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매우 귀하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 그것은 제한되어 있고, 존재하는 모든 순간에 줄어들고 있어서다. 심지어 언제 통째로 사라질지 모른다. 단순히 양만 줄어드는 게 아니다. 남은 양이 적을수록 노쇠해진다. 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든다.
현존하는 그 어떤 재력가도 지나간 시간을 살 수 없다. 만약 살 수 있다면 보통 사람은 평생 본 적도 없는 돈을 들여서라도 그것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간을 공짜로 얻는 사람이 있다.
그가 얻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간이며, 정확히는 훔치는 것이다. 친구 '박경수'가 그렇다. 경수는 모든 약속에 조금씩 늦는다. 차가 막혔거나, 타야 할 지하철을 놓쳤거나.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서, 휴대폰을 놓고 나와서 돌아갔었다는 둥,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쳤다는 둥, 이유는 정말 많은데 대부분 소박하다. 딱 그 정도의 시간을 늦는다. 5분에서 10분.
타인의 시간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도착할 수 있는 시간보다 앞당겨서 약속을 잡는 경향이 있으며, 시간이 정해진 후에는 그에 딱 맞춰서 움직인다.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그럴 만큼 시간 계산에 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오에 약속을 했는데 오전 느지막이 일어나서 티브이를 보며 준비를 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약속에 늦을 게 자명한데 그것을 최우선으로 두지도 않는다. 당장 할 필요 없는, 택배 상자를 뜯어서 정리하거나 설거지를 한다. 그런 다음엔 모닝커피를 마실지도 모를 일이다.
만성적인 지각에 대한 여러 연구 결과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일찍 도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동어 반복 같지만 뜯어보면 조금 다르다. 경수는 늦고 싶어서 늦는 게 아니라고 했다. 미리 도착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늦지 않으려는 마음'과 '미리 도착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결과적으로 상충된다. 약속에 늦지 않는 사람들은 대체로 정시가 아닌 미리 도착하기 위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변수가 생겨도 늦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경수는 그런 선택 자체를 꺼린다.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는 모습이 '다른 중요한 일이 없는 사람'처럼 비칠까 봐 불편하다. 타인의 시간을 훔치는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시간이 가치 없게 보이길 원치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예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하면 스스로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거나 다른 일정을 중간에 껴 넣는 이유다.
경수 역시 먼저 도착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기다리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팬시 매장에 들어가 휴대폰 케이스를 구경한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기다리던 나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전화를 걸었다. "어, 나 근처에 있어. 금방 갈게." 결국 10분이 지난 시점에 그가 나타났다.
경수가 부지런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경수 자체만 놓고 보면 그런 사람이 맞다. 하지만 그 효율을 위해 타인의 시간이 사용되는 건 얘기가 다르다. 그는 먼저 도착하더라도 이후에 도착할 상대방을 위해 기다림의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데, 두 사람 다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실제로 만나는 시간은 한참 늦어질 것이다. 효율을 위해 각자의 사소한 일들을 보면서 계속 어긋날 테니 말이다. 누군가는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경수는 양반이다. '이선주'에 비하면.
선주에게 10분 정도는 지각에 속하지도 않는다. 기본 30분에서 1시간이기 때문이다. 늘 미안하다며 사정을 얘기하는데, 신기하게도 비슷한 이유다. 나오는데 부서장이 잡았다거나, 문제가 생겼다거나, 자신만의 정의와 책임이 당긴 사정을 토로한다. 한두 번, 아니 열댓 번은 피할 수 없는 사정이겠지만 그 이상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는 건 태도로 볼 수 있다.
그녀의 행동에는 경수와는 다른 이유가 있어 보였다. '오는 게 맞는 건가'라고 생각할 만큼 지난 후에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도무지 그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관련 연구들을 찾아보았다. 그중 하나가 그녀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수동 공격성(passive-aggressive)이다. 사회적인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쌓인 사람의 경우 이에 대한 반격을 수동적인 수단으로 해소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합리적인 기대에 부흥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중요한 사실을 까먹거나 본래 해야 할 기본적인 일을 생략해 버리는 등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약속에 늦는 일이 잦다고 한다.
두 번째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이다. 스스로를 속인다는 의미다.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특정 이익이나 면피를 위해 강행한다. 예컨대 선주의 경우 '주인공병이 있냐'는 농담을 들은 적이 있는데, 만약 중요한 인물이 되기 위해 늦게 도착한다면 자기기만에 해당한다. 음식을 주문하고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은 상태에서 느지막이 도착하며 자신에 대한 주의를 끄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순히 정서적인 거부감으로도 잦은 지각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장소나 모임을 원치 않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회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출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곳이 나에게 이롭지 않다는 생각으로 인해 더 이른 시각에 도착하여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하지 않는다. 이는 위에 이유들에 비해 자연스럽고 건강한 현상이라고 한다. 다만 옳은 행동인가에 대해서는 따져볼 일이다.
사실 습관적인 지각으로 인한 고통은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늘 지각을 하는 당사자의 고통도 만만치 않다.
늘 늦는다는 건, 늘 시간에 쫓긴다는 의미다. '현재'보다 과거에서 움직이므로 선택의 폭이 좁다. 이렇게 지연된 선택들은 더 많은 책임으로 누적되어 기다린다. 점점 더 서둘러야 '현재'를 좇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서두르다 보니 중요한 걸 놓치게 되고, 이는 다시 불필요한 시간을 사용하는 계기를 만든다. 제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이 연속적인 끈들을 몸에 칭칭 감고 고군분투해야 한다.
그렇게 어렵사리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할 일은 사과다. 누군가는 화를 감추고, 누군가를 짜증을 그대로 드러낼 것이다. 불편한 상황으로 시작하는 순간이 적지 않다. 딱히 맘이 편치는 않은 일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현재'와 어깨를 나란히, 혹은 그에 앞서 움직이려면, 가장 먼저 스스로에게 "늦은 이유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질문하고 솔직하게 답하는 게 필요하다. 그 질문 끝에서 왜 늘 늦을 수밖에 없는지 찾을 수 있다. 한 예시를 보자.
얼마 전까지 40대 남성과 함께 일했는데, 그는 항상 미팅에 10분에서 15분 정도 늦었습니다. 반복되는 지각에 화가 났던 저는 그에게 자신의 사무실에서 맨해튼 중심에 있는 저희 회사까지 오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지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사무실은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5분 거리입니다. 지하철로 이 근처 역까지는 10분이 걸립니다. 이곳은 역에서 한 블록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요. 저는 열차를 기다리는 시간을 고려해서 5분의 여유 시간을 잡습니다. 그래서 약속시간 20분 전에는 나가려고 노력해요."
그의 계산이 합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랬다면 반복적인 지각이 없었을 것이다.
첫 번째 맹점은 시간이 소요될만한 다른 변수들을 계산에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도착할 회사 건물은 22층이었고, 정직원이 아니므로 로비에서 방문자 등록을 해야 한다. 엘리베이터 수가 적어 대기 줄이 생기는 일이 잦다. 상황에 따라 5분에서 많게는 10분까지 시간을 뺏길 수 있다. 심지어 그의 사무실도 고층에 있다. 이 말은 그의 책상에서 1층까지 가는 시간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 블록'이라고 표현하고 따로 시간을 측정하지 않았던 지하철과 도착지의 거리도 걸음에 따라 약 3~5분이 소요된다.
요목조목 따지고 들어 이 남자의 숨통을 조이려는 게 아니다. 정시에 맞춰 움직이고 싶다면 시간 계산을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한두 번이야 그럴 수 있지만, 그는 여러 번의 방문을 통해 이런 변수들이 있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시간 계산에는 포함시키지 않은 셈이다. 내 계산 밖에서 시간을 뺏어가는 상황들을 알아챈다면, 그에 맞는 더 중요한 선택들을 할 수 있다. 그만큼 약속 시간에 늦을 가능성은 낮아진다.
두 번째 맹점은 '약속 시간 20분에 떠나기 위해 노력한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다. 20분이라는 시간으로도 충분하지 않은데 그 출발 시간조차도 스스로에게 여지를 둔다. '떠나기 위해 노력한다'라는 말과 '떠나야 한다'라고 말하는 건 다르다. 인간은 의외로 산만하거나 멈춰있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시간을 보려고 들었던 폰에서 나도 모르게 주요 인물의 SNS의 피드를 보게 될 수 있다. 그렇게 예상치 못했던 소식에 놀라서 한참을 들여다볼지도 모를 일이다.
세 번째 맹점은 미련이다. 하던 일을 '마지막으로, 진짜 마지막으로 여기까지만' 끝내고 출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앞선 선택이나 행위에 대한 미련이 남아 멈추지 못하고 지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만약 약속 장소로 출발하기 전 보고서를 마무리 짓거나, 메일에 답장을 하거나, 한 통의 빨래라도 더 정리하고 싶다면, 차라리 약속 장소로 이동하는 중간이나 도착하여 할 수 있는 업무들을 챙긴 후 빠르게 떠나는 방법이 있다. 미리 도착하여 그 일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비록 실명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실존화된 인물을 만든 까닭은 나에게 시간 강박이 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내 시간은 내 컨디션과 상황에 따라 마음대로 쓴다. 다만 타인과의 약속에 대한 강박이 있다. 그 시간은 온전한 내 것이 아니어서다. 똑같이 하루를 24시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것이다.
비단 지인과의 약속만이 다가 아니다. 집에서 회사까지 소요시간 약 1시간 40분. 그럼에도 30분 일찍 회사에 도착한다. 거리가 멀다 보니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하여 미리 움직이는 것. 지하철이 침수되고 도로가 마비되는 사태가 아닌 이상 언제나 늦지 않고 도착할 수 있다. 효율 기반의 업무를 추구하는 요즘 스타일에 비해, 일면 미련하고 ‘옛’스러운 태도라는 것을 안다. 그 방식이 꼭 옳다는 게 아니다. 내가 그렇다. 강박이 있다.
특히 연례행사 등 중요한 일정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빨리 도착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구석 어딘가에 차를 세워두거나, 도착 장소로부터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시간을 보낸다. 근처에 있다가 우연히 애매모호하게 가까운 사람을 만나면 인사도 하고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몇 시에 오셨어요?"라는 질문에도 답해야 한다. 그래서 닌자처럼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가 5분 전쯤, 서서히 약속 장소로 다가간다.
경수와 선주의 행동이 누군가에겐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할 때면 항상 먼저 도착한 일행이 있었을 것이다. 늘 마지막 빈자리를 채우기 때문에 앞서 기다리던 사람들의 시간을 알 수 없다. 반사적으로 미안한 마음이야 들겠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을 헤아리긴 어렵다. 늘 겪어보지 않았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