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오늘도 살아가는 이유
남편이 차를 세웠다. 트렁크엔 시아버님의 시신이 있다. 장례를 진행할 수 없어 이불보로 감싼 후 병원을 빠져나왔다. 뒷좌석에 앉은 남동생의 팔목엔 붕대가 감겨있다. 얼마 전 자살기도를 한 탓이다. 그렇게 우리는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차를 세운 이유는 아들이 날뛰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군 조종사가 되기 위해 9개월 간 묵언수행을 하며 목표에 매진하는 열정을 보였다. 그리고 방금 전 자신이 색맹이란 걸 알게 됐다. 색맹은 비행기 조종사가 될 수 없다. 아들은 차가 멈추기 무섭게 뛰쳐나가며 욕인지 비명인지 모를 것들을 토해냈다. 한 동안 그렇게 울부짖다가는 남편을 향해 '패배자'라고 소리쳤다.
남편은 '승자 외엔 남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 가치관을 우리에게도 늘 강조했다. 오늘 새벽, 남편이 사활을 걸었던 계약이 파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우리 가족은 곧 파산한다. 끊었던 담배 생각 간절하다.
<미스 리틀 선샤인>은 삶의 비극이 얼마나 기별도 없이 몰아치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극의 초반부터 위태로웠던 이 가정은 7살 막내딸의 미인대회로 가는 여정에서 한 명 한 명 극단으로 치닿는다. 심지어 할아버지는 여행 도중 헤로인을 과복용하여 생을 마감한다. 감당 불가의 상황들을 안고 시동도 안 걸리는 버스를 밀고 있는 이들을 보고 있자면, 그래, 삶은 비극이 맞다.
'부모됨의 역설(parenthood paradox)'이라는 말이 있다. 결혼과 육아가 행복 수준을 높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오히려 그것을 감소시키는 현상을 의미한다. 얼핏 생각하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막상 그것을 실제 수치로 확인하면 느낌이 다르다.
위 표는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여러 사건들에 대한 스트레스(고통) 수준을 나타낸다. 배우자의 사망으로 인한 고통을 100이라고 할 때, 결혼이 50, 부부간의 화해가 45나 된다. 행복해야 할 사건이 고통을 생성하는 것도 의아한데 심지어 그 수준이 파산이나 가족의 건강문제보다 높다. 뭔가 어긋나 이혼을 택하게 되면 감옥살이나 가족의 사망보다 높은 고통을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수치만으로 보면 결혼 후의 삶은 비극이나 다름없다.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게 합리적인 판단인 셈. 그럼에도 왜 이런 불행한 선택들을 하는 걸까. 고통을 즐기기 때문에? 설마.
미스 리틀 선샤인의 가족들을 보고 있으면 그 이유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 발생하는 사건들만 나열하자면 1초에 20번씩은 멘탈이 무너져야 정상. 아무것도 하지 말고 숨만 쉬라고 해도 힘들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이들은 일어났던 사건에 비해 다소 사소한 일들 조차 따져보고 걱정하며 나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딸의 미인대회가 왜 문제일까.
시아버님은 손녀인 올리브를 누구보다 아꼈다. 남편은 아버지와 올리브가 오랜 시간 준비한 만큼 장례보다는 이 대회를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린 망설이지 않았다. 쉬지 않고 달려가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아들이 차를 세우기 전까지는.
아들은 우리 가족이 정말 싫다고 외치곤 주저앉았다. 누군가 달래 보려 했지만 쉽지 않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발만 구르던 찰나, 올리브가 다가가서는 말없이 안아준다. 그가 올리브를 한 번 바라보고는 숨을 내쉰다. 둘이 차로 돌아온다.
하지만 끝끝내 이 괴상한 가족은 미인대회에 도착하고야 만다. 무대에 오른 올리브는 어린이 대회에는 맞지 않는 과감한 춤사위를 펼친다. 사회자가 제지하려 하자 아빠도 올라가서는 막춤도 아닌 그 어떤 동작을 반복한다. 오빠도, 외삼촌도 올라가서는 결국 대회를 망쳐버린다. 이들 모두 경찰서에 간다.
대회 장면만을 본다면 이들은 갈 데까지 간 막장+민폐 가족이다. 하지만 자살기도를 했던 남동생을 찾아가던 첫 장면부터 그 시간을 쭉 따라와 보면 묘하게도 이들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제대로 풀린 일이 하나도 없는데 딱히 마지막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뭔가 더 이어질 것 같은 연속성은 더 큰 행복이나 불행에 대한 표현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영화는 가장 큰 불행인 할아버지의 죽음이 모든 사건을 뒤엎어 장례를 치르며 끝났을 테니.
모든 사건에서 의미가 발생했다. 각자가 가진 삶의 목표와 실패,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손녀의 관계 그리고 7살 소녀의 남은 인생이 갖는 가치. 긴 시간 동안 여러 사건들을 통해 발생한 의미들의 합, 그들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덤덤하게 그것을 좇고 있었다.
낯설지 않았던 이유. 그게 결국 삶이어서가 아닐까.
경찰서에서 선처하여 집에 갈 수 있게 됐다. 운이 좋다. 그런데 차가 고장나서 누군가 밀어야 한다. 같이 밀기 시작한다. 조금씩 전진하자 남편이 타서는 시동을 건다. 속도가 더 나기 전에 올리브를 태운 후 차에 오른다. 적정 속도가 되자 남편이 기어를 3단으로 바꾼다. 점점 빨라진다. 동생 녀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달려와서는 어렵사리 차에 들어선다. 이젠 꽤나 빨라져서 달리기 실력이 중요하다. 아들이 9개월 간 만든 체력을 뽐내 듯 큰 걸음으로 뛰어와 가볍게 탑승한다. 뒷문을 닫는다.
'부모됨의 역설(parenthood paradox)'은 그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다. 왜 선택을 하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우리의 삶을 행복과 고통의 단순 합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어떤 결정을 하기 약 10초 전에 이미 그 결과가 뇌파로 확인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 '내가 내렸다고 인식한 그 결정'은 그전에 정해진 결과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최상위 포식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종보다 잘 판단하고 선택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경험했던 일을 잘 해석하고 독립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드는 가보다, 이 결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의미를 만드는 일은 누구에게나 허락된다.
그렇다면 오늘도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행복이란 게 꼭 나만 비껴가는 것처럼 인생이 수면 아래로 흘러갈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수면 위로 가기 위한 몸부림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과 오늘의 경험들이 가지는 의미를 헤아릴 때, 가장 인간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오늘도 나를 통과하는 일들의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긴 시간 끝에 맺힌 한 떨기 의미를 조금은 먼발치에서 되짚어보는 것,
그게 곧 희극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