고요! (부록에 좀 더 자세히 담아두었어요.)


방어기제는 '억압, 부정, 투사'와 같은 신경증적인 방어기제와 '억제, 승화, 유머'와 같이 건강한 방어기제로 그 유형을 나눌 수 있습니다. 특히 이중 '억압'과 '억제'는 각 유형의 대표 선수이면서 동시에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굉장히 비슷하면서도 상반된 특징을 가진 개념이기 때문이죠.




억압과 억제의 차이


재미있는 사실은 '억압'은 정신분석의 석학인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발견한 대표적 방어기제였고, '억제'는 그의 딸 안나 프로이트에 의하여 이론화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럼 아버지의 이론인 억압에 대하여 먼저 알아볼까요?


 ‘억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론이 생겨난 시대적 배경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론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근대 유럽의 빅토리아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히스테리아, 즉 '전환장애' 환자가 많았다고 해요. 어느 날 갑자기 신체의 일부가 말을 듣지 않게 되는 것이죠. 주변에서는 마귀가 들어섰다거나 꾀병이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지만 프로이트는 다르게 보았습니다. ‘억압된 무의식의 표출’이라는 게 그의 접근이었어요.


프로이트는 당시의 문화를 그들이 필수로 사용하던 코르셋처럼 보았습니다. 신체 그 자체를 관리하기보다 꽉 조인 코르셋 속에 감춰두고 외형을 근사하게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 말이죠. 겉으로는 고귀하고 교양 있는 품성을 주고받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난잡한 성생활이 있던 당시 상황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 다 하는 것을 마치 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쉬쉬하던 문화.


프로이트는 그 문화 속에서 개인의 내면에 일어나는 작은 균열을 찾아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분명 존재하고 또한 표출되고 있는 욕구가 대외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 지정된 곳에서만 드러낼 수 있는 제한적 표현들.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내면을 ‘억압’하고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렇게 억압되어온 내면의 흐름이 병리적으로 이어지면서 신체 일부분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전환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주워들은 걸 다 꺼냈으니 시대적 배경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이제 억압의 개념이 대충 예상이 되시나요?


억압은 자신의 불쾌한 경험이나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욕구, 반사회적인 충동 등을 무의식적으로 억누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의식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억압의 주요 키워드예요. 억압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방어기제이며,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위의 전환장애처럼 다른 형태로 표출되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몸의 저항력이 약화되었을 때 (아프거나 힘든 일을 당했을 때)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억압과 억제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억제는 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엄격한 아버지와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엄격함 레벨은 그야말로 어나더 레벨이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입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찍소리도 낼 수가 없어요.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모습은 어휴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집에 있을 때는 자신의 모든 내면과 욕구를 억압합니다. 무의식적으로 말이죠. 집 밖을 나서면서 묵혀둔 숨을 몰아 쉽니다.


반면에 억제는 이렇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엄격한 척하시지만 속으로는 걱정도 많고 따뜻한 분입니다. 게다가 하시던 일도 어려워져서 최근 더 민감합니다. 가끔씩 소리치시는 건 진심이 아닙니다. 그 후에 남몰래 후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때문에 아들은 자신의 일부를 아버지 앞에서 인내합니다.


억압과 억제의 차이가 보이시나요? 저는 억제를 위한 선행조건이 '이해'라고 생각되더라고요. 상대방이나 외부 상황에 대한 이해가 동반되어야 하는 거죠. 억압이나 억제나 그게 그거 같다고요...? 영화 <타이타닉>의 두 남녀를 보면 좀 더 비교가 될지도 몰라요.


두 주인공인 잭과 로즈는 살아온 환경부터 차림새, 신분, 대인관계까지 완전히 다른, 정말이지 영화가 아니라면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인데요. 이는 방어기제의 관점에서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가까워지는 순간까지 잭은 억제의, 로즈는 억압의 대표적인 행동들을 일관적으로 드러내거든요.




로즈에게서 드러난 것 - 억압


로즈를 비롯하여 타이타닉에서 볼 수 있는 그 주위의 인물들이 바로 당시 귀족들의 보편적인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누구 하나 무시당하거나 품위가 상하는 것을 원치 않죠. 모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중 대부분이 억압에 시달리고 있던 셈입니다. 로즈도 그중 한 명이었죠.


하지만 그녀는 주인공답게 조금 다릅니다. 사회적인 문화 통념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무의식과 조금씩 직면하고 있던 것이지요. 그런 시기에 우연히 잭 도슨이라는 무계획, 무개념의 남자를 알게 되고, 이상하게도 점점 더 그에게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로즈의 억압되어 있던 내면은 잭과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깨져갔고, 마침내 그녀는 깨닫게 됩니다. 우아한 손동작, 엄격한 예비 신랑, 귀족의 끈을 붙잡으려는 엄마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주위의 수많은 시선 속에서, 자신이 진짜 원하던 것들을 모두 억압하고 있었다는 것을. (로즈의 어머니 입장에서는 가장 바라지 않던 결과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두터운 막을 뚫고 나오는 모습들을 하나둘 직면하기 시작합니다.


정신분석 치료에서는 이처럼 억압되고 있는 무의식 속의 욕구를 의식과 대면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로즈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영화 중반에 그녀가 한 소녀를 응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손수건을 곱게 깔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귀족의 품행을 배우고 있는 한 소녀. 귀엽고 고운 소녀의 모습에서, 자신 역시 당연하게 거쳐 온 그 모습에서, 로즈는 참을 수 없는 답답함과 회의를 느낍니다.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내가 어떻게 이런 곳에서 지내온 거지?’ 그리고 오랜 시간 억압되어 있던 내면의 울렁임이 폭발하듯 터져 나옵니다. 잭을 향해 내달음질 치죠.


로즈의 그런 모습을 통해, “억압하지 않으려면 막 그냥 막 일탈하면 되는 거야?”라고 하실 수도 있는데요. 그렇진 않습니다. 스스로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면의 욕구를 모두 꺼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야 억제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잭이 멋있어 보이는 이유 - 억제


억제는 ―로즈의 ‘억압 문’을 열어준 잭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로즈의 지인들은 아무런 지위가 없는 잭을 무례하게 대합니다. 하지만 잭은 똑같은 무례를 범하지 않죠. 겁나서였을까요? (그렇다면 억압이겠죠.) 그렇다고 하기엔 시종일관 보여주는 잭의 모습이 너무 편안합니다. 어떤 모험과 경험이든 마다하지 않는 그에게 귀족들의 눈총과 파이프 담배가 두려울 리 없죠. 그는 단 한 번도 타이타닉 호의 귀족들에게 굽신거리지 않습니다. 그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잭이 그려온 그림들 속에는 그가 겪어온 귀족들에 대한 이해가 묻어 있습니다. 그는 귀족들의 나약한 내면을 굳이 건드리지 않습니다. 이런 잭의 태도에서 억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특히 로즈와의 저녁 만찬에서 귀족들의 비아냥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잭의 모습에서 억제의 멋진 면모를 볼 수 있는데요. 특히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칼(로즈의 약혼남)'은 궁지에 몰려고 작정을 한 모양입니다.


- 칼: (당신 같은 천민이) 이 배에는 어떻게 타신 거죠?


- 잭: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일을 자주 했어요. 보통 증기선을 타며 이동했죠. 하지만, TITANIC호의 표는 운 좋게도 포커게임에서 땄어요! 정말 운이 좋았죠!


잭이 여유 있게 답하자,  그가 한 번 더 몰아붙이죠.


- 칼: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 생활이 마음에 드나요?


당시 그가 뱉은 방랑자의 의미는, 집도 절도 없는 최하층민에 대한 발언이었습니다. 보통은 기분 나빠서 주먹부터 올라가기 딱 좋죠. 하지만 잭은 어깨를 쓱 올린 뒤 얘기합니다.


- 잭: 네, 그렇습니다. 전 지금 제 자신이 필요한 건 다 있거든요. 내 폐를 채울 공기와 종이 몇 장이면 되죠. 더욱 행복한 건 하루하루가 예측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어떠한 일이 생길지 모르고, 누구를 만나게 될지, 어딜 가게 될지도 모르죠. 특히 어젯밤에는 선교 밑에서 잠을 잤는데, 지금은 세계 초일류 배에서! 멋진 여러분들과 샴페인을 들고 있잖아요? 인생은 축복과 같은 선물이에요. 전 그런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아무도  다음번엔 어떤 패를 받게 될지 모르는 것이죠. 인생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해요. 매 순간순간을 소중히 해야죠.



이후 만찬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이 '순간을 소중히'라고 외치며 건배를 잭의 받아들입니다.


참 멋진 장면이죠. 잭이 이처럼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주인공이라서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영향도 있겠지만...)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미리 멋있는 말들을 준비해 놓은 것도 아니겠죠.


잭은 그저 주변 사람들에 비해 솔직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자신이 겪은 일과 실제로 느끼는 생각들을 나열한 것뿐이죠. 잭이 그럴 수 있는 것은, 당시 사상이나 틀에 의해 자신의 출신이나 내면을 꾹꾹 억누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우리가 잭을 보면서 느끼는 해소감은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이따금 나 역시 잭보다는 로즈의 모습을 가질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부족한 면, 부끄러운 조각들은 숨겨두고 상대의 결핍을 관찰하기 시작하는 거죠. 어쩌면 로즈의 어머니와 약혼남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외면은 더 완벽하고 훌륭해 보일 수는 있어요. 다만 내가 무의식 중에 모른 척하고 억압하고 있는 것들은 없을지 따져볼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나아가서, 단점이요? 흠이요? 먼저 꺼내보는 건 어떨까요.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잖아요? 잭  도슨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짝사랑을 하면 고장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