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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un 09. 2020

오늘은 낮은 상을 폈다


아침 상에선 기름에 지진 계란이나 구운 빵 냄새가 났다. 키가 작아서 볼 순 없었지만 늘 같다. 지졌거나 구웠거나. 계란 혹은 빵.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 언니는 날이 밝아질 때쯤 집을 나가서 아득한 밤이 되어야 돌아오곤 했는데, 상 위에 놓인 것들을 번갈아 주워 먹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내가 매일 아침 보는 광경이다.


아침의 한 차례 전쟁이 끝나고 거실 전체가 노란빛을 띨 때쯤 오빠가 방에서 나온다. 뒤집어 입은 건지 목이 늘어난 건지 혹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건지 알 수 없는 연갈색 티셔츠와 무릎이 나올 대로 나와서 다리가 네 개처럼 보이는 회색 츄리닝, 늘 같은 차림이다. 입에서 타조알이라도 꺼내듯 하품 크게 뱉으며 배통을 긁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아침의 그들과는 다른 종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막내인 날 가장 많이 예뻐하고 챙겨주는 사람은 오빠다.


오빠가 앉은 상에선 라면 냄새가 난다. 한기 가득한 김치통과 김 모락 피어오르는 밥 한 공기를 두고는 가스레인지 앞으로 간다. 엉덩이를 긁으며 오른발로 게다리 춤을 추다 아뜨뜨 하며 냄비를 들고 돌아온다. 물에서 젖은 옷감 꺼내듯 라면을 빨아들이곤 아삭거리며 김치를 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돈다.


"안돼. 너한텐 매워."


이상하게 우리 가족은 자기들은 맛있는 걸 잔뜩 먹으면서 나에겐 덜 맛는 것만 골라주곤 하는데 오빠는 달랐다. 맛 좋은 식은 나에게도 몰래 건주곤 했다. (그러다 걸려서 엄마한테 혼난다.) 때문에 오빠가 안된다고 하면 정말로 맛없는 음식이다. 사실 언젠가 고집을 부려 먹어봤는데, 라면, 정말 맵더라.


이따금 엄마가 집에 계실 때가 있는데 이 날은 살얼음판을 걸어야 한다. 엄마는 티브이를 보거나 통화를 할 때는 그래도 좀 웃는 편인데 오빠가 방에서 나오면 안면에 머물던 소소한 즐거움이 먼지 날리 듯 사라졌다. 방 환기를 해라, 좀 씻어라, 수건을 꺼내 썼으면 제대로 걸어둬라, 다 차려두는데 왜 라면만 먹냐, 반찬 꺼내는 것도 귀찮냐, 이번 가족모임에도 안 올 거냐, 나이가 이제 서른이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등, 주제는 다양한데 늘 마무리는 같은 대사로 끝이 난다.


"에휴, 5년째 저 꼴을 보고 있으니, 내가 제명에 살아? 못 살지."


나도 8년 인생으로 쌓은 눈칫밥이 있는지라 이럴 때 나가 놀자고 설치다간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안다. 들썩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오빠와 무언의 사인을 주고받다. 훗날을 도모한다.



해가 지면 문밖으로 나간 가족들이 돌아와서 나를 번갈아 안아주곤 했다. 나갈 때는 서로 다른 냄새가 났는데 돌아와서 안아줄 때는 이상하게도 같은 냄새가 난다. 뭐랄까 땀냄새인데 더 매캐하고 코를 찌른다고 해야 할까. 그 냄새를 맡고 있으면 왠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상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시작한다. 아침엔 기름 지진 계란 몇 개로도 이리저리 뛰던 사람들인데, 저녁엔 더 맛깔스러운 음식 많도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맴돌다. 동작도 더 느려진 게 마치 누군가 조종하는 사람들 같다. 식사가 끝나면 오빠와 언니는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질 않았고, 아빠와 엄마는 티브이를 켜놓고 졸다가 이내 방으로 들어가셨다. 상 머리 등불이 꺼지며 하루가 마무리된다.


아, 가끔 엄마가 등을 다시 켜곤 했다. 오빠와 크게 다툰 날이다. 모두 잠든 시간,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잔뜩 꺼낸다. 시금치, 콩나물, 무생채, 볶은 호박을 한 젓가락 툭 떠서는 양푼에 집어던진다. 밥도 한 주먹 던지고 고추장은 더 세게 내리꽂는다. (이 음식을 만드는 건 화가 나는 일인가 보다.) 참기름을 넣을 때면 온 집안 구석까지 고소한 냄새가 뛰어다닌다. 침이 고이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엄마가 쇠 마찰 소리를 내며 그것들을 뒤섞기 시작할 때쯤 언니가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나와서는 숟가락을 하나 꺼내온다. 엄마는 살이 찌네 시집을 못 가네 잔소리를 하시면서 밥은 한 주걱 더 퍼오신다. 나도 엄마 곁에 다가가 먹을 게 없는지 기웃거린다.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들 사이로 엄마의 냄새가 난다. 늘 오빠에게서 나던 냄새, 알알한 쓴 내가 났다.



오늘은 낮은 상을 폈다.


경험상 낮은 상을 펴는 날은 좋은 일이 생긴다. 우선 종류도 많고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다. 무엇보다 좋은 건 높은 상에서 냄새로만 알아채던 음식들을 눈으로 모두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곳에 놓이는 접시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기분은 최고조로 고양된다.


평소에 안 보이던 사람들이 있다. 언니 말로는 친척분들이라고 한다. 상으로 음식을 옮기는 모습이 즐거워 보인다. 이상한 일이다. 얼굴에 웃음 주름이 파인 것도 아닌데 기분이 좋다는 게 느껴진다. 가장 이상한 건 오빠다. 평소와 다른 옷을 입었다. 상체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흰색 칼라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다.  모습이 너무 깔끔해서 분주한 다리들 틈으로 보면 못 알아볼 지경.


상 위로 잡채가 선착한다. 탱글탱글 윤기 뽐내는 그것 앞에서는 라면 면발도 푸석한 밀가루 덩어리일 뿐이다. 바삭하게 구워진 피부로 입 벌린 채 누워있는 굴비. 저걸 먹기 위해 수많은 아침을 구운 빵으로 달랜 게 분명하다. 끓인 양배추와 쌈장. 밥 한 공기 뚝딱이지. 양푼으로 던져지던 오색 나물도 오늘은 각자의 공간에서 귀태를 뽐낸다. 네모, 동그라미 접시들 틈에서 동치미가 보인다. 투명한 저 녀석을 얕봤다간 큰일 난다. 혀는 물론 입천장, 잇몸, 심지어 목구멍의 죽은 세포들도  다 깨우는 마법의 액체이기 때문이다. 잠시만, 동치미가 있다는 것은...


냄새가 난다. 달큼하고 뭉툭한 고기 향. 그 녀석이 오고 있는 게 분명하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상에 놓인 것들과는 담긴 그릇의 크기부터 다른 그것이 엄마의 손에 들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갈비찜이다.


오랜 불에 끓고 달이며 간장을 잔뜩 머금은 그것들이 상에 놓이는 순간, 낯선 이들 앞의 체면은 온데간데없었다. 테두리를 빙글빙글 돌다가 결국 상 위에 발을 올려버리곤 꾸중을 듣는다. 모르겠고, 둘러앉은 가족들 중 나에게 갈비찜을 줄 사람을 찾아 헤맨다. 엄마 등에 매달려도 보고 오빠의 허벅다리도 두어 번 할퀴어보지만 오늘따라 반응이 없다. 뭐 중요한 얘기라도 하는 건가.


오늘은 언니가 내 밥을 준비해줬다. 세상에, 내 생일인가보다. 밥보다 갈비가 더 많다. 그릇 놓이기 무섭게 엄마의 손맛 담긴 갈비찜부터 덥석 문다. 입으로 들어가 비강을 통해 콧구멍으로 다시 나오는 그 뜨거운 향기만으로도 몸에 힘이 빠진다. 무, 당근, 마늘, 양파, 대추와 표고버섯 향이 간장 소스와 한 데 어우러지며 경고하는 것 같다. 미치지 않을 자신 있으면 씹어보라고.


경고인 걸 알아챌 때는 늦는다. 이미 씹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그것을 씹을 때는 감질나는 큼한 양념이 화산 폭발하 듯 입 속 가득 퍼진다. 저마다 과장스러운 춤을 추며 협소해진 입안의 미각을 확장시킨다. 두 번째 씹을 때는 쇠고기 육즙이 본색을 드러내며 퍼레이드의 대열에 합류한다. 물러진 쇠고기가 이리저리 흩어지며 이 천상의 맛으로부터 소외된 곳이 없는지 살핀다.


"크앙!"


엄마가 술잔을 챙기려 일어났는데 순간 내 밥을 뺏어가는 줄 알고 성질을 부렸다. 아차 싶었지만 멈출 수 없다. 씹을수록 진중하고 눅진한 육즙의 고소함이 화려했던 양념의 맛을 대체하며 혀를 꾹꾹 누른다. 뼈 근방의 질긴 살들을 질겅거릴 때쯤이면 깊숙이 배어있던 양념과 육즙이 밀물과 썰물처럼 번갈아 다가오며 작아지는 한 점 고기에 대한 여운을 달래준다. 빠르게 하나 더 집어먹을 시점. 어, 뭐야. 왜 없어. 언제 다 먹었지.

 


빈 접시를 괴롭히다가 그 녀석의 맛이 희미해질 때쯤 상 주변을 돌며 다시 각설이를 시작했다. 오빠가 아빠의 술잔을 채우고 있다. 혹여 비찜 한 조각 더 주려나 싶어 그 옆을 지킨다.


"여보, 당신도 아들 한 잔 따라줘야지."


아빠가 엄마에게 술병을 건네려 하자 엄마는 크게 손사래치곤 부엌으로 가셨다. 그 뒷모습이 도망치는 사람처럼 보인다. 아빠는 오빠를 향해 코를 찡긋 구기며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곤 병을 그대로 들고 계셨다. 엄마가 돌아오자 억지로 그것을 엄마의 손에 들린다. 엄마는 '아 정말 어 증말' 하면서 한동안 호들갑을 떨더니 잠시 숨을 고르곤 '미안해서 그르지...'라고 삭였다. 오빠에게 술병 끝을 향한다.


"고생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좋은 날인데 엄마의 눈 주변이 빨개지더니 이윽고 눈물이 흘렀다. 아빠가 엄마의 등 투욱 툭 때린다. 아, 쓰다듬는 건가.


"맘고생시켜드려서 죄송했어요."


오빠가 잔을 입으로 털더니 나를 끌어 품으로 끌어당긴다. 그의 밥이 거의 다 남아있다. 평소 그릇까지 씹어먹던 그 오빠놈과는 다르다. 안 먹어도 배부른 일이라도 있는 건가. 오빠가 말을 잇는다.


"이제 웃을 일만 만들어드릴게요."


오빠의 턱 언저리를 킁킁거리며 애교를 떨어본다. 갑자기 나를 꽉 안는다.


"마루야."


오빠한테 갈비찜 냄새가 났다.


"오빠가 이제 맛난 거 많이 사줄게."


달큼한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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