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왕고래 Jan 27. 2016

홀딱, 그 무렵

#24. 이성에 묻다


밥 담긴 수저의 끄트머리, 반찬을 옮기는 젓가락의 양 기둥, 화장실 문고리, 변기 손잡이, 수도꼭지, 몸을 휘감은 이불의 가장자리, 가려웠던 몇몇 지점의 피부, 그리고 리모컨에 수 놓인 버튼들.


그것이 전부였다.


5일간의 황금 같은 휴가기간 동안 내 지문이 묻은 곳이라는 정말이지 그게 다다. 난 그야말로 태고의 생명체처럼 옴짝달싹 하지 않았다. 지난 수개월 동안 꿈꿔왔던 완벽한 휴식을 달성한 셈이다. 눈을 뜨면 TV쇼가 방영되고 있었고 눈이 감길 즈음이면 꿈속으로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뜨면 TV쇼가 방영되고 있었다. 때로는 해가 떠 있었고 얼핏 저녁노을이 스쳤던 기억도 난다. 엄마의 역정과 볼기짝에 피어올랐던 몇 대의 후려침도 기억난다.


배고픔이 지나가면 쓰라림이 오고는 했다. ‘태고의 생명체’는 쓰라림 따위 견뎌냈다. 다만 그 쓰라림을 지나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오면 슬그머니 부엌을 향했다. 간단한 밑반찬과 밥을 싸들고 다시 둥지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TV에 눈을 고정시킨 채 밥 한 번 반찬 한 번을 반복했다. 밥의 상태와 반찬의 맛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맛있는 상태였다.


TV 속 세상엔 모든 게 들어있었다. 난 한참을 웃고 또 웃었다. 웃다가 옆으로 쓰러진 이후로도 계속 피식거렸다. 리모컨은 어디로든 데려가 주었다. 웃음에 지치면 눈물을 주었다. 눈물이 마르면 가슴 서늘한 감수성을 주었다. 벅찬 감동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도 하였다. 공허함도 찾아왔다. 하지만 그 공허를 몸소 느끼기도 전에 웃다 지쳐 옆으로 누운 채 피식거리고 있었다. TV여행의 가이드 같았던 리모컨은 무척 편리하면서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버튼을 누르는 것조차 귀찮아질 무렵 휴가는 끝이 났다.


휴가 기간엔 모든 걸 잊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 현실적으로 보낼 수 있는 진짜 휴가라고 생각했다. 지나온 시간 동안 습관적으로 배인 봉다방에 대한 생각들을 내려놓고, 뭐랄까 무아의 시간들을 보내고 싶었다. 물론 성공했다. 누군가가 나의 돌돌 말린 이불과 리모컨을 뺏으며 “봉다방은 언제부터 출근하는데?”라고 물었다면, “다방?”이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놓아지지 않던 것이 있다. 굳이 뽑자면 봉다방의 봉, 그러니까 봉순이의 봉이랄까…. 내 이름 봉팔이의 봉도, 쓰임새 좋은 월급봉투의 봉도 아닌, 굳이 금봉순이라는 촌스러운 이름 가운데 떡하니 박혀있는 그, 봉인 것이다.


지난 수개월 동안 그녀와 함께 했다.


하루 반나절 이상은 시야에 항상 그녀가 있던 셈이다. 주머니에 손 넣으면 예외 없이 잡히는 핸드폰처럼, 그녀는 내 시각적 범주 일부를 채워왔다. 그 쉴 틈 없는 시상의 자극은 진지하게 그녀를 따져볼 틈을 주지 않았다. 따져본다? 뭐 어쨌든, 그녀는 항상 눈앞에 있었다. 그렇게 내 눈 속으로 들어와 가끔 웃고 가끔 찡그리며, 때론 맥 빠지는 대꾸를 하며 그 존재의 예외 없음을, 그 장면이 실재라는 걸 끊임없이 확인시켜줬다.


휴가 기간 내내 시야에 봉순이 없었다. 그 뚜렷했던 장면들은 점차 희미해졌다. 그리고 희미함은 내면 깊은 곳 어딘가에서 하나의 덩어리로 변해갔다.


오늘 아침, 그녀가 없는 봉다방에 발을 디디며, 덩어리를 감싸고 있던 얇은 막은 터져버렸다. 위태로이 그득 차 있던 무언가가 몸속 사방으로 질척하게 뿌려졌다. 혼란스러워서인지 또는 놀라서인지 모르겠다. 처음엔 그 폭발을 외면했다. 그런데 이 짓궂은 것들이 무분별하게 부풀어 오르며 진정할 틈을 주지 않았다. 둔탁한 진동이 가슴을 수차례 두들겼다.


쿵, 소리가 났다. 분명히 들렸다.


나무계단에 걸터앉아 숨을 고른다. 쿵, 어느덧 손바닥이 가슴을 진단한다. 이상하다. 손에 느껴지는 체온은 정상인데 가슴은, 그 속은 너무나도 차갑다. 누군가가 내 가슴속 그 어떤 줄기 뭉치를 아득하게 어두운 절벽 속으로 끌고 내려간 것만 같다. 춥고 음습한 그곳으로 몸 전체가 끌려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선반 기둥을 움켜쥐며 그 아찔한 느낌을 감당했다.


그렇게 한차례 혼란이 지나더니, 그와 상반된 고요함이 밀려왔다. 터져 나왔던 무언가가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으리라.


차분하게 앉아서 속삭였다. 방금 전 깨달은 그 사실을, 쉴 새 없이 휘몰아쳤던 역동의 의미를, 깊은 절벽 밑에 있는 그것을, 지난 5일 동안 수면 위로 떠오른 덩어리의 정체를, 그래 나는.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


언제부터였을까.

팻말과 함께인 교문 앞의 그녀를 보았을 때부터인가,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 인가, 크리스마스트리를 준비하면서? 아니면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역전에서부터 인가.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생각을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난생처음 겪는 낯선 감정에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아직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중요한 건 현재이다. 분명한 사실에만 집중하자. 일단, 내가 봉다방의 늪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또한 지난 5일 동안 떠올린 존재라고는 그녀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지금 매우 —티가 날까 조심스러울 정도로 매우— 그녀가 보고 싶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 시작이 언제부터이든 간에, 현재 봉팔이가 봉순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설명해주는 사실들이다.


내 내면에 있던 동기의 뿌리는, 인지부조화의 계속되는 덧붙임도, 호기심도, 정처 없는 흩날림도 아니었다. 그저 같이 있고픈 마음이었다.  






봉다방은 모든 오픈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마로는 주방에서 식기들을 닦고 있었다.


“빨리 왔네? 오픈을 혼자 다 한 거야?”

“네”


예상대로 짧은 대화.

마로가 이곳에 온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녀는 이미 나와 봉순을 능가했다. 빠르고 정확하고 숨겨진 에너지가 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인 진행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나와 봉순이 힘을 합쳐도 1시간 남짓 걸리던 오픈 준비가, 그녀의 ‘느릿느릿’에서는 30분이 채 넘지 않는다.


그런 마로의 능력은, 봉순과 나에게 생각보다 빠른 휴가 결심을 가능케 하였다. 지난주, 우리는 휴가기간과 순서를 정하였다. 봉팔이 5일, 봉순이 5일, 수개월만의 오아시스 같은 휴가. 그렇게 내 휴가가 먼저 일단락되었다. 나는 완충되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봉다방에 들어서며 무언가에 얻어맞았다. 그 강한 충격과 함께 미처 처리되지 않은 감정의 파편들이 날아오고 있다. 아 젠장, 봉순이가 좋다….


그런데 사실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 가슴에서 시작된 울림이 온몸 구석구석 스며들며 좋아해, 좋아하지롱, 외쳐 대지만, 정작 ‘왜’ 좋아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능글맞고 노련하다.


이런 상황을 쉽게 용납해서는 안 된다. 내 얼마나 논리적인, 아니 그러려고 노력해온 남자인가. 논리를 담당하는 이성(理性) 부서를 노크한다. '납득'되고 수학공식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근거가 필요하다. 테이블에 걸터앉아 냉정할 정도로 이성적인 접근을 해본다. 아니 그보다는, ‘이성’에게 접근 권한 일채를 넘겼다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이성이 말한다. 그가 가장 자주 쓰는 단어는 ‘왜’이다.


[현실적인 데이터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5일간 떠올린 존재, 그중에서도 사람이 봉순뿐이라는 것, 그리고 현재 그녀를 매우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보고 싶다’와 ‘좋아하다’를 동일선상에 두었습니다. 잘못된 접근입니다. 왜? 지난 5일이나 지금이나 그녀가 곁에 없기 때문입니다. 왜? 당신의 휴가가 끝나면서 그녀의 휴가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녀가 보고 싶은 것일까. 계속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보던 것을 볼 수 없으니 보고 싶은 게 당연합니다. 단순한 금단현상일 수 있습니다. 왜? 오래 봐왔으니 그만큼 짙고 지속적인 자극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극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현재 보기를 원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입니까. 그녀의 눈입니까?]


그 질문에 그녀의 눈을 떠올린다.

시험 문제로 <봉순의 눈을 그려보시오.>가 출제가 된다면 응시자의 90% 이상은 연속된 선 두 개를 그을 것이다. 선에 점을 한 두 개 더 그려 붙이기야 하겠지만 나머지 10%도 비슷한 형태의 표현을 할 것이 분명하다. 봉순의 눈이 딱 그렇기 때문이다. 감으면 선 두 개, 뜨면 선에 약간의 굴곡이 생기는 정도이다. 날카롭게 찢어진 그 눈 속에는 예상외로 큰 눈동자가 숨어있다. 때문에 그녀가 게슴츠레한 표정을 지을 때는 뜨인 공간의 대부분이 눈동자로 채워지고는 한다.


봉순의 눈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것은, 아마도 스승의 날 꽃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일 것이다. 그 찢어진 눈으로 한동안 나를 깊이 응시하였던 기억이 난다. 마치 이미 나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눈을 마주친 기억이 없다. 마치 당시에 눈빛을 마주하며 들킨 것을 다시는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의 눈은 매력적이다. 분명한 사실이다. 그 눈을 계속 마주하고 대화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매력을 외면치 못할 것이다. 단지 그녀가 그럴 틈을, 그 정도로 눈빛이 오가는 시간을 두지 않을 뿐이다. 그녀는 절대 사람을 오래 바라보지 않는다. 때문에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녀의 눈빛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녀와 눈을 마주친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그리움은, 그 보다는 좀 더 깊은 그 무언가 이다.


“언니가 없어요?”


마로의 갑작스러운 질문이 날아왔다. 아마도 '언니가 없어서 그러냐'는 뜻 이리라.


“응…? 뭐가?”

“얼굴.”


“얼굴이 뭐?”

“표정.”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거나, 평소와 다르다 등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것 같다. (나도 슬슬 대화가 된다.) 사실 첫 질문과 동시에 그 메시지는 나에게 전해졌다. 다만 당황한 모습 감추고자 짧게 되받아치고 있을 뿐이다.


“표정이 왜?”


마로는 찌푸린 미간을 힘겹게 위로 올리며 내 상태를 설명하고자 한다. 저런 표정이라는 얘기겠지, 평소 그 의사표현이 워낙 소박해서 인지 작은 찌푸림 마저 크게 다가온다.


“아니야. 그런 거~”


나는 마로가 차이를 두고 있는 ‘컨디션 좋은 표정’이 떠오르지 않아 이리저리 얼굴을 구기다가 대답했다. 그녀는 대답에 영양가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홍자에게 다가가 검지로 그 작은 생명체의 머리를 톡톡 건드릴뿐이다. 몸을 압축시킨 듯 정자세로 엎드려있던 고양이는 그 자극이 즐거운지 벌러덩 드러누워 입을 달작 거린다. 묘과라고 하기엔 좀 감정표현이 과해 보인다. 정적인 분위기의 사람과 동적인 분위기의 고양이라, 흥미로운 광경.


[눈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홍자마로의 풍경에 조금씩 나른해지던 차에 이성의 질문이 다시금 날아온다. 참 극성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의 감정이 시작될 때면 이성이 다가와 극성을 부린다. 왜! 왜! 왜! 하면서 이것저것 요목조목 따진다. 그러다 감정이 증폭되고 시간이 흐르면 ‘사랑’이란 것에 접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떠나 버리면, 시작할 때 끝없이 떠들었던 이성은 오간데 없다. 불난 집에 와서 “왜 그녀를 못 잊지? 바보인가?”하면서 눈치 없는 질문을 하다간 뺨 맞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대신 ‘감성’이 찾아온다.


이성이 남자라면 감성은 여자라는 말, 참 그럴듯하다. 그녀는 그다지 말이 많지 않다. 언어라는 것이 딱히 중요하지 않은 시기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저 조용히 슬픔과 아픔을 주면서, 시간이 차곡차곡 흐를 수 있도록 옆에 있어줄 뿐이다.


어쩌면 두 존재는 관계의 시작과 끝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꽤나 능숙하다. 때문에 나는 이 이성이란 작자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할 의무가 있다. 그래야 사랑의 주인공이 되던, 아니면 그 근처 가보지도 못하고 생지옥에서 감성을 만나게 되던, 조금이라도 덜 후회할 것이다. 이성은 그런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눈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녀의 얼굴입니까?]


다시금 질문이 날아온다. 얼굴이라… 종전의 시험 문제에서 그녀의 눈을 선 두 개로 표현했던 90%의 응시자들은, 두 개의 선을 더 추가함으로써 그녀의 얼굴을 완성시킬 것이다. 날렵한 코와 앙다문 입, 역시나 딱 그렇다. 더도 덜도 없이 위아래 선 두 개면 된다. 선이 네 개, 그만큼 그녀의 얼굴은 고요하다.


하지만 눈만 그릴 때와는 달리, 나머지 10%는 매우 다른 표현을 할지도 모른다. 봉순의 웃는 얼굴 때문이다. 아주 가끔 그녀는 크게 웃는다. 그때마다 고요한 선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렁임이 생긴다. 입을 활짝 벌린 채 “와.하.하.하.”라고 정확히 발음하며 웃는 그 표정은, 선이라고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것이다. 눈은 그대로 임에도, 그 표정 안에 고요함이라고는 없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웃는 모습을 처음 봤을 당시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잠잠했던 네 개의 선이 이리저리 출렁이는 모습에서 느꼈던 신선한 충격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나에게는 묘한 버릇이 생겼다. 아마도 우리가 다시 만난 이후일 것, 나는 그녀를 웃기기 위해 노력하곤 한다. 전에 없던 애교를 부리기도 하며 대화 속에서 유머코드를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갑작스레 웃는 그녀의 표정 변화를 보면, 황무지 같던 마을에 갑자기 폭죽이 터지며 축제의 장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 어쩌면 이것이 그녀가 보고 싶은 이유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역시도 가슴속에 있는 먹먹함을 대변하기에는 부족하다.


모르겠다.


그렇게 하나의 부위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내가 그리운 것은, 내가 보고픈 것은, 그녀의 어떤 분위기, 그러니까 무심함 속에서도 자신의 것들을 다룰 때만 희미하게 드러나는 그 아이 같은 표정, 편집적이면서도 한 순간 다 내버릴 것 같은 각오로 뭔가 결정할 때의 제스처, 이따금 드러내는 솔직한 표현들, 솔직함 속에서도 자신의 무언가는 숨기고 있는 듯한 어깨선, 손수 만든 커피를 내어갈 때만 나오는 단아한 걸음걸이, 사실상 겹겹 방어막치고 살던 나를 좀 더 꺼내보이게 하는 그 반응들, 그렇게 그녀와의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한 줌의 긴장감, 그중 무엇일 것이다. 아니 그것들이 버무려진 그 시간들이 바로 그녀이다. 내가 그리던 것은 그렇게 그녀와 흘러가는 시간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저기-”


정리 중인 생각의 노트, 그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면서 난데없이 끼어든 ‘저기’를 적는다. 의아한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외부로부터 들어왔다. 그리고 그 정보는, 그 의미심장한 두 글자는 마로의 목소리를 타고 왔다. 그것이 평소에 쉽게 듣던 ‘저기’와는 다르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마로를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뜬 채 “네가 말한 ‘저기’는 평소와 다른 의미야! 그것이 무엇이지?”라고 보채듯, 그녀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마로는 그 큰 눈으로 —친동생 같은 고양이와 함께— 한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의 등 뒤편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곳으로부터 일종의 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지만 왠지 생소한, 익숙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느낌의 소리였다. 기억 속 그 어떤 이야기 속에서 들었지만 도무지 어떤 내용인지는 생각이 안 나는 그런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목소리였다.


“걱정이 돼서 말이지.”


봉순.

수개월만의 첫 휴가 날, 그녀는 봉다방의 입구에 서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