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왕고래 Jan 26. 2016

예술은 사기다.

#23. 벽에 피는 꽃


언제부터일까.


아침 일곱 시가 되면 눈이 쓱 뜨인다. 봉다방 소용돌이에 휘말린 후 반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지없이 그 시각 번뜩이다. 지난 수년간 몸에 밴 리듬의 잔재이다. 보통 오전에는 몸을 이리저리 굴려서 이불을 좀 더 곧게 편다던가 하는 개인적인 일을 하고, 봉다방의 오픈 시간인 정오에 맞추어 집을 나서고는 한다. 물론 그 보다 이른 시간인 아침 녘에 나서는 일도 적지는 않다.


놀라운 점은 내 출근 시간이 오픈 직전이던 이른 아침이든 간에 그곳에는 항상 봉순이 먼저 와있다는 것이다.  한두어 번쯤은 안 그럴 만도 한데, 내가 먼저 봉다방의 문을 열었던 적은 없다. 한 번은 밤잠을 설쳐서 새벽같이 봉다방을 향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역시 봉순이 먼저 와있었다.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고 5분 전쯤 미리 선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 묘한 법칙은 깨지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봉다방에 다다랐을 때, 이른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규칙이 깨졌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그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모를 승리감이 들었다. 그렇게 휘파람 이어 불며 계단을 성큼 내려가다가, 모퉁이를 돌며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어둠 속에 무언가가 꾸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소리도 못 지른다는 말, 이런 때에 쓰는 것일까. 난 그것이 어떤 형태이며 사람이라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는 데에 평소보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바닥 깊이 박힌 심장 덕에 사고와 감각 모든 부분이 둔해졌기 때문이다.


마로였다.

그녀는 어둡진 봉다방 지하에서 촛불 하나의 불빛에 의지한 채(도대체 왜!!!)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마로는 놀란 눈의 나를 무표정으로 응시한 뒤 다시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입만 벌리고 있던 나는, 마치 놀란 적은 없는 냥 마음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

“아.”


그녀가 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끊는다. 아,  라기보다는 쉿, 에 가깝다.


“곧 돼요.”


그림이 완성된다는 말이리라. 음산한 촛불의 불빛이 그녀의 얼굴 주위를 일렁이며 엄숙한 분위기를, 아니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종전에 뱉어낸 질문까지도 주어 담고 싶을 정도로 고요한 어둠의 시간이 지속됐다. 봉다방 나무 벽과 질척한 붓의 마찰 소리만이 슥슥거릴 뿐이다. 난 숨을 참는 모양새로 동작을 멈춘 채 그림이 완성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5분 정도 흘렀을까, 마로가 작은 한숨으로 그 끝을 알렸다.


“언제부터 그린 거야?”


기다린 듯 질문들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이른 새벽 봉다방으로 스며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봉순이 있었단다. 식재료를 사기 위해 대형 도매 상가를 갔을 뿐이다. 법칙은 깨지지 않았다.


“부, 불은 왜 꺼놓고 있던 거야!”


허공을 헤엄치며 소리도 없이 나자빠졌던 순간이 떠올라 울분을 토했다.


“집.중.”


마로는 천장에 적힌 단어들 중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하는 냥, 시선을 위로 향하며 신중하게 답했다. 그 음산한 환경에서 가장 좋은 작품을 그릴 수 있다는 뜻 이리라. ‘예술은 사기다.’ 백남준 선생님의 어록이 떠오른다. 궁금증 반, 분노 반, 나는 지독한 칼럼니스트 같은 표정으로 불을 켰다. 일과의 시작을 나자빠지며 했다는 것이 억울해서일지도 모른다. 모든 칼럼니스트들이 비평의 뿌리에 이런 식의 분노가 있다면 우리나라 예술은 반세기 이상 후퇴했을지도 모른다. 쨌든 비장하게 그림들을 살폈다. 그리곤 날 선 질문으로 그 소감을 대신했다.


“이게 다야?”

“네.”


불을 켠 뒤 그 '위대한' 예술작품을 눈에 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나, 둘, 입구 양쪽으로 꽃 한 송이씩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만개한 짙은 색감의 노란 꽃과 아직 피어나고 있는 붉은 꽃이 살아 움직이듯 붙어있었다. 줄기도 잎도 없는 그 꽃들은, 이전에 그녀의 메모에서 보았던 그것과 같았다. 벽을 다 덮은 푸른 하늘과 넓은 초원, 우거진 꽃밭을 기대해서일까. 단 두 송이의 꽃은 나무 벽에 붙인 커다란 판박이 스티커 같을 뿐이었다.


팔짱을 낀 채 보란 듯 그림 주위를 서성인다. 음, 겨우 꽃 두 송이를 그리기 위해 그 무속인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냐는 무언의 비아냥이었다. 어제 이곳에서 나에게 보낸, 연민 어린 표정에 대한 답례였다. 그녀는 그저 말없이 붓의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그쯤일까. 뭔가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봉다방의 조명이 평소보다 밝다는 것, 성능 좋은 전구를 서너 개쯤 더 켜 놓은 느낌이랄까.


“새벽에 사장님이 전구 추가했니?”

“아니요.”

“이상하네. 분명 더 밝아졌는데.”


말을 하며 그림을 등지는 순간, 조명이 원래의 밝기로 돌아온다. 다시 꽃이 그려진 벽을 돌아봤다. 봉다방이 환해진다. 야광 물감 같은 건가,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웅얼거리며 그림에 다가선다. 두 손바닥으로 어둠을 만들어본다. 야광 물감은 아니다.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곳저곳 움직여본 뒤에야 그것이 그림의 '효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명은 어제와 그대로, 내가 느낀 것은 일종의 착각이었다.


단 두 송이의 꽃, 그 두 개의 빛은 봉다방의 조명이 닿지 않는 두 곳에 정확하게 위치하고 있었다. 다른 공간에 비해 유독 어두웠던 그곳에 생기 넘치는 꽃송이가 피어났고, 그 다크 서클 같던 그늘이 사라지면서 봉다방의 전반적인 느낌이 밝아졌다. 마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그곳에 꽃을 심은 것이다. 뛰어난 색감과 섬세한 판단이 완성한 예술이었다.


놀란 마음 감추려 헛기침을 해보지만, 독감 기침마냥 힘이 잔뜩 들어간다. 그녀는 나의 반응 변화를 예상하고 있었는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림 도구를 챙길 뿐이었다.







“조명 바꿨어?”


봉순은 정오가 한참 지난 시각에, 양손에 커다란 봉다리를 들고 나타났다. 나도 마로도 대답은 없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림을 바라본다. 턱을 괴고, 잠깐의 침묵. 그리고 1초, 2초, 3초. 짧게 삐져나오는 탄식. 그 뒷모습은, 그야말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앞모습이 충분히 그려지는 뒷모습이었다.


“잘 그렸네.”


그리고는 놀라지 않은 척 사온 재료를 주방에 나열하였다. 종전 마로는 내 반응들을 보며 이런 기분이 들었겠군.


봉순과 내가 놀라움을 감춘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그것을 표출했다면 평소 모습 이상의 호들갑을 떨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정도로 그림은 훌륭하다. 애매하게 이것저것 짚고 넘어갈 수 있는 종류의 작품이 아니었다. 보면 볼수록 꽃송이의 방향과 색감, 그 모든 것들이 봉다방의 실내 분위기, 조명, 인테리어에 고려되어 있었다.


예술은, 사기가 아니었다.
벽화(壁畫)는 벽화(壁花)가 되었다.


그 완벽한 창조물 아래에는 손바닥 크기의 생명체가 테이블 밑으로 숨어들어 있다. 마로가 사료통을 흔들자 반사적으로 큰 눈을 고정한 채 뛰어온다. 그녀가 사료를 작은 손에 덜어 내민다. 그리고 마로의 손만큼이나 자그마한 그 녀석은, 손바닥이라도 뚫고 들어갈 기세로 머리를 파묻고는 사료를 흡입한다.


“홍자구나.”

“네.”


쭈그려 앉아 작은 고양이의 식사시간을 바라보는 마로의 표정에 따스함이 오른다. 전에 없던 표정이다.


“너 홍자를 정말 아끼는구나.”

“많이.”


장난감만 한 소녀와 고양이가 봉다방에 마주 앉아있다. 그 위로는 봄비의 수분을 한껏 흡수한 듯한 꽃들이 피어있다. 우리가 선택한, ‘마로’라 불리는 새 직원은, 그 고립되어 보이는 분위기와 달리 진한 생명의 기운을 몰고 왔다. 봉순과 봉팔은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생기, 봉다방에 이전보다 더 밝은 햇살이 들어선다.


우리는 보물을 발견했다.



이전 22화 외눈박이 세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