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들만의 소통법
3인 체제의 균형을 이루려던 야망, 그녀의 독재에 제동을 걸려던 그 원대한 꿈은, 채 발각도 되기 전에 무너져 버렸다.
새로운 식구는 불만도 만족도 딱히 없는, 그렇다고 회색분자도 아닌, 굳이 말하자면 새로운 영역의 존재였다. 때문에 그녀에게 삼각대의 한쪽 다리를 차지하는 일종의 무게감을 싣는 건 불가능했다. 나의 아군으로, 내 불만을 대변하는 스피커로 두기엔 그 자체의 불만이 너무 없는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불만 어린 표정을 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녀의 이름은 ‘마로.’
“내가 오빠니까 말 놓을게. 괜찮지?”
사실 초면에 말 놓는 것을 좋아하진 않는다. 친하지도 않은데 반말부터 하는 게 어색해서인지 오히려 대화가 줄며 멀어지기 때문이다. 특히나 상대방이 말수가 없는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살갑게 대해 줄리 없는 봉순을 대신하기 위해 사교적 캐릭터를 입었다.
“우리 일단 통성명부터 할까?”
그녀가 대답 없이 눈만 껌뻑인다. 통성명이라는 단어가 어색한가 보다.
“음, 그래. 오빠는 봉팔이라고 해.”
“아.”
침묵이 이어졌다. 가는 이름이 있으면 오는 이름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상했던 반응 이건만 역시나 침묵을 견디는 건 쉽지 않다. 결국 또 먼저 입을 연다.
“어… 음, 우리 꼬마 아가씨는 이름이 뭘까?”
‘꼬마 아가씨’라는 단어를 들은 봉순, 마치 봐서는 안 될 광경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꼬마 아가씨가 어때서!) 마로 역시 그 투명한 표정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며 말한다.
“마로.”
“마로? 이름이 마로야?” 참 특이한 이름. “그럼 성은?”
“마.”
그녀가 주먹구구로 산수를 계산하는 아이처럼 눈을 위로 올렸다가 내린 뒤 답한다. 그 정도로 난해한 질문을 한 걸까.
“아 그럼 ‘마마로’야?”
“마로.”
“아, 마로. 외자구나?”
“마.로.”
또박또박 이라기보다는 좀 더 느리게 대답하는 그녀.
“응. 그러니까, 성이 ‘마’고 이름이 ‘로’ 인 거지?”
“네.”
보통, 두세 마디면 끝날 이야기였다. 더불어 적극적인 사람의 경우 애초 질문에 “마로요. 외자예요”라고 답하였을 것이며, 불필요한 에너지의 낭비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 너네 ‘봉순족’들이 다 그렇지 뭐, 나는 봉순으로 단련된 내면을 쓰다듬으며 진정했다.
사실 '리틀 봉순'이라는 타이틀만큼 이 정도의 캐릭터는 예상했다. 하지만 전혀 예상 못했던 변수가 있었다. 마로는 스펀지이다. 어떤 일이든 재빠르게 흡수하고 바로 따라 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 그녀를 위해 생겨난 단어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봉순과 마로의 관계의 관계 또한 의외였다. 신경전을 벌일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둘은 서로를 알아봤다. 마로의 첫 출근 날, 그녀는 당연하거니와 봉순 역시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거는….” 보여준다. 따라 한다. “저거는….” 보여준다. 따라 한다. “이럴 때는….” 보여준다. 따라 한다. 심지어 똑같이!
시끄러운 음식점에서 다른 테이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을 때조차도 이 보다는 많은 말이 들릴 것이다. 하지만 정말, 둘 사이에 오간 대화는 내가 들은 것이 전부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감을 높이는 데는 대화가 중요하지 않던가. 그런데 어떻게 저들은 모스 신호처럼 제한된 표현을 주고받으면서도, 이미 알고 지내온 것처럼 자연스러운 건지 모르겠다. 내가 없는 틈을 타 둘만 시시덕거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마로는 단 이틀 만에 —내가 한 달의 밤낮을 비추며 익힌— 봉다방 내의 모든 요구 능력을 갖추었다. 그녀가 스펀지를 넘어 진공청소기처럼 이 능력 저 능력을 빨아들일 때마다, 그 불가사리 같은 손으로 섬세한 커피의 선율을 그려나갈 때마다, 나는 무능력한 내 두 손을 바라보았다. 손에게 남몰래 속삭였다. 넌 뭐가 문제니, 손은 말이 없다. 주름과 모공과 약간의 털과 손톱 밖에 없는 그 녀석이 뭐 할 말이 있으랴. 그저 나와 함께 ‘능력자’들의 유대를 지켜보는 수밖에.
그러다 문득, 그 ‘손’에게 닥친 위기.
“이제 실전이야.”
마로에게 커피 제조의 정점인 드립 기술을 알려준 봉순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그러더니 날 바라본다. 응? 나 뭐?
“손님 오면, 저 아저씨가 만드는 걸 보면서 복습하고, 그다음부터는 네가 만들면 돼.”
아저씨라는 식초 같은 단어보다 더 오감을 들썩이게 한 것은, 스펀지이자 능력자인 그녀를 내가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평가를 받는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얼마 뒤 봉다방의 문이 열리고, 손님의 발소리가 들렸다. 이런 걸 ‘저주의 타이밍’이라고 하였던가. 발소리가 두 명, 아니 세 명? 아, 문간에 나타난 손님은 다섯 명. 게다가 모두 여성. 심지어 처음 보는 얼굴들!
첫 손님에게는, 특히 여성일 경우에는 더더욱 메뉴의 질에 신경 써야 한다. 그래야 두 번째 손님으로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성들의 경우 다른 요소가 아무리 맘에 들어도 ‘맛’이 없으면 칼같이 등을 돌려버리곤 한다. 그뿐인가. ‘친절한’ 그녀들은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입소문을 낸다. 한 명이 등을 돌리면 최소 다섯 명이 떠나가는 셈, 달리 말하면 한 명은 곧 다섯 명의 단골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문에 이들의 수라상에 오르는 커피는, 그 능력이 봉팔에 비해 월등한 봉순이 제조하곤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떨어진 과일을 사기 위해 봉다방을 떠났다. ‘저 아저씨에게 배워’라는 말과 고양이마냥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 아이만 남겨 놓고 가버렸다. 결국, 내가 해야 한다. 마로는 내 옆에 정지 상태로 서 있다. 그 눈은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반응하는 로봇의 그것처럼, 내 손에 초점이 고정되어 있다. 타이밍 딱딱 맞아떨어지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마치 몰래카메라 같다. 몰아치는 헛생각들을 물리치고 손님들에게 메뉴판을 건넨다.
“우리 뭐 먹을까? 메뉴가… 어머, 야 이거 봐. 아메리카노 뭐라노?”
여성 다섯이 자지러진다.
“아, 나, 이게 더 심해. 에스프레소 좀 보소!”
깔깔깔, 세상에 존재하는 ‘여성 다섯’ 중에서도 으뜸으로 시끌벅적한 구성이 아닐까 싶다. 그녀들의 극성맞은 웃음소리는 나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그 사자후 같은 웃음소리만큼, 맛에 대한 견해도 확 질러버릴 것만 같은 느낌 때문이다. 맛이 없으면, 그 ‘웃음 비명’은 기운 넘치는 고함으로 돌아올 것이다. 불안감이 심장을 움켜쥐곤 이리저리 흔든다. 난 되도록 태연한 얼굴로 그녀들의 웃음에 동조했다. 마로의 눈은, 그 조리개의 초점은 주위 소란에 상관없이 내 손에 고정되어 있다. 봉순이 나서기 전 입력한 ‘복습’이라는 정보 외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성 5인조는 그 방대한 음원의 이탈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주문을 끝냈고, 그 양은 일반적인 5인의 소화 영역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많이 뱉어내니 많이 넣어야 하는구나, 전에 없던 비관적인 생각들이 올라온다. 부담감 때문이다. 5인조의 소란이, 많은 양의 주문이, 봉순의 부재가, 혼자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나의 손에 고정되어 있는 두 개의 레이저 빛이, 그 두 손에 무거운 추를 추가시킨다. 그리고 나는 이내,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 있는 묵직한 두 손을 움직인다.
후덜덜.
‘후덜덜’이라는 말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말 그대로 후덜덜. '덜덜'도 '벌벌'도 '뻘뻘'도 아닌 딱 후덜덜이었다. 떨리는 두 손을 따라 레이저 빛도 흔들린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붙는 그 야무진 고양이의 눈. 고양이는 시신경이 발달하여 사람의 행동이 10배 정도 느리게 보인다는 말이 생각난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나의 손가락 하나하나, 그 손톱 밑에 있는 좁은 공간까지도 모두 관찰되고 있는 느낌이다. 더불어 추 잔뜩 매달린 두 손은 평소보다 훨씬 느린 속도의 진도율을 보이고 있다.
그때가 처음, 그녀가 불만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내 손에 꽂혀있던 시선이 불만의 균열을 이기지 못했는지 주문지로 옮겨진다. 관찰을 멈춘 눈의 주인은 주문된 메뉴를 만들기 시작, 봉팔이 2개의 메뉴를 제조하는 동안 남은 7개의 메뉴를 만들어내는 대능력을 선보였다. 같은 시공간에서 일어난 차이였다. 게다가 그녀의 실력은 봉순 이상이었다. 처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섬세함과 리드미컬함이 있었다. 유랑 집단의 대장인 위저드(극 중 로빈 윌리엄스)가 어거스트의 첫 기타 연주를 들었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모르긴 해도 그 역시 나만큼이나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일까. 유능한 직원의 능력에 축배를 들어야 함에도 내 기분은 한없이 고꾸라진다. 내가 바란 것은 어거스트가 아닌 ‘정치적’ 인물, 아니 그 정도까지도 필요 없는 단지 나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봉순 왕국’에서 온 어거스트는 내 편이 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여성 5인조의 ‘맛있다. 맛있다.’ 감탄사 사이로 봉순이 돌아왔다. 때마침 자리를 메운 손님들을 보며 마로에게 묻는다.
“아저씨 하는 거 잘 봤어?”
“네”
더도 덜도 없는 그 대답. 그녀도 나도 좀 전에 일어난 작은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심하면서도 정확한 마로의 시선이 잠시 스쳤다. 그 표정은 뭐랄까, 이곳이 군대였다면 나의 첫 후임 병은 전직 청소년 축구 대표이다. 그간 힘겹게 일군 ‘고참 사랑의 텃밭’을 엉망으로 만드는 존재인 셈이다. 그리고 조금 전, 그 후임 병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읽어버렸다. 시선을 거두며 지었던 오묘한 미소.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알겠지만, 봉순으로 단련된 나는 다르다. 마로의 일자 입에 드러난 미세한 변화도 내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마치 선을 긋던 사인펜이 한 곳에 잠시 머문 것 같은 깊이의 변화, 그녀의 입 끝에 있던 것은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시, 비웃음, 조롱, 비아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면하던 단어 하나가 빠르게 날아든다.
연민. 그 표정에는 나를 향한 연민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굴러온 돌은 굳게 박혀있던 바위를 빼내었다. 사실상 그렇게 된 것이다. 봉팔의 3인 체제 야망이 물거품 된 사연이다. 더불어 자신의 입지마저 흔들리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어? 이전보다 더 깊은 곳에서 혼자가 될 것만 같은 불안이 엄습한다.
이윽고 다가온 마감시간, 봉다방을 나서려던 마로가 멈춰 선다. 돌아본다. 그 상태로 정지.
“왜?”
봉순의 짧은 질문.
“배고프데요”
“고양이가?”
뭘? 이라는 나의 표정과 달리 봉순이 답했다. 우문현답인가 텔레파시인가.
“홍자”
마로가 답한다. 의역하자면, 네. 맞아요. 그 고양이의 이름은 홍자예요, 가 되겠다.
“어. 편한 대로 해.”
봉순의 대답. 이 역시도, 홍자라니 귀여운 이름인 걸? 내일부터 데리고 와도 좋아,라고 풀어 말할 수 있다.
그녀들의 짧은 대화에는, 마로와 고양이는 함께 살고 있으며 그녀가 밥을 주지 않는 이상 고양이는 굶어야 한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마로의 고양이인 ‘홍자’는 마로의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거나 몰래 키우고 있는 존재일 가능성 역시 숨어있다. 어쩌면 마로는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살고 있을 수도 있고, 그도 아니라면 외동딸인 마로의 부모님은 맞벌이 부부일 수도 있는 것이다. ‘홍자’의 배고픔에는 이토록이나 많은 가능성이 숨어있다. 나의 사고는 이렇다. 인과 관계와 추리의 난무, 게다가 ‘납득’이라는 필수 과정도 필요하다. 문장의 시작도 끝도 가늠할 수 없으며 중심 키워드로만 이루어지는 그녀들의 대화에 낄 수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난 그저 ‘다른 종족’들의 의사소통 방식과 그들만의 신호를 보며 내용을 유추할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그들의 대화는 끝난 것 같다. 하지만 집으로 향해야 할 그녀는 아직도 정지 상태이다. 더 할 말이 있는 것일까, 이번엔 봉팔이 한번 도전해본다.
“왜?”
봉순의 말을 구관조처럼 복사.
“되죠?”
물음표를 붙이기엔 너무 약한 끝 올림. 하지만 그것은 질문이 분명하다.
“응”
난 일단 그들의 언어로 대답해본다.
나의 ‘응’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봉다방에서 사라졌다. 내가 그 시작을 준비하기도 전에 대화는 끝이 나버렸다. 역시 섣불리 흉내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눈이 두 개인 사람이 비정상이라고 하였던가. 난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조급증 어린애처럼, <외눈 1>이 던진 메시지의 의미를 봉순에게 묻는다. 뭘 그런 걸 다시 묻냐는 듯 대답하는 큰 <외눈 2>.
“그림, 내일 당장 그리고 싶은가 봐.”
확실하다. 나에겐 없는 것들이 그들에겐 있다. 때에 따라 그것은 우리 정상인들의 한계를 초월하기도 한다. 나는 외눈박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