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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Nov 05. 2019

나 때는

그 유명한 Latte is a horse


포악하기로 유명한 팀에 배치되어 멘탈이 영화 속 유리창처럼 잘게 조각난 적이 있다. 굵직한 돌을 삼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버티던 어느 날, 선임 대리가 날 호출하더니 물었다. 일은 좀 할 만하냐고. 미숙한 부분이 있지만 보탬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라고 모범 답안지를 냈다. 그는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사실 그 맹수만 득실거리는 부서에서 그는 유일하게 염소 같은 초식동물이었다. 생긴 것도.


맹수들의 표적이 되어 유독 많은 살점이 뜯겨나갔던 날, 삼키던 돌이 턱 걸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염소 대리를 찾아갔다. 지금까지 참고 있던 어려움들을 솔직히 털어놨다. 일을 잘하고 싶은데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고 왜 타박부터 하는지 모르겠다고, 담배 심부름까진 참겠는데 왜 내 돈으로 사야 하는지 알고 싶다고, 출근하지도 않은 사람이 왜 ‘잠시 자리를 비운 사람’이 돼야 하며, 그 거짓이 들통났을 때 화살을 맞는 사람이 왜 나인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그는 내 말을 천천히 들어줬다. 조금은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말이 이어졌다.


“나 때는, 더 심했어. 지금은 진짜 많이 좋아진 거야. 잘 참아봐.”


그는 자신의 말이 흡족했는지 얼굴 사방에 주름이 파이도록 웃더니 내 어깨를 툭 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몸을 감싸던 온기가 깡그리 사라졌다. 목구멍을 아슬아슬 통과하던 돌덩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쯤에서 하나 알아둬야 할 게 있다. 누구나 어렵고 힘든 시기가 있겠지만, 나는 진짜 정말 대단히 무척 엄청나게 어렵고 힘든 시기를 지나왔다. 위의 일화는 약과다. 고로 당신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내 시절 그것에 비하면 별게 아니다.


실망할 필요는 없다. 당신의 후배들은 더 하찮은 것들로 힘들어할 테니 말이다. 언젠간 자기 자리에서 화장실까지 걸어가는 것조차 힘들다고 할지도 모를 판이다.


그러니 누군가 같잖은 일로 불평을 늘어놓을 때면 ‘나 때는’으로 운을 띄워라. 더 힘들었던 과거의 경험을 시작으로 말이 물 흐르듯 흘러나올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나 때는:
1. 딱 말할게. 내가 겪은 고통이 네 것보다 커.    


그냥 내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건데 왜 상대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지는 걸까. 이 단어가 가지는, 혹은 이런 류의 화법이 가지는 심리적 방향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 한 명의 군 시절 얘기를 시작으로 그곳의 모든 군필자들이 ‘자신이 역사상 가장 힘든 군 생활’을 했다며 다툰다는 사실을 아는가.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고통의 체감 수준은 내가 겪은 경험들 사이에서만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온몸이 사방으로 분리되는 것 같은 몸살감기를 겪어본 이에게 환절기 기관지염은 가볍게 느껴질 수 있다. 큰 교통사고를 겪어본 이에게 있어 가벼운 접촉사고는 다친 사람 없으니 다행인 해프닝이 될 수 있다. 긴 시간 1일 1라면으로 취업을 준비했던 사람에게 고된 업무는 오히려 감사한 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제대로 걸려본 적 없는 사람에게 환절기 기관지염은 일상을 무력화하는 끔찍한 재해다. 축 처지는 몸을 어찌할 바 모르겠고, 잦은 기침으로 난생처음 복근이 생길 지경. 이 사람에게 내가 걸렸던 살인적 몸살감기에 대해 아무리 잘 묘사한다고 해도 자신의 고통 수준과 비교할 수 없다. 당장 기침할 때마다 목젖과 뱃가죽이 찢어질 뿐.


따라서 위로한답시고 이 표현을 사용하는 건 그 쓰임을 전혀 모르고 하는 짓이다. 상대는 지금의 당신이 얼마나 힘들 게 이곳에 도달했는지 관심이 없다. 이 말의 역할은 오로지 내가 힘들었던 시간을 상대방에게 전달하여 고생 스웩의 우위를 점하는 것뿐이다.     


"내 얘길 듣고 싶나...? ... 라테는 말이지..."



예문

“작년까지는 엉망이어서 제가 참 고생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여러모로 상황이 좋아졌죠.”    

사실 이 단어 자체가 이미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어서 등장하는 순간 바로 귀를 닫는 게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변칙적인 접근을 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신규 사업이나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때, 또는 새로운 직원이 입사하여 업무에 대한 소개를 할 때 이와 같이 사용되는 식이다.

‘나 때는’만 달달 외우고 있던 상대방은 제대로 방비도 못하고 그가 내리는 비를 맞게 된다.    


심화과정

이 단어가 가장 강력한 파워를 뿜어내는 타이밍은 글 서두의 경험담처럼 누군가가 위로를 청할 때다. 상대의 말이 끝나갈 때쯤 운을 띄우며 더 어려웠던 시절의 고충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은 입만 살짝 벌린 채 멍한 표정으로 그 무용담을 듣게 된다. 실제로 ‘듣고’ 있을지는 미지수.    


주의사항

한번 이 단어를 들은 사람은 앞으로 당신에게 고민을 내비치지 않을 것이다. 뭐, 그 역시 편리하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참고

더 힘들었던 경험으로 위로하고 싶다면, ‘나 때는’보다 ‘그때도’가 낫다. 상대방이 전에 겪었던 경험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가 이전에 겪었던 경험이 얼마나 이겨내기 어려운 일이었는지 부각하며 그 가치를 높일 수 있다. “너니까 이겨낸 거야. 그때도.”    



<나 때는>

파괴력: ★★☆☆☆
지속성: ★★☆☆☆
거리감: ★★★★★

유의어: #그건아무것도아니야 #유난떨지마
연관어: #좋을때다 #그게어려워?
반의어: #그때도 #너니까 #더어려운일도이겨냈잖아






왕고래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소심합니다. 사람에 대한 글을 씁니다. <소심해서 좋다>, <심리로 봉다방>을 썼습니다. 어릴 적, 꿈을 적는 공간에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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