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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알고 있어

아, 후련해

by 왕고래


누군가의 비밀을 들으면 지키기 위해 병적으로 노력하는 버릇이 있다. 혹여 비슷한 맥락의 어떤 말이라도 뱉어버릴까 봐 일정 수준의 긴장감을 유지한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다른 사람의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데, 그것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나의 비밀을 전하는 것 역시 신중하게 결정한다. 나는 비밀을 한 껍질 벗기면서 그에 준하는 해갈을 경험하겠지만, 상대방은 내 소유의 그것을 자신의 공실에 온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저 사실은 동건 씨랑 사귀고 있어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으니 혼자만 알고 계세요.”


세상에. 상상도 못했다. 놀란 마음으로 그녀의 비밀을 받아들고 지하 깊은 곳의 금고로 들어갔다. 진열장 한 귀퉁이에 그것을 잘 모셔두고 금고문을 꾹 닫았다.


다음 날이었나. 다른 직원이 첩보원처럼 게걸음으로 다가와서는 말했다.


“1급! 1급! 이거 진짜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돼요. 소영 씨랑 동건 씨랑 연애 중.”


세상에. 세상에나. 나는 상상도 못 했다는 얼굴을 했다. 내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비밀이기 때문이다. 그는 놀라는 내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멀어졌다. 그 뒷모습이 조금은 개운해 보였다. 나는 그가 건네준 비밀을 어제 놓았던 비밀 꾸러미 옆에 같이 모셔두었다. 금고문 열고 닫는 것도 일이다.


“요즘 동건 씨랑 소… 음… 뭐 들은 거 있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직원이 관련 얘기를 꺼냈다. 직감적으로 그가 이 일에 대한 뭔가를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시치미를 뗐다. 매우 가까운 관계의 직원이었기에 그런 내 반응이 마치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불편했지만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뭔가 고심하는 표정을 짓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복화술을 펼쳤다.


“동건 씨랑 소영 씨….”


헐? 세상에. 그런 일이. 불과 며칠 전에 지었던 표정을 어렵지 않게 만들었다. 연기력이 성장하는 느낌이다. 그는 역시나 이 특급 비밀의 보안을 강조했다. 나는 전에 두었던 두 개의 보따리 옆에 그것을 두었다. 세 녀석이 나란히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다. 참 대단한 비밀들이다.


얼마 뒤 소규모 회식 자리가 열렸는데 마침 나에게 비밀을 건넸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나는 사내 연애와 관련된 주제가 안 나오길 바랐다. 이야기 속 당사자를 비롯한 이 세 명으로부터 동일한 주제의 비밀을 들었고, 각자가 나에게 얘기했다는 사실 역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감싼 보자기는 다른데 내용물은 동일한 그것들의 ‘알려지지 않을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대화 내내 꽤나 공을 들여야 했다. 그래서 우연히 동건의 ‘동’ 자라도 나오면(지나고 보니 우연히 나온 동이 아니었지) 따로 연결 지점을 만들지 않았고, 그간의 연기 경력을 끌어모아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런데 대화를 한참이나 지속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건 씨는 잘 있나~? 지금 뭐하시려나 ㅋㅋㅋ”


내가 비밀을 지키려 했던 이 세 명은, 서로가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직원들도 비밀을 알고 있었다.


참 신비로운 일이다. 분명히 잘 보관해둔 것 같은데, 발도 없는 비밀들이 비브라늄 소재로 된 직경 2미터, 두께 1미터의 금고문을 열고 나와서는 어느새 모두가 볼 수 있는 술상 위에 턱 하니 널브러져 있다는 게!


내가 지키려던 것은 무엇일까. 나만 알고 있어야 했던 사실이었을까. 아니면 ‘나만 알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의 짐이었을까.


너만 알고 있어:
① 도저히 못 참겠어. 너한테 말해서 풀어야겠어.
② 너는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 그러니 이 비밀의 무게는 네가 감당해.



우리는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내 입을 떠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이 과정의 누군가는 받아 든 비밀을 지켜내기 위해 적지 않은 에너지를 소비하곤 한다. 당신의 입을 떠난 그것이 상대방의 심연 깊은 곳에 있는 금고를 대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별도의 신호가 있거나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 되기 전까지는 마치 매일 지불하는 이자처럼 일정 수준의 긴장감을 금고의 보안 유지에 투자하고 있는 셈이다. 보관 중인 상대방의 안위가 신경 쓰인다면 나 역시 그 비밀을 쉽게 다룰 순 없을 것이다.



예문

나에 대한 것이든 어디선가 듣게 된 것이든, 비밀을 타인에게 공유하는 이유는 그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피곤하기 때문이다. 털어놓으면서 일종의 해소감을 경험하거나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다만 그 후련함을 다음 사람도 겪어버리면, 더 이상 비밀로 존재하지 않게 될 위험성을 증가시킨다. 따라서 이 표현은 내 권익을 충분히 누리고 상대의 것은 막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주의사항

이 표현의 화자가 되었을 경우, 상대는 비밀을 말할 수 있는 대상이니 그만큼 당신에겐 신뢰가 높은 사람일 것이다. 상대방에게도 비밀이 된 그것을 쉽게 다른 이와 나눈다면, 그 순간이 반복될 때마다 당신에 대한 신뢰가 반씩 줄어들 것이다.



참고

만약 모두가 알게 되는 순간까지 당신의 비밀을 묵묵히 지켜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당신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위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놓치지 않길 바란다.



< 너만 알고 있어 >

파괴력: ★☆☆☆☆
지속성: ★☆☆☆☆
신뢰도: ☆☆☆☆☆

유의어: #어디말하면안돼 #믿는다
연관어: #어떻게다른데말할수있어 #어떻게나한테그래







왕고래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소심합니다. 사람에 대한 글을 씁니다. <후회 방지 대화 사전>, <소심해서 좋다>, <심리로 봉다방>을 썼습니다. 어릴 적, 꿈을 적는 공간에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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