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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an 13. 2016

졸지 말아야 할 이유

#14. 동기(動機)의 힘


그녀의 지하실을 정리할 당시, 사람 얼굴 모양의 손바닥만 한 거울이 있었다. 거울에는 머리칼과 코 그리고 입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거울은 고물상 앞에서 구출된 그녀의 다른 잡동사니와 함께 봉다방으로 돌아왔고, 지금은 봉다방의 주방 안쪽 벽을 지키고 있다. 그나마도 봉다방에선 하나뿐인 거울이라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런데 거울 속의 그림 때문에 정작 내 머리칼과 코, 입을 보긴 어렵다. 기죽어있는 두 눈덩이만 선명하게 거울의 여백을 채운다. 그녀는 이 거울을  졸음운전 방지용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오늘따라 그 제작의도가 궁금하다.


"아 그거? 망했어."


아니 내 말은, 무슨 의도로 제작하였냐는 거지. (그녀가 망하는 건 전혀 낯설지 않다.)


"동기."


"응?"


"수업 시간엔 졸리고 쉬는 시간엔 잠이 깨잖아."


그녀는 무조건 졸음을 떨치기보다는 '졸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알아채게 하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노크도 없이 불쑥 다가와서는 눈꺼풀의 중력을 초당 10배씩 올려버리는 그 녀석, 졸음.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무시무시한 녀석도 선생님의 기습 매질 한 방이면 싹 달아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기습 매질을 '맞아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맞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잠을 쫓아내는 게 아닐까?


"운전 중에 자신의 조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하고 생각했어."


경험상 운전 중에 졸음을 만난다면 그것이 운명임을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 그 절대 중력의 장을 능숙하게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다.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고 허벅지를 꼬집고 손뼉 치며 고래고래 악을 써 봐도, 흔들리던 고개는 어느새 서서히 멈춘다. 꼬집히던 허벅지는 ‘잠들면 안 아프다'며 손가락을 조롱한다. 박수 소리와  노랫소리는 끊기는 음절이 발생한다. 그 순간, 내 눈은 감겨있다. 머리 위에 뜨거운 온천수를 붓는 것마냥, 갖은 동작들은 자유 낙하하는 잠의 폭포를 막을 수 없다. 그렇게 영혼은 시공간을 이탈해버린다. 도로 귀퉁이에 잠시 차를 세우고 여유를 가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


봉순의 작품은 졸음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팔, 다리, 근육 등 신체의 하위 부서에 호소하는 것은 쏟아지는 온천수를 허겁지겁 틀어막는 수준이라는 것. 그녀는 수도꼭지 자체를 잠그기 위해 더 높은 부서의 문을 노크한다. 뇌, 그 고위층에서도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동기(動機)> 부서.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세요. 완전 위태롭거든요? 당장 새로운 지령을 내리셔야 합니다!"


동기,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계기, 운전자에게 졸음에 대한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고자 했단다. 졸고 있는 모습을 스스로에게 다시 노출하여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고, 졸지 말아야 할 계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매질에만 집중했던 물리적 접근의 제품들을 비웃 듯, 졸음에 대한 심리적인 접근을 한 셈이다. 그녀의 컬렉션에 있는 수많은 작품들처럼 무척이나 괴상한 역발상이었다.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망했지.) 하지만 참신한 것도 사실이다. 한때 자기계발서 타이틀에 유행처럼 자리 잡았던 '동기'를 졸음운전에 활용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꼭 졸음운전이 아니더라도, 다른 어딘가에 시도해볼 만하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봉다방에 활용하지 말라는 법 없잖아?




하루에 한두 명.

소중한 손님들은, 정말이지 소중한 그들은, 조금씩 봉다방의 세계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한두 명의 발자국이 오간 뒤 봉순과 나는 끝없는 수다를 떨었다. 그 또는 그녀의 옷차림과 분위기, 심지어 현재 컨디션이나 심리상태까지 말이다. 그런 대화는 굉장히 신나는 일이었다. 그녀와 나를 제외한 누군가가 이곳을 들려갔다는 것, 그 자체가 마냥 좋았다.


하지만 계속 이 상태로 간다면 조만간 자금이 바닥나며 거리로 내앉게 될 것이 분명하다. 손익분기점은 20잔, 우리는 하루 평균 판매량 20잔을 넘어야 본전의 고지에 오르는 셈이다. 다방 놀이는 ―아, 재미있는 그 놀이는― 잠시 비중을 줄이고 손님 끌기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기로 했다. 물론 우리가 선택한 무기는 동기이다. 최근까지 봉순 컬렉션의 작디작은 거울 속에 숨어있던 그것이다.


"동기를 어떻게 만들어?"


적절한 타이밍에 봉순의 질문이 더해진다.


"먼저 호기심을 자극해야 돼."


동기와는 둘도 없는 친구라지. 동기가 연탄이라면 호기심은 번개탄!


"호기심?"

“응, 생각해봤는데, 홍보물을 만들면 어떨까?"

“아, 홍보물….”


더 이상 질문은 없다. 정지화면 같은 그녀의 상태로 보아, 이미 홍보물의 디자인이라던가 재질을 고안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사실 더 얘기하고픈 것들이 있지만 그녀의 속도에 따르기로 한다.


봉순은 메모지에 뭔가를 끼적이더니, 평소보다 재빠른 동작으로 자신의 미술도구들을 꺼내왔다. 그리고는 뚝딱, 시안을 만들어냈다. 적응될 만도 한데 마치 일순간처럼 느껴지는 그 과정은 항상 놀랍다.


마침 인근 공장 중에 인쇄업체가 있어서, (심지어 떡까지 돌렸으므로) 생각보다 빠르게 결과물을 받아올 수 있었다. 그야말로 맘에 쏙 드는 전단이었다. 의자의 이음새, 컵의 손잡이, 머신이 뿜어내는 스팀, 그리고 로스팅이 끝난 원두를 포함하여 다락방 구석구석의 사진이 담겨있는 엽서였다. 작은 장면들이 불규칙하게 겹쳐있지만, 전체 그림은 마치 ―봉순의 지하실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조화처럼― 봉다방의 풍경을 한 컷에 담아놓은 것만 같다. 뒷면에는 시장 골목의 미로를 헤치고 오는 상세한 약도까지 있다!


"봉순이네 다락방이 오픈했습니다!"


엽서가 도착하기 무섭게 거리를 나섰다. 하지만 손길을 기다리는 엽서의 새초롬함과는 달리, 돌아오는 반응은 냉랭함이었다.


여름의 징조가 짙은 햇살, 바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 바쁜 일상만큼 빠른 발걸음, 어정쩡하게 서서 손에 뭔가 쥐어주려는 남녀에게 주의를 기울일 여유는 없어 보인다. 언제였지, 이렇게 사람들 틈에서 얼굴을 팔았던 적이… 아, 없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 얼굴 판 돈을 모았으면 빌 게이츠의 머리 위에 있어야 할 봉순과 달리, 나는 단 한 번도 낯선 사람들 틈에서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다. 굶으면 굶었지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창피하고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책상과 공부를 택했다. 회사에서도 사람을 상대하는 일보다는 구매 패턴을 보며 소비심리를 연구하는 일을 하였다. 나는 잘 피하고 잘 버텨왔다. 그렇게 채워가던 서른을 앞에 두고, 시장통 한가운데 서서 사람들에게 끝없는 미소와 목청을 던지고 있다.


봉순을 본다. 나와 같은 나이의 봉순. 그녀는 지나온 이력들을 나열하듯, 자연스럽게 ―그렇다고 딱히 아쉽지도 않은 톤으로― 엽서를 나누어 주고 있다.


더워지는 날씨도 괜찮다. 아픈  팔다리도 괜찮다. 나의 30년을 되돌리는 변화도 괜찮아.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심한 듯 지나치는 사람들의 흐름이다. 멈춰 서 있는 건 그녀와 나 둘 뿐이다. 하물며 개울에도 손가락을 담그면 그 흐름이 바뀌기 마련인데, 인파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흐름은, 우리의 외침과 무관하게 그냥 흐를 뿐이다. 우린 물속의 작은 자갈이었다. 물살에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하는 작은 자갈, 조급한 기분이 든다. 봉순아.


"아무래도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아. 보완하자."


베테랑 봉순은 '인내심이 두 살 아기 수준'이라며 질타했지만,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다락방으로 돌아왔다.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어."


우리는 호기심 전파 대상을 엽서를 받아간 사람들로만 국한시켰다. 일단 엽서를 손에 받아서 시상에 그 아기자기한 풍경을 담는 사람들만 호기심의 영역에 들어오는 셈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하루 종일 봉다방을 비우고 사람들 손에 엽서를 쥐어줄 수 없는 우리로서는, 짧은 시간에 높은 효율을 얻을 수 있는 좀 더 강렬한 방법이 필요하다. 이목을 끌 수 있어야 한다. 고민하던 차에 무심한 듯 날아온 그녀의 제안이 매력적이다.


"시음회 어때?"


시장 골목에서의 시음회라…, 그야말로 신선하다! 가능해 보인다. 호기심의 전파 대상을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 넓힐 수 있다.


흐름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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