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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an 21. 2016

휴식의 조건

 #20. 내적 동기와 외적 동기


물소 떼 같은 출근 인파가 한 숨 쓸고 지나가면 그와 상반되는 한갓진 오전 풍경이 열린다. 시장 골목은 어제의, 그리고 그제의 모습 그대로다. 다들 살인적인 더위를 피해 그늘로 숨어들었다. 부동산 아저씨도, 떡집 사장님도, 봉제 공장 사모님도, 분식집도, 화장품 가게도, 철물점도, 범죄자의 깊게 눌러쓴 모자처럼 저마다의 그늘을 유지하느라 분주하다.


옆 건물 할머니만이 그 ‘안전지대’를 벗어나 앞마당을 쓸고 계실 뿐이다. 날이 이렇게 뜨거운데 건강 상하 시겠어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참아낸다. 할머니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그것에 투자하신다. 골목지킴이처럼 빗자루를 세워 잡은 채 앉아계시다가도, 이내 뭔가 생각나신 듯 다시 빗자루질을 시작하시곤 한다. 어쩌면 그녀의 ‘쓸기’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주요한 일상 일지 모른다.


그런 각각의 풍경 속에서 나 역시 안전지대 밖을 거닐고 있지만, 왠지 개운하다. 한 여름 아지랑이가 겨드랑이까지 파고들며 미끌 거리는데도 그럭저럭 참을 만하다. 아침으로 먹은 장조림과 찬밥이 맛있어서도, 셔츠에서 올라오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좋아서도 아니다. 그런 외부적 요인과 상관없이 —아니 혹시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냥 개운하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봉다방에 다다르자 노란 문을 여는 봉순이 눈에 들어온다. 굿모닝, 응, 우리는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뒤 오픈 준비를 한다. 그늘 속에 숨어든 시장 골목처럼 우리의 일상도 큰 기복 없이 자연스레 진행됐다. 고운 모래 그득 차있는 주차금지 간판을 내어온다. 빨간색 플라스틱 재질의 그것은 겉보기에 상당히 가벼워 보이나, 막상 그것과 바닥 사이에 빈 공간을 만들려면 제법 많은 근육이 수축되어야 한다.


봉다방으로 돌아와 계단에 있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집어 들었다. 좁은 계단 사이를 비집고 올라 다시 안전지대 밖으로 몸을 내민다. 아직 오전의 햇살인데 스포트라이트마냥 강렬하다. 동그란 나무 테이블을 알맞게 배치한 뒤, 의자를 놓는다. 테이블 위에는 촛대와 작은 화분을 올린다. 봉순이 대답한 ‘응’은 나의 굿모닝에 대한 것일까? 지금은 사실 아침과 정오의 중간선이니까 점심 인사가 어울리는데. 뭐 그건 이 더위와 상관없는 네 성격이니까. 별 의미 없는 생각들이 맴돈다. ‘굿 에프터눈(good afternoon)이지. 바보야.’라며 딱히 중요치 않은 대답을 하는, 하지만 우리의 대화를 더 풍성하게 만드는 그녀를 상상해보며 테이블이 흔들리지 않게 고정한다.


봉순이 양손 가득 화분을 들고 나왔다. 나 역시 계단으로 다시 내려가 양손 가득 화분을 집어 든다. 테이블 주위로 화분들을 배치한다. 크고 작은 화분들이 마치 테이블을 수호하는 병정들처럼 보인다. 어느새 셔츠의 반이 땀으로 젖어들었다. ‘개운함’ 방어막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은 개운한 하루야, 다시 한번 되새기며 화장실 수도에 호스를 연결한다. 이 호스로 물을 뿌리면 더 개운해지겠지, 되새김에 살을 붙인다.


물을 틀자 줄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각각의 화분들에 윤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묵직한 혹서의 중력을 뚫고 물방울들이 허브의 잎사귀로 도달하는 시간, 그 시간 동안 그 물방울들은 얼마만큼의 원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들은 ‘증발의 위험’에 노출된 후 어느 정도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까, 난 고속도로에서 팔을 흔드는 경찰 마네킹처럼 호스 끝을 이리저리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들을 거듭 떠올렸다.


한 가지 강렬한 생각이 자꾸 '개운 방어막'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제의 나, 그리고 그제의 나도 생각했던 그것이었다. 어제의 봉팔이, 그리고 그제의 봉팔이도 이유 없이 개운한 출근길을 걸었다. 그리고 주차금지 간판을 옮긴 뒤 양 손 가득 화분을 내올 때쯤 자신들의 셔츠가 반쯤 젖어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지금처럼 물줄기를 뿜어대는 호스를 바라보면서 외면하고 있던 ‘하루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은, 개운하다는 생각을 일부러 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전에 없던, 뜨거운 대낮의 육체노동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사실 개운 방어막은 고통에 대한 완충제일 뿐이다. 때문에 더 이상 방어막이 필요 없는 시점, 호스를 잡고 팔을 흔드는 그즈음에 사실 개운치 않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마도 난, 의도적으로 개운하다고 생각하며 걸어왔나 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잊기로 한다. 내일의 봉팔이를 위해서, 내일의 봉팔이가 시전 할 개운 방어막을 위해서이다.


“그랬군.” 더 이상 깊이 생각하는 것이 싫었는지, 일종의 의식적인 혼잣말을 뱉었다. 봉순이 돌아보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 방어막이 사라진 지금 어떠한 말도 더 할 만큼의 여유가 없다. 한시라도 빨리 봉다방 주위를 적신 뒤, 이 기나긴 호수를 되감고 에어컨 냉기 가득 찬 봉다방으로 들어가고 싶을 뿐이다.


“오픈하시나 봐요?”


그렇게 한차례의 오전 행사를 마친 뒤 서둘러 들어설 때쯤, 낯익은 누군가가 다가온다. 독거여인이다. 항상 홀로 봉다방을 방문해서는 구석진 자리에 전세를 놓기에 정해진 별명이다. 평소 상당한 포커페이스였던 그녀 역시 더위 중력을 피할 수는 없는가 보다. 그 평평했던 미간에 작은 음영이 지어져 있다.


“네. 날씨가 너무 덥네요. 들어오세요.” 더위에 녹아내린 안면 근육 힘겹게 들어 올리며 호의 깊은 표정을 지어본다. “에스프레소 더블이시죠?”


그녀가 항상 주문하던 메뉴.


“네.”


갑자기 기분이 안정된다. 독거여인 때문이 아니다. 에어컨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그 은혜로운 냉기가 목을 감고 들어서며 셔츠 속 곳곳을 누빈다. 바람 스쳐 지나간 자리 자리마다 보송한 솜털들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 혼란스럽던 잡념의 날파리들도 사라진다.


“하핫! 에스프레소! 제가 맞췄군요.”


나는 조울증 환자 마냥 몇 초 전과는 달리 해밝은 말투를 던져버렸다. 그녀는 남자 직원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살짝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표정을 유지하며 자리를 잡고 앉아서 두터운 다이어리를 펼치고 있었다. 눈치 빠른 봉순이 에스프레소를 준비하는 것이 보인다. 오픈과 동시에 손님이 들어오는 경우는 흔치 않아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릴 것이 분명하다. 나는 독거여인에게 양해를 구한 뒤, 얼음물 한 잔을 갖다 주고 주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내어갈게.” 잠시 후 봉순이 에스프레소를 간장종지만 한 잔에 따르며 말한다. “너는 오픈 마무리 해”


“오케이~”


나는 ‘응’이라는 대답에 내포된 순응의 의미에 반역을 하듯 수평적 문화권의 표현을 뱉어본다. 테이블의 각도를 바로잡고 의자 역시 그에 맞게 줄을 세운다. 흡사 군 시절 도열할 때만큼이나 오차 없는 정렬이다. 시럽 통을 닦고 노즐 부위를 더운물에 담근다. 재료들의 남은 양을 확인 한 뒤 수납장에서 삐져나온 것들은 보이지 않게 집어넣는다. 과일도 확인해야 한다. 처음 만났을 때의 싱싱함이 사라져가는 과일은 껍질을 벗겨 냉동실 과일 칸으로 옮긴다. 슬러시를 만들 때 좋은 재료가 된다. 널어져 있는 행주를 물에 적신 뒤 반듯하게 접는다. 그리고 밤사이 주방에 내린 먼지 눈을 닦아낸다. 또 뭐가 있지. 아, 브런치 메뉴를 위해 빵을 잘라낸다. 잠시라도 집중을 늦추면 빵에 언덕이 생길 것이다. 봉순의 호통이 이어지겠지, 나는 빵의 옆구리를 노려보며 천천히 규칙적인 속도로 베어낸다.


사실 이런 것들은 오픈 준비라고만 하긴 어렵다. 중간중간 수시로 확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가, 아주 미세하게라도 흐트러진 무언가가 여사장의 눈에 들어갈 경우엔 여지없는 지적이 돌아온다. 자신의 집은 대공황 당시 미국 거리처럼 어지러이 흩뿌려놓은 그녀도, 봉다방만큼은 무서울 정도의 정리 욕심을 보인다. 때문에 나 역시 삶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정리 본능을 깐깐한 여사장의 기준에 맞춰 쌓고 있는 셈이다. ‘테이블 정리는 항상!’, ‘자꾸 여기 안 닦을 거야?’, ‘선반은 이 라인을 지키라고 했잖아.’, ‘에어컨 온도는 23도!’ 등, 내 눈에선 존재도 하지 않는 작은 균열들을 용납 못하는 그녀였다.


영화 속의 한 인물이 떠오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 패션계의 거장인 그녀는 편집장이라는 직책을 대변하듯 편집적인 업무 스타일과 완고함으로 몇 번이나 비서를 갈아치웠다. 근무시간을 초월하는 업무의 연속과 더불어, 그 지시는 날이 갈수록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무엇이든 원하는 타이밍에 자신의 성향대로 처리해야 하는 성격 때문일 것이며 그랬기에 세계적인 편집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배우 ‘앤 해서웨이’가 역할을 맡았던, 극 중 '미란다의 비서'가 이리저리 게거품 물고 뛰어다니던 모습을 떠올리며 현재의 내 모습을 대입시켜 본다. 그리고 명품들을 몸에 두르고 우아한 손동작으로 이곳저곳 가리키며 지적하는 봉순의 모습도 떠올려본다. 봉순은 프라다를 입는다? 피식.


“음악부터 틀어야지. 썰렁하잖아.”


독거여인에게 커피를 전달하고 돌아온 봉순. 확실히 양반은 아니다. 부드럽게 안아주는 에어컨 바람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미란다 봉순’의 요구에 순응한다. 노트북을 열고 음악을 재생했다. 재즈 트리오의 연주가 양쪽의 스피커에서 감미롭게 흘러나온다. —스피커는 좋은 것을 써야 한다는 봉순의 주장에 따라 비싸게 구입하였다.— 들릴 듯 말 듯 피아노의 간드러진 선율로 시작되는 도입부에 슬쩍 드럼 비트와 콘트라베이스의 깊은 울림이 얹어지며 음악은 생명력 불어진 새처럼 활개를 편다. 새는 봉다방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자신의 향취를 털어낸다. 어디든 닿을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처럼.


얼마간 한가한 시간이 흘렀다. 온몸을 늘어뜨린 채 앉아있다. 오늘따라 봉순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다. 에어컨 바람에 되찾은 상쾌함도 언젠가부터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데자뷔, 어제의 봉팔이가 찾아온다. 어제도 이 맘 때쯤에 이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깨닫는다. 에어컨은 2차 방어막이었음을.


“봉순아”


나는 손님이 듣지 못할 정도의 적당한 볼륨을 찾아 그녀에게 말을 건다.


“오늘 기분이 좀 멍하지 않아? 어제도 그랬던 것 같은데…”

“맞아. 여름이라 그런가.”

“아니 내 생각에는…”


우리는 너무 쉬지 않고 달려왔다.


“우리에게도 휴식 기간이 필요할 것 같아.”


미란다 봉순은 ‘휴식’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는 아이처럼 쳐다봤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봉순의 성격상, 살면서 잘 떠올리지 않았을 단어이다.


“다방 문을 닫자고?”


그녀 다운 해석. 아이라인 진한 두 눈이 마치 하품이라도 하듯 확장된다. 이해는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봉순과 봉팔의 휴식은 봉다방의 휴업이나 마찬가지다. 그녀와 나는 수개월간 쉬지 않고 달려왔다. 하루 12시간, 일주일에 6일, 그나마 남은 하루도 봉다방을 위한 계획이나 카페 기행을 위해 쏟았으니, 실제로 ‘아 나는 휴식을 취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만한 날은 없었다. 아침이 발 밑까지 스미는 시각에 일어나서 라면을 끓여먹고 소파에 뻗어 하루 종일 리모컨을 괴롭히는 날이 있을 법도 한데, 단 하루도 그런 평온의 순간은 없었다. 우리는 열심히 달려왔고, 또 많은 것을 이루어 냈다. 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녀의 눈이 불안 반 기대 반으로 빛난다.


“휴식의 여건을 만들어보자.”


“어떻게?”


“새로운 식구.”


봉순이 새. 로. 운. 식. 구, 라며 한 글자 한 글자 되새긴다. 이 역시 처음 듣는 단어일까. 그녀의 사고에서 일어나는 연상 작용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새로운 식구는 곧 새로운 직원, 새로운 직원은 곧 시급을 받으며 일할 사람, 시급은 곧 봉다방의 돈. 넉넉하지 못한 봉다방의 돈.


“돈은?” 그녀는 순서도에 따라 움직이는 디지털 신호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예상된 대답을 뱉는다. “아직 새 직원에게 줄만큼의 돈은 없어.”


“너 다단계에 왜 많은 사람들이 매혹되는지 알아?” 그녀의 말을 끊는다. “그들이 받는 동기부여가 크기 때문이야.”


그녀의 미간에 글자가 새겨진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이런 상황을 위해 준비해둔 말이 있다.


“우리가 손님 끌기로 자극했던 동기는 말하자면 ‘외적 동기’였어. 하지만 봉다방의 박봉….” 박봉이라는 말 뒤에 약간의 시간차를 두며 봉순의 반응을 살핀다. 이때 아니면 언제 생색내리. “하지만 봉다방의 박봉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일하려면 내적인 동기가 필요해. 돈은 외적 동기일 뿐이거든. 다단계 역시 마찬가지야. 개인의 영업력에 따른 단순 인센티브 제라면 말려들 사람 거의 없겠지. 그들은 자기계발적 접근으로 회원의 내적 동기를 자극해. ‘그래. 내가 이 시스템을 활용해서 나만의 그림을, 나만의 영역을 이루어보자.’라는 식이지."


그녀가 작은 눈을 깜빡이며 바라본다. 어떠한 반응도 없지만 내 말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항상 그렇다. 나는 얘기하고, 그녀는 듣는다. 그렇다고 그녀가 모르는 내용도 아닐 터, 더불어 역발상으로 꽉꽉 채워져 있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할 말이 없지도 않을 터이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 듣는 냥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는 한다.


"예전에 심리학자가 이런 실험을 하나 했어.”


얼마 전 <인간노트>에서 읽었던 부분을 떠올린다.


어느 유치원. A반과 B반에는 각각 100명씩의 유치원생들이 있다. “그리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그려 보세요.” 선생님은 아이들 모두에게 스케치북과 크레용을 나누어 준 뒤 말했다. 아이들은 약 30분 동안 각자의 작품에 몰두한다. 그리고 모두의 작품이 끝날 무렵, 선생님은 A반과 B반의 아이들에게 서로 다른 보상을 주었다.


A반 아이들에게는 착실히 잘했다며 맛있는 막대 사탕을 나누어 주었고, B반에는 그림에 대한 칭찬만을 해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유 시간이 주어졌을 때 아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관찰하였다. 선생님들의 사탕을 받은 A반 아이들이 더 많이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B반 아이들의 대부분이 스케치북과 크레용을 꺼내 든 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왜 이런 결과가 일어난 것일까.

외적 동기와 내적 동기의 차이 때문이다. 사탕을 받은 A반 아이들의 경우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사탕을 받는 것’이라는 사고의 흐름이 형성된다. 즉 그 아이들의 손에 크레용이 주어지려면 ‘사탕’이라는 외적 동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때문에 선생님이 자리에 없는 자유 시간에 그림을 그릴 만한 동기가 크지 않은 것이다.


B반의 경우는 다르다. 그림을 그린 후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선생님의 ‘잘했어요.’라는 말이 맴돌며, 아이들은 스스로를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이 그 시간을 즐겼다고 여기게 된다. 때문에 선생님이 안 계신 자유 시간에도, ‘내가 즐기고 잘하고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내적 동기이다. 물론 아이들의 경우 사고의 흐름이 단순하기 때문이 이런 방법들로 내적인 동기를 일으키기가 쉽다. 하지만 성인의 경우는 다르다. 그간 살아온 삶의 시간과 가치관들이 영향을 미친다. 고로 어느 정도는 관련된 내적 동기가 형성된 사람일수록 외적인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동기 실현을 위해 행동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니 말은 외적 동기로서의 급여액이 적어도 일할 사람이 있다는 거야?”


“아마도. 나의 경우도 그에 해당되니까 없다는 건 아니야.”


봉순의 반응을 살폈다. 또 한 번 생색 타이밍이다.


“번듯한 직장을 나와 매일같이 이런 중노동을 하면서 돈은 그 전의 반의 반의반의 반의반 수준! 게다가 여사장은 미란다 봉순 편집장! 깐깐함 세계 선수권 대회 금메달 리스트!”


봇물 터지듯 술술.


“하지만 묵묵히 너의 곁에 남는 것은 다 그에 응당한 내적 동기가 있기 때문이야.”


이만하면 본전이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하고 싶지만 타이밍을 놓쳤던 그 말.


“절대 인지부조화 때문이 아니지!”


“알겠어. 진정진정.” 그녀가 두 손을 앞뒤로 움직이며 익숙한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그런 내적 동기가 있는 사람이 있을까?”


기본적으로 봉다방에 대한 애착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인의 경우 기본적인 애착이 없이 내적 동기가 발생하기는 힘들기 때문. 애착이 있다는 것은 이미 봉다방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


“아는 사람?”


노트에 메모해두었던 내용을 펼친 뒤 검지 끝으로 툭툭 쳐본다. 그곳에 적인 네 글자가 봉순의 시상을 타고 그녀의 뇌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하지만 뇌는 그 단어가 가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는지 다시금 입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리틀 봉순?”


어찌나 크게 물었는지 독거 여인이 주방 쪽을 돌아볼 정도. 봉순은 그렇게 외마디 비명을 지른 후 갸우뚱 거리기 시작했다. 차 전면부에 붙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강아지 인형 같다. 그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는 중인 게다.


“얼마 전 리틀 봉순이 앉은자리를 치우는데 뭔가가 있었어.”


흔들리던 그녀의 고개가 멈춘다.


그 자리는 현재 독거여인이 앉아있는 자리였다. 솔로들의 명당 같은 곳인가. 대부분의 홀로 오는 여성들은 그 자리에 벽과 마주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거나 책을 읽고는 하였다. 리틀 봉순도 친구와 올 때를 제외하고는 그 자리에 앉아서는 메모지를 찢어 무언가 열중하여 그리거나 끼적거리고는 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깜빡한 것인지 고의인지는 모르지만— 메모지 한 장을 놓고 갔다


나는 노트에 끼워 놓았던 종이 한 장을 꺼내 봉순에게 보여주었다. 공책에서 찢은 듯한 16절 크기의 종이 조각이었다. 종이의 윗부분에는 색연필로 그린 듯 보이는 꽃 한 송이가 있었다. 줄기도 잎사귀도 없다. 하지만 불과 몇 초전 뿌리와 줄기를 떼어낸 듯 생명력이 느껴지는 꽃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선과 색의 조화, 그 오묘한 그림의 아래에는 삐뚤빼뚤 메모의 흔적이 남아있다.


- 안쪽 나무벽이 너무 허전하다. 유화가 하나 그려지면 좋을 텐데


봉순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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