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소심하다.
제가 이 컵을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대학원 시절, 이과 계열의 선생들과 밥을 먹은 적이 있다. 당시 부족한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연구 조교 자리가 필요했고 물리학 관련 연구실의 조교를 맡았다. 다른 성격의 전공자들과 밥상을 마주하게 된 사연이다.
한 선생이 묻길래 심리학을 전공한다고 답하자 대뜸 자신에 대해 맞춰보라고 했다. 난 '지금 당장은 당신의 눈이 두 개, 코가 하나, 입이 하나인 것 정도 외에는 알기 어렵다'고 답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심리학자인데 왜 모르냐고 했다. 나는 '심리학은 충분한 단서와 패턴을 모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지 어렴풋이 껴맞추는 게 아니라고 답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 됐다. 감히 물리학자 앞에서 과학이라는 단어를 붙여?
"난 그냥 사람 딱 보면 사이즈 나오던데."
그들 중 입이 좀 더 가벼운 이가 하품하듯 말을 흘렸다. 난 답하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게 뒀다.
"그런데 그게 분석까지 필요해요? 제가 진짜 몰라서 하는 말일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중력'처럼 명확한 게 아니잖아요. 그걸 전문적으로 연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 건지..."
내 뜨뜻미지근한 반응 때문인지 아니면 본래 서먹한 식사 분위기 탓인지 다른 한 명이 흘러가던 실언의 꼬리를 물었다. 심리학을 전문적인 학문으로 구분하는 게 맞냐는 의미였다. 뭐,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들렸다. 부글거리는 속에 모래를 한 무더기 끼얹었다. 컵을 들고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컵을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물이 쏟아지겠죠." 누군가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중력에 의해 컵이 떨어지고 컵 안에 있던 물이 쏟아지겠죠. 그런데 심리학에선 컵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왜요?"
"저는 이 컵을 놓지 않을 거거든요."
인간의 행동은 타고난 성향과 다양한 맥락의 영향을 받는다. 현재 기분이나 상태에 따라 만유인력의 법칙 조차 외면할 때가 있다. 내가 안 놓으면 그만인 것이다. 때문에 개인의 행동을 예측하려면 주변의 요인들을 모두 통제한 후 특정 행동을 일으키는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심리학자들은 '컵을 어떤 경우에 들고 있는지 혹은 떨어뜨리는지'에 대한 원인을 찾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측정 가능한 방식으로 검증한다.
가령 내가 특정 상황에서 컵을 떨어뜨린다면, 연구자는 그 행동에 관련된 여러 요인을 탐색하고 가설을 세운다. 쉽게는 '화가 났기 때문에 떨어뜨렸다'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소심한 성격의 벽을 부술 만큼의 분노가 차오른 것이다. 연구자는 다른 요인들을 통제하고 당시의 심장박동 수와 체온을 측정한다던가 심경에 대한 설문 등을 하여 요인들을 수치화한다. 통계 분석을 통해 가설의 검증을 시도한다. 그 결과가 합리적으로 산출되면 '내가 화내는 상황이나 원인'을 하나쯤은 알게 된다. 심리학은 대략 그렇다.
왜 심리학자가 될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의외로 내 얘기를 경청했다. 열길 물속처럼 딱 부러지는 자신들의 학문과 달리, 한 길 사람 속에서 조차 정답보다는 최적해(最適解)를 찾아야 하는 심리학의 방법론을 흥미로워했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며 MSG가 묻어서인지 나름 근사했던 장면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내가 심리학을 택한 이유는 그리 근사하지 않다. 대학원에서 이런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심리학에는 여러 세부 전공이 있는데 저마다의 선택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동심리학자들은 발달에 어려움이 있고, 사회심리학자들은 대인관계의 문제가 있으며, 임상심리학자들은 정신에 문제가 있다. 상담심리학자들은 친지 중에 골칫덩어리가 있다. 농담이긴 하지만 실제 전공자들이 들으면 활짝 웃지 못한다. 그 농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불편하지 않으면 신경 쓸 일이 없고, 신경 쓸 일이 없으면 그것이 진로로 정해질 만큼 중요하지 않다. 어떤 연유던 계속 눈에 밟히고 삶에 엮여있었던 것이다. 내가 진지하게 알아보고 싶은 만큼.
나 역시 그런 농으로부터 활짝 웃어지지 않는다. 나는 소심하다. 좋게 표현하면 내성적이고, 더 좋게는 내향적이다.
소심하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심리학을 연구하며 소심을 대범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찾지 못했다. 정확히는 바꿔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오히려 관계가 어려워서 보이는 것들이 있다. 눈에 밟히는 것들. 그것들이 날 새로이 고쳐 쓴다.
소심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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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고래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소심합니다. 사람에 대한 글을 씁니다. 어릴 적, 꿈을 적는 공간에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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