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번개탄에서 연탄으로
성공적인 시음회 이후 봉다방은 밀려드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네 삶이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면 이런 멋들어진 이야기들이 흐드러지게 따라붙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봉순과 대화를 주고받는 캔디의 입이 반들거리는 아크릴 소재로 막혀 있듯, 현실은 우리의 고조된 기분을 알아주지 않았다. 우린 그저 성공적인 홍보 '활동'을 한 것이고, 봉다방의 ‘발 디딜 틈’은 기대만큼 좁아지지 않았다.
“음료로 목축이고 엽서로 부채질하고 땡.”
그녀의 하소연이 랩처럼 흘러나온다. 정말일까. 우리가 나누어 준 것은 ―호기심이 아닌― ‘음료와 부채’ 뿐이었을까. 그럴 리 없다. 엽서에 수놓아져 있는 사진들을 보았다면, 그 아기자기한 공간을 눈에 담았다면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다. 와야 정상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따라간 엽서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네 생각은 어때?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봐.”
그녀가 물기가 남아있는 잔들을 마른행주로 닦으며 묻는다. 캔디에게.
“물론 여유를 가져야지. 그래도 그 많던 엽서가 이렇게나 안 돌아오다니 이상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가 ―내 옷을 입고 있는― 마네킹과 대화를 시작했다. 그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고개를 돌려 캔디를 본다. 문간에 기대어 있는 그의 표정도 사뭇 심각해 보인다. 이런, 정신 차려야 한다. 기대어 있는 게 아니라 기대어 놓은 거야!
"그래. 시간의 문제겠지. 좀 앞당기고 싶다는 거야."
그녀가 대화를 이어갔다. 캔디 목소리는 나만 안 들리는 건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캔디에게 뭔가 호소력 짙은 표정을 보내본다. 뭐랄까, 수업시간 내내 참았던 복부 아랫동네 식구들을 가까스로 지정된 장소에 밀어내는 표정이랄까. 하지만 내면연기 뚝뚝 떨어지는 내 표정에도, 캔디는 응답해주지 않았다. 역시나 그냥 마네킹일 뿐이다.
놀라운 것은 봉순이다. 그녀는 나와 대화할 때 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캔디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 성공 역사를 써온 사업 파트너들 같다. 금실 좋은 부부 같기도 하다. 그녀의 적극적인 자세 그리고 다양한 표정과 말투를 보고 있자니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저 고체 덩어리보다 못하단 말인가. 자기 옷도 없어서 알몸 인생 살다가, 이제야 옷을 (그것도 내 옷을) 입고 있는 저 마네킹이 그녀에게 좀 더 필요한 존재처럼 보인다. 설마 질투하는 건가. 말도 안 된다. 뭔가 잘못됐다. 이성인답게 이 난해한 시트콤을 끊어야 한다.
"저기 봉순아. 지금 뭐하는...”
"잠깐 조용히 해봐."
봉순의 진지함에 또다시 입이 묶인다. 그녀의 눈에서 전에 없던 광채가 피어난다. 캔디는? 고개를 돌려 본다. 저 쉐린 그냥 마네킹. 봉순의 눈에는 광채. 저 쉐린 마네킹. 봉순의 광채. 이게 뭐지! 혼란스러움이 정수리를 뚫고 나올 때쯤에 그녀가 말을 건넨다.
"생각해보니 중요한 걸 잊고 있었어."
그녀는 접신을 마친 무녀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호기심'자체에만 집중하느라 본래의 목적인 '동기부여'를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 엽서를 받아가며 관심을 표했던 이들이 봉다방으로 오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폭발적인 시음회 장면을 벗어난 후, 봉다방을 향하고자 하는 동기가 약해졌을 뿐이다. 화륵 타오른 번개탄의 불꽃은 연탄의 묵직한 열기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것은 그들 각각의 여유시간이나 생활패턴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간단하고 정확한 이유였다. 엽서가 돌아오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좀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하다. 그녀가 또다시 바통을 받는다. 그리고 참 당연한, 그럼에도 이 상황에선 감히 떠올릴 수 없었던 대담한 전략을 제안한다.
"‘원 플러스 원’이라고 알아? 마트에 가면 있는."
알다마다. 마음속에서 격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차분하게 반응한다.
"좋은 방법인 것 같아. 네 생각이야?"
"아니. 캔디."
어떻게 하면 캔디에게 고맙다고 할 수 있지. 아니, 어떻게 하면 ‘그녀가 만족할 수 있게’ 고마워할 수 있지. 그냥 고맙다고 말하면 되는 건가. 내가 왜 이런 되지도 않는 고민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캔디의 표정은 조금 전과 그대로, 아니 내가 처음 이 곳에 왔던 수년 전과 그대로이다. 봉순에게 있어 저 녀석의 역할이 뭔지 모르겠다. (그리고 왠지 맘에 들지 않아!) 그래도 분명한 것은, 저 께름칙한 녀석이 그녀의 머리 위로 전구를 띄웠다는 사실이다. 뭐, 고마운 건 맞다. 나름의 진솔함을 실어 마음을 전해 본다.
"오~ 캐, 캔디 한 건 했는데~ 오... 오~"
이후부터 시음회의 행인1, 행인2에게는 대사가 추가되었다. 그들의 손에는 쿠폰이 들려있다.
"어머! 이 쿠폰은 뭐야?"
"한 잔 마시면 한 잔을 더 주네."
우리의 시음회는 직사광선이 어깨를 짓누르는 한여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계획에 없던 중단이 되어 버렸다. 봉팔의 낙오? 아니다. 봉순의 부재? 아니다. 캔디의 부상? 그럴 리가.
손익분기점 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