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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an 20. 2016

쓰고 매운 열매

#19. 작은 열매만큼 쓰고 매운 것도 없다.



오픈 후 4개월이 지난 어느 날, 사장으로 불리고 싶었던 그녀가 첫 월급봉투를 건넸다. 어색한 표정으로 건넨 완두콩 색의 봉투엔 '봉다방 첫 월급'이라는 그녀의 필체가 괴발개발 줄 서 있었다. 못난 글씨들이 이렇게나 귀엽다.


사실 ‘월급봉투’라는 게 추억의 산물이 된 지 오래다. 지난 회사 생활 동안 받은 것이라곤 건조한 인쇄 활자가 가로세로 배치된 급여명세서였다. 그마저 최근엔 이메일 발송으로 바뀌었다. 당일에 통장에서 전액을 인출하지 않는 한, 그들이 내게 부여한 노력의 가치를 마주할 일은 없다. 그 가치는 네모 반듯한 플라스틱 카드를 통해 다음 턴까지 조용히 소진될 뿐이다. 참, 재미가 없다.


노동의 보상을 직접 봉투에 받아 본 것은 학창 시절 아르바이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더군다나 이런 파스텔 톤의 봉투로 받아본 적은 없다. 수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정, 그녀가 내게 준 건 그것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무언가를 얻은 기분이다. 투명한 수면에 유색 잉크를 떨군 듯 명치에서 가슴 전반까지 따뜻한 온기가 퍼져나간다.


봉투 뒷면을 보니 숫자가 오밀조밀 적혀있다. 급여액이다. 급여액을 봉투에 적다니, 그 사장 배짱 한 번 두둑하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그런데 액수가 좀 이상하다. '0'이 하나 빠진 것 같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정신 집중해봐도 똑같다.


"이거 아무래도 금액이, 잘못 적혀있는 것 같은데."


"정확해."


"아니, 그게 아니라. 분명 뭔가 잘못…."


"정확하다니까."


온정으로만 사람을 부리겠다는 건가.

작은 고추 맵다 하였다. 인내 쓰고 열매 달다 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작은 열매' 만큼 쓰고 매운 것도 없다! 회사에서 받던 '종이 한 장'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낭만적인 급여명세서.


아니, 침착하자. 돈은 그저 교환 수단일 뿐이다. 사람이 중요하지. 침착하게 시급을 계산해본다. 일한 시간, 급여, 나누면, 음, 다시. 일한 시간, 급여, 나누면, 후, 다시. 일한 시간! 급여! 아니, 다시 계산해 볼 필요도 없다. 이건…


“이건 10년 전 내 아르바이트 시급보다도 적은 수준인데?”


“야-”


가늘게 뜬 두 눈.  


“최소 임금이라는 노동법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에서…”


“이럴래?”


강하다.


“나 같은 고급 인력에게 너무하다는 생각…”


“진정진정-”   


그녀가 자신의 공기를 밀어내려는 것 같은 모양새로 손바닥을 움직인다. 머리는 손보다는 느린 속도로 궤적은 더 크게 까닥이고 있다. 그녀의 습관적인 말투이다. 때때로 내 감정이 고조되면 자동으로 이 소리가 들려온다. 미세하게 상하운동을 하는 두 손, 다 알면서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 당할 수 없는 이 표현에는 함정이 있다. 마치 상대방이 필요 이상의 감정을 아무 이유 없이, 그것도 갑작스레 분출시키고 있다는 뉘앙스를 준다. 잘못한 건 그녀인데 내가 진정해야 할 것 같고 실제로 진정이 된다. 이따금 주객을 전도시키는 그 분위기에는 묘한 힘이 숨어있다. 몰래 최면이라도 공부하는 건가.


그런데 이 상황, 뭔가 익숙하다. 4개월 넘는 장기간을 ‘묻지 마 일해’로 부려 먹더니, 어느 예기치 못한 야밤에 그 대가를 쥐여줬다. 하지만 그 액수는 유복한 집 막내아들의 일주일 용돈보다도 못한 수준. 그럼에도 난 사람이 어쩌니 세상이 어쩌니 하며 합리화를 하고 있다. 설마.


“인지부조화 같은 얘기는 꺼내지도 마. 정작 사장인 난 한 푼도 못 받으니까.”


내 생각이 들리는 건가. 아니면 정말 감춰둔 능력이라도.


“아니, 뭐, 굳이 그 얘기를 하려 했던 건 아니야. 하하.”


메마른 기침 같은 웃음을 뱉으며 놀란 맘을 감춘다. 그녀가 차가운 아메리카노에 담긴 빨대에 입을 댄다.


그 표정이 참 아련하다. 입은 웃고 있는데, 아래쪽을 보고 있는 눈은 마치 투명한 컵 바닥 아래 파스텔 톤의 테이블을 지나, 봉다방의 나무 바닥보다도 더 깊은 땅의 뿌리를 바라보는 것 같다. 순간적으로 드러난 그 표정에 자리를 고쳐 앉았다. 생각해보면 손익분기점 돌파는 그저 손해를 면하는 수준이다. 이제 막 ‘봉다방’이라는 나룻배가 항구를 벗어난 것이다. 자칫 여유 부리다가는 봉다방 사장님이 다른 다방에서 일하는 해프닝이 발생할 수도 있다. 가능하다면 불과 몇 초 전의 투정을 주워 담고 싶다. 가슴으로 스며든 급여명세서를 문질러 지운다. 우리 사장님이, 그녀가 잡념을 분산시킬 수 있는 소일거리를 던져본다.


“메뉴판 만들어 줘.”


땅속으로 뿌리내리던 그녀의 시선이 이쪽으로 다시 모여든다.


“메뉴판? 왜?”


손님이 늘어나면서 드러났던 미흡한 점 중 하나, 봉다방에는 메뉴판이 없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메뉴판은, 그 소심한 녀석은 작디작은 칠판이다. 게다가 웬만한 열정으로는 찾을 수 없는 귀퉁이에 숨어있다. 찻장 옆, 봉다방의 크고 작은 조명들도 손이 닿지 않는 공간이다. 어여쁜 인테리어를 위해 그곳에 걸어놓아야 한다는 것이 봉순의 의견.


“테이블에 앉아서 볼 수 있는 메뉴판도 필요할 것 같지 않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 후 창고에서 책자를 만들기 위한 재료들을 꺼내온다. 난 연두색 봉투를 곱게 접어서 가방에 넣은 후 주방으로 돌아가 정리가 미진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했다. 커피잔의 물기를 닦아놓는 것을 깜빡했다. 물기가 있으면 미세먼지가 뭉치며 컵에 얼룩이 지기 쉽다.  마른행주로 잔들을 닦는다. 봉순은 자신만의 투명한 벽을 시전 한 채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은은한 유색 조명 아래, 마른행주가 커피잔을 스치며 훑으며 물기를 머금는 소리 그리고 손을 꽤나 움켜야 쓸 수 있는 몽땅 색연필이 종이 위를 누비는 소리만이 떠다닌다. 마치 대학 시절 그때의 우리로 돌아간 것 같다.


“완성했어.”

“벌써?”


봉순의 ‘뚝딱’ 마법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테이블엔 이미 완성된 메뉴 책자가 놓여있었다. 그런데 내가 감각이 없는 건지, 그건 그저 갱지로 된 표지의 작은 연습장이었다. 표지엔 아무런 내용도 없었는데 그녀에 따르면 감격의 완성을 위해 남겨두었다고 한다. 일단 나에게 보여준 뒤 그린다고.


메뉴판의 첫 페이지를 노크한다. 낯익은 그림, 그 모습을 갖추기 전 봉순의 스케치북에 담겨있던 봉다방의 알록달록 구상도가 있다. 다시 봐도 포근하다.


“감회가 새롭지?” 그녀가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물었다.

“그러게. 벌써 4개월 전이네.”


다음 장을 넘겨보니 얇은 선들이 얽히고설킨 그림 한 폭이 있다. 색이 채워진 부분은 없지만 묘하게도 꽉 찬 느낌이 든다. 훈훈한 분위기 틈타 나름의 평가를 해본다.


“이 그림은 뭐랄까. 그, 봉다방 지하실 내면의 고충과 삶의 희망? 그리고 그 심연에 있는…”

“커피야.”

“응?”

"원두라고. 향 좋은 원두가 커피로 변화되는 모습이야.”


예술 참 어렵다. 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다음 페이지를 향한다. 얽히고설킨 그림 한 폭. 음, 좋다. 다음 페이지. 얽히고설킨 그림 한 폭. 멋지다. 다음 페이지는 음, 얽히고설킨,  그다음도 얽히고설킨... 음, 메뉴는? 메뉴는 언제 나오는 거지.


“아, 메뉴.”


맙소사. 메뉴를 깜빡했단다. 봉순의 결여된 2%는 잊을 만하면 나타난다. 그녀가 얽히고설킨 그림 한 폭의 틈으로 메뉴를 채워 넣는다.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 카페모카, 그리고 몇몇 브런치 메뉴들. 그런데.


“그런데 좀 심심하지 않아? 메뉴 이름 말이야.”

“듣고 보니 그러네.”

“아메리카노 뭐라노?

“뭐야 그게.”

“메뉴 이름.”


그녀가 입 벌리며 ‘웬일이니’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제는 보인다. 그녀는 이미  받아칠만한 명칭을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우리의 뇌는 뜨거워진다. 아메리카노 뭐라노, (시작은 그렇다 치고) 에스프레소 좀 보소, (심한 거 아냐?) 미친 칼로리 허니브래드, (먹고 싶을까?) 미각 파괴 레모네이드, (팔 생각이 없네) ㅋㅋㅋㅋ크로크무슈, (웃어?) 냐옹이와 마법 수프, (고양이 수프야? 덜덜) 드립니다 드립커피, (요건 좋네) 동구 밖 과일주스, 한 번 먹고 두 번 먹는 쬬꼬라떼, 달콤 쌉싸름의 유혹 카페모카…. 다방 이름을 정할 때보다 부담 없어서일까. 얼토당토않은 것들이 막무가내 쏟아진다.


하지만 괜찮다. 스파크가 튈 것만 같다. 이렇게 그녀와 주고받는 생각의 난타전이 좋다. 그녀와의 시간에, 아니 그녀에게 익숙해져 버렸다. 그 냉소적인 반응과 짧은 대답도 좋다. 이따금 이가 시리도록 차갑고 날카로운 말도 듣는다. 그러면 바보처럼 웃어버리고 만다. 심지어 애교 비스름한 표정을 지으며 촐싹거린다. 그녀의 그늘진 얼굴 조금이라도 풀어지랴 어루만진다. 말은 또 어찌나 많이 하는지, 정말이지 전에 없던, 나 자신에게 용납되지 않던 모습들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는커녕 무심결 하품처럼 삐져나오는 단어조차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고 뱉어온 삶이었다. 누군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신중했다.


아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그리고 받고 싶지도 않았다. 두려웠는지 모른다. 정돈되지 못한 내 행동들을 본 후, 그들의 안면에 드러날 미묘한 감정 변화가 무서웠다. 그 눈 속에 투영되는 꺼림칙한 내 모습들이 싫었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 아니,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고 싶었다. 친해지고 보면 누구나 예상외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나만 이상한 듯, 숨기고 살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방 문턱에서만 드러나던 모습들이 ―소꿉놀이 때부터 알고 지낸 것도 아닌― 이 무심한 표정의 여인에게 드러나고 있다. 왜 그녀 앞에서는 가능한 것일까. 왜 따지지 않게 되는 것일까. 돈도, 시간도 내 자존심도.


“내일부터는 유니폼 입자.”

“응?”


그녀가 들뜬 걸음으로 가방을 열더니 창백한 와이셔츠와 나비넥타이를 꺼낸다.


“입어 봐.”


너도 입을 거지? “난 사장이잖아.”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남자는 말없이 복장을 갖춘다. 그의 어깨가 어딘지 슬퍼 보인다. 짝짝짝, 복장을 갖추자 여사장의 박수 소리. 남자가 종전의 슬픔은 있지도 않았던 양 흐뭇해한다. 봉순아, 너 말이야. 예전보다 많이 밝아진 거 알아? 아니면, 아니면 내가 변할 걸지도.


“지금의 기분을 담아-”


벅찬 표정 연출하던 그녀가 두 손에 펜을 잡아든다. 주문을 외우듯 눈을 스르르, 어깨를 으쓱, 그리고 스케치. 무심하지만 신중한 표정, 빠르지만 섬세한 손놀림.


“완성!”


표지가 완성됐다. 테이블, 찻잔, 마주 보는 두 남녀. 남자의 생각 주머니에는 하트가 그려져 있다. 여성의 생각 주머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한 잔의 커피가 들어있다. 보통 여성은 남성보다 그 관심사가 다양하다. 하지만 남성은 앞에 있는 여성에 오감이 집중되는 법. 남녀 간의 특징이 엿보이는 멋진 작품이었다.


"마무리는?"


마무리는 역시 역할 놀이.


음. 메뉴판이 예쁘군요. 하하 미친 칼로리래. 그런 넥타이는 어디서 사요? 오늘은 고양이 수프를 한 번 먹어볼게요. 인테리어가 조금 변한 것 같아요. 얼음물 좀 주세요. 오늘은 남자 직원 안 나오셨네요. 미남이시던데. 네? 미남 맞거든요! 그분이 직원? 아, 이쪽이 사장님? 하하! 저는 또 두 분이... 아, 아닙니다. 네,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그나저나 오늘 왠지 매력적이시네요.'


그녀에 대한 뭔가 이상한 감정을 눈치챈 것은 어쩌면 이맘때쯤일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시작이 나 자신에게 그토록 큰 폭풍을 몰고 올 거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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