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우리의 크기는 얼마나 되며 어디쯤에 와 있단 말인가
“열아홉.”
스물?
“응. 스물!”
시장 골목이 땅거미에 뒤덮이는 야심한 시각, 봉다방 내부는 희맑은 함성으로 가득 찼다. 다가오지 않을 것 같던 본전의 고지를 넘은 것이다. 그녀와 나 그리고 캔디는 고조된 시선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끌어안고 폴짝폴짝 뛰었다.
뛰다 보니 억울하다. 보통 이런 경우엔 남녀가 기분에 취해 계획에 없던 포옹을 한 뒤, 화들짝 놀라고 홍조를 띠며 딴청 부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굳이 멀찍이 있는 캔디까지 힘겹게 끌고 와서 얼싸안는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무게 때문에 같이 뛰기도 힘들다.
왼팔에 감긴 캔디, 오른팔에 안긴 봉순, 내 모든 신경은 우향우.
왼쪽에 돌덩이 같은 녀석을 안고 있어서일까. 내 오른쪽 그 따스한 인간의 체온은 맞닿은 표면의 모든 촉감을 곤두세운다. 늘어진 옷감에 감춰져 있던 그녀의 어깨 혹은 등과 목 부근의 그 어디쯤. 탄탄하고 차가워 보이는 매무새와 달리 조금은 말랑하고 그리고.
그리고 포근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알게 된 후 가장 가까운 두 눈의 거리. 곱게 빚은 지점토에 얇은 선을 그어낸 듯, 그녀의 눈은 가늘고 길었다. 그 좁다란 공간에는 마스카라의 은총으로 삼삼오오 뭉쳐있는 속눈썹들, 대부분의 영역을 차지하는 갈색 빛 눈동자 그리고 아닌 척 숨어있는 옅은 쌍꺼풀까지 있었다.
그녀는 이런 눈을 갖고 있었다. 비로소 이 정도 거리에 서야, 그 테두리를 감싸고 있는 짙은 아이라인 뒤, 진짜 네 눈이 보이는구나.
빤히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아챌 때쯤, 기쁨에 이리저리 흩날리던 그녀의 초점이 내 눈으로 모인다. 그녀가 내 얼굴에 드러난 어떤 것 때문인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모으며 응시한다. 오해야, 잠깐이었어. 마음 다스려보지만 이미 뜨거운 열기가 목을 타고 올라왔다. 귀 끝에 불이 붙는다. 그 부근만 그늘 밖 뙤약볕에 노출된 것 같다. 그나마의 선선한 그늘마저 일순간에 사라지며 얼굴 전체가 삼복더위의 햇살과 직면한다.
“갑자기 얼굴이 왜 빨개져?”
“응? 그냥 뭐, 그, 뛰니까~ 덥네. 허해서 그런가.”
난 의미 없는 낱말들을 바닥에 떨구며 캔디를 제자리로 옮겨 놓았다.
남녀 간에는 절대시간이 있어.
바람둥이 친구 녀석의 말이 생각난다. 웬수 같은 남녀도 한 공간에 가둬두면 언젠가는 '가족'이 된다고 한다. 저마다 다르지만 남녀 간에는 '절대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란다. 자신은 상대방에 따라 그 절대시간의 양을 추측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래서 차분히 그 시간을 채워나가면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며, 사실이라면 달러 빛을 내서라도 사고 싶은 능력을 자랑했다.
만약 그 녀석이 얘기하는 절대시간이 존재한다면, 나와 봉순의 시간은 얼마나 되며 우리는 어디쯤에 와 있단 말인가. 그 시간의 크기가 설령 아주 길다 하여도 이렇게 하루의 절반 이상을 같이 있다 보면….
“캔디 옷소매는 왜 자꾸 매만져. 뭐 묻었어?”
아, 캔디야 미안. 아? 왜 미안. 안 미안. 내 옷을 내가 만지는데!
캔디 앞에서 엉거주춤 서있던 나를 그녀가 추궁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난 마치 캔디의 옷매무새를 다듬으려 했던 듯, 그 소매 부근의 주름을 당긴 후 의미 없이 두어 번 두드리며 봉순 쪽을 힐끗거렸다. 그녀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뜬금없이 말을 뱉었다.
“첫 선전을 기념 삼아 회식?”
놀란 마음 다스리며 대답한다.
“회식 말고, 회! 식.”
그간 봉다방에서의 시간 동안, 그녀와 나는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캔디만큼은 아니겠지만) 그 많은 얘기 중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공통점은 '회'이다. 우리는 회를 좋아한다. 입맛이 고급도 아니다. 회 중에서는 기성복이나 다름없는 광어회와 소주, 그것이 우리의 공통된 취향이자 작은 목적지였다.
“처음 20잔을 넘는 날."
그날이 온 것이다.
"광어회 먹는 거야.”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적당한 타이밍에 말이지.
푸짐한 회 한 접시와 무색 유취의 소주가 놓인다. 전직 사무라이 아저씨의 손을 거쳐서 인지 더 맛있어 보인다. 술잔이 한잔, 오가는 두 잔, 건배에 세잔. 취하는 것 같다. 회 한 점에 또 한잔. 음? 에이, 여기 캔디를 어떻게 델구올냐. 혀가 꼬인다. 난 그리고 그 친구 쉬뤄! 나만 취하는 건가. 그래도 회 한 점이면, 이렇게 또 한잔. 그녀의 얼굴에도 희미한 복숭아가 피어오른다. 그렇게 분위기기 무르익어 간다.
“봉슌아. 쿰봉슌.”
“성 붙여서 부르지 마.”
뭐래.
“니 연애담 좀 들어보좔!”
“없었어. 그런 거-”
어째서.
“난 여중 여고를 나왔거든.”
그게 이유가 된다면, 여중 여고를 나온 수많은 여성들이 나이 서른을 넘어서도 ‘남자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습니까?’를 반복하고 있다는 얘기야.
“그냥, 삶이 바빴어.”
“나눈 어떤뎨?”
농담을 던져본다. 농도 짙은 진담이란 말도 있다나.
“치-”
그녀가 마치 드럼의 ‘하이엣’에서 나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 얼토당토않은 농담을 들었을 때 내는 소리다. '치'라는 소리로 시작해서 약간 코를 푸는 느낌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특징.
“왜. 내가 어때서?”
한 걸음 더 걸어가 본다. 술도 마셨는데 뭘. 뭐 어때.
“치- 으이구-”
내가 알려줄까? 너는 그래서 애인이 없는 거야! 진실은 술에 취했어도 생각으로만 증발시키고. 그럼 늘 궁금했던 그거라도 물어본다.
“너, 나를 선택한 두 번째 이유 말이야.”
“얘기했잖아. 말하고 싶지 않다고.”
그녀는 재빠르게 말을 끊었다. 역시 나만 취한 건가.
“그리고 넌 알고 있으면서 왜 자꾸 물어보는 거야-”
찌푸려진 그녀의 미간. 감정의 동요. 기회다. 희미해지는 의식을 움켜쥐며 러쉬.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알고 있는 게, 네가 생각하는 거랑 같은지... 그게 궁금한 거지.”
“알았어. 이번이 마지막이야.”
드디어 듣는다. 시꺼멓게 탄 내 속아. 들끓는 호기심 감추고 앓아가던 내면아. 고생 끝이다. 귀를 기울여 축배를 들자.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그런데 이 중요한 순간에 눈이 감긴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아득해지는 의식을 마지막으로 차가운 술상의 온도가 뺨을 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