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왕고래 Jan 19. 2016

검은 숲

#18. 꿈을 꿨다. 어두 묵직한 숲 그 깊은 어딘가에서



꿈을 꿨다.
어두 묵직한 숲 그 깊은 어딘가에서




등 뒤엔 모닥불이 춤을 추고 있었다. 숲은 모닥불의 경망한 빛과 자신의 진중한 어둠을 구분하려는 듯 무성한 수풀을 앞세워 주변을 에워쌌다. 발끝에서 시작된 그림자는 시꺼먼 숲의 어둠과 만나 거대한 땅거미가 된다.


어둠이 싫었다. 그러나 두 발에겐 그 마음이 전달되지 않는다. 보란 듯 성큼, 숲을 향해 서로를 뻗친다. 그 커다란 궤도에 몸 전체가 휘청거린다. 알겠어. 대신 모닥불에서 멀어지지만 말아줘. 저마저 없다면 끔찍할 것 같아. 두 발을 달래 본다. 숲의 경계에 다다르자 오른발의 끝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덥수룩한 수풀을 넘었다.


한참을 걸었다. 꿈인데도 사박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귀를 울린다. 뒤를 돌아보자 겹겹의 굵직한 나무기둥들이 보인다. 그 사이로 모닥불의 희미한 불빛이 움직인다. 나무들은 모닥불을 가리기 위해 달아 놓은 커튼 같다. 두 발은 본래의 방향과 리듬을 유지한다. 어디로 가는데? 대답은 없다.


듬성드뭇하던 어둠의 커튼들이 촘촘해지며 이제는 모닥불의 불빛도 닿지 않는다. 한 치 앞도, 두 발도 보이지 않는 어둠. 온몸의 모공이 열리는 것 같았다. 눈을 뜨기도 감기도 모호할 만큼 칠흑 같던 시간이 잠깐, 그리고 새로운 빛이 눈의 표면을 메운다.


모닥불보다 더 밝고 따스했다. 허리 휘감던 수풀도, 뻐석거리던 발아래 숲의 비명들도, 어깨 힘주고 앞을 가로막던 나무들도 없는 공간, 그 고즈넉한 숲의 심장에 월야의 푸른빛이 내리고 있었다. 두 발마저 바뀐 분위기에 맞춰 사뿐 걸린다.


그곳에 한 소녀가 있다.

소녀는 눈물 콧물이 범벅된 채 목청껏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장 난 라디오의 잡음처럼 미세한 음파의 흐름만이 피부로 전해질뿐이었다. 왜 여기서 울고 있어? 왜 그리 서럽게 우는 거니, 내 목소리 역시 생각으로만 맴돈다.


다가가 보려 하지만 두 발은 종전의 느낌과는 달리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발뿐이 아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 몸이 굳어버렸다. 움직일 수가 없다.


소녀는 아끼던 무언가를 처음으로 잃은 아이처럼, 자신의 모든 슬픔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는 것 같았다. 그 눈은 뭔가를 바라고 있었다. 큰 게 아니다. 슬픔을 공감하고 같이 삼켜주면 된다. 그렇게 소녀를 안아주면 될 것만 같다. 이곳에서 느꼈을 무서움과 외로움을 덜어주고 싶다. 그래야 한다.


이제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들을게.


마음 전해 보지만 소녀의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다. 그 눈, 깊고 아련한 그 갈색 표면을 보고 있자니 모든 신경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강풍에 머리를 맞은 듯 아찔하다. 몸의 장기가 땅으로 쏟아지는 것 같다. 차가운 얼음과 불덩이를 번갈아 삼킨 듯 가슴이 저민다. 눈물이 맺힌다.


난 소녀를 알고 있다.

그래, 널 알아. 지금은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히 알아. 미안해. 꼭 기억해 낼게. 널 꼭 기억해서 이곳으로 돌아올게. 널 안아줄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줘.


소녀가 여러 번 끄덕거린다. 그 표정 애처롭다. 나도 끄덕인다. 반드시, 돌아온다.


눈물방울이 본격적으로 흩날리려는 찰나, 달빛이 무한히 밝아진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시리다. 소녀는 그 모습 그대로, 그 표정 그대로 점차 희미해져 간다. 난 시야가 남는 마지막까지 소녀의 표정을, 그 슬픔을 눈에 담는다.


"내가 꼭 너를 기억해 낼게."


밝은 빛을 덮는 어둠. 그리고 다시 희미한 빛. 쓰라린 느낌이 스멀대며 복부로 스며든다. 숙취인가. 미세한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현실적인 공기의 소리,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다. 어제의 기억들이 뇌리를 스친다. 축배, 횟집, 봉순, 이야기, 봉순… 봉순? 설마! 천근 같은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므악!!!”


캔디.

눈을 가득 채운 건 캔디의 얼굴이었다. 내가 왜 이 마네킹과 자고 있던 거지. (그리고 난 캔디를 허락한 적이 없다.) 여기가 어디지. 저 액자는 낯이 좀 익는데…


“빨리도 깬다.”


봉다방이다. 어째서 내가 이 건조한 남성을 얼싸안고, 그것도 봉다방의 테이블 밑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무슨 남자가 술이 그렇게 약해. 너 옮기랴 캔디 부축하랴 얼마나 고생했는데.”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왜 캔디는 ‘부축’이고 나는 왜 짐짝인가. 표현이 바뀌었다.


 “뭐라는 거야. 빨리 씻고 와. 오픈 20분 전이야.”

 “지, 진짜!?”


 “그래! 너 미국에서는 회식 다음 날 늦으면 바로 아웃인 거 알아? 손님 올 때까지 두려다가 깨웠더니만.”

 “어, 어, 그래. 금방 집에 다녀올게.”


 “언제 집까지 가. 내 방에서 씻으면 되잖아.”

 “너 방?”

 “왜, 싫어?”

 “아니? 아니. 그럴 리가! 다녀올게.”


봉순의 매서움은 술 젖은 몸뚱이도 번쩍 일으킨다. 계단을 기다시피 올라 봉순의 방문을 연다. 그녀는 다방 창업 비용의 일부를 할애하여 건물 1층에 작은 단칸방을 얻었다. 들어가 보는 건 처음이다. 그녀의 뭔가가 더 허락된 듯 묘한 기분이 든다. 따지고 보면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이 아니던가. 지난밤 술기운인지 뭔지 모르는 것이 오르며 얼굴이 화끈거린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지하실의 연속. 설레는 가슴으로 들어선 그곳은, 그저 처음 보았던 지하실의 연속이었다. 종전에 버리지 못한 잡동사니들, 그리고 새롭게 제작 중인 잡동사니까지 천장에 닿도록 쌓여있었다. 도대체 언제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벽을 향해 사방으로 밀착해 있는 그것들이 마치 가구의 일부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사람 한두 명 누울 공간, 소박하다.


흐르는 물에 종전의 기대와 실망감 모두 씻어 내려가자, 지난밤의 일들이 떠올랐다. 연애 얘기를 했었고, 궁금한 걸 물었다. 그리고, 하, 거기서 뻗어버렸다. 그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안타까움에 몸살이 날 것 같다. 꿈은 또 왜 그리도 뒤숭숭한지.




"씻는 건 빠르네."


봉순은 모든 오픈 준비를 끝내 놓았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손.


“봉팔.”


응? 왜?


“앞으로 사장님이라고 불러.”


“봉순아 술 덜 깼어?"


"나중에 다른 직원들 앞에서도 봉순봉순 할래?"


방귀 뀌다 똥 나오는 소리 하고 있네. 사장? 사장에 ‘사’자라도 꺼낼 일은 없다. 같잖은 제안을 단칼에 자르며 딴청을 부리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밥부터 먹고 와. 난 먹었어.”


“야. 치사하게 먼저 먹냐!”


그녀가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한쪽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간 게 굳이 표정이라면 표정이다. 물론 내가 이길 수 있는 표정이 아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사, 장님.”


사와 장 사이의 간격은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그녀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여자 이기는 남자가 되기 싫을 뿐이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