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진화의 줄기를 따라온 80년생의 독특함
영화 <식객>에는 ‘우중거’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군시절 먹었던 라면의 맛을 잊을 수 없다. 실컷 맞은 후 화장실에서 울고 있는데 선임이 반합에 끓여준 라면이었다. 그 맛의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라면 천국>이라는 책을 항시 소지하고 다니며 온갖 시도를 마다하지 않는다.
우중거는 결국 당시의 선임을 찾아간다. 비법을 얻기 위해 하루 종일 그의 밭일을 돕는다. 그런 다음 경건한 마음으로 예전의 그 군복을 입는다. 선임에게 개 패듯 패 달라고 한다. 선임은 그의 요청에 따라 신나게 팬 후 반합에 라면을 끓여준다. 우중거는 욱신거리는 몸으로 큰 기대와 함께 라면을 먹는다.
하지만 라면은 당시의 그 맛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깨달았다. 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에게 궁극의 맛을 선사했던 건 라면의 절대적인 맛이 아닌 당시의 상황이었다. 처절하고 서러웠던 이등병 시절의 처지. 이제 그는 이등병이 아니다. 더 나은 현재는 당시의 제약이 만들었던 맛의 가치를 잃게 만들었다. 당시의 군복을 다시 입는다고 해도 그 맛을 얻을 수 없다.
여러 편에 걸쳐서 소통 수단에 대해 다루었다. 본디 하나의 글로 쓰려던 것인데 길어져버렸다. (믿기진 않겠지만 빼고 덜고 깎아내고 꽉 짜고 아끼고 줄이고 줄이고 줄인 글이었다…) 그만큼 소통 수단은 나를 비롯한 80년생이 가장 직접적이고 인상적으로 겪었던 변화인 것 같다. 원격 대화의 시대부터 일대일 소통의 시대, 그리고 삐삐를 지나, 누구나 전화기를 소유하는 시대까지, 40여 년의 시간 동안 거대한 진화의 줄기를 따라온 것이다.
그 모든 시대는 실로 놀라운 세계다. 전화 한 통으로 멀리 떨어진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그것이 가능해지기 전까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마법이었다. 이젠 손 안에서 전 세계의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고, 이것을 하는 데 있어서 시공간의 제약은 사라졌다. 내가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얼굴을 보면서 대화하는 것조차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며, 나 역시 그간의 혜택을 풍족하게 누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에야 보이는 것들도 있는 것 같다. 더 나은 현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여러 번의 소통의 시대가 남긴 것
전화기가 가져온 대화의 편리함 뒤에는 손으로 쓴 편지들이 있다. 손 끝으로 눌러 담던 감성과 기다림의 설렘은 그 고유의 것이다. 집 전화기 시절엔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음성 메시지를 남기거나 전화를 받은 누군가에게 메모를 남겼다. 삐삐도 그렇다. 이전 세상엔 늘 더 긴 기다림이 있었고, 그 기다림은 인간관계를 보다 신중하고 소중하게 만들었다.
즉각적이고 편리한 소통의 세상이 오면서 기다림이 갖는 가치는 희미해졌다. 휴대폰이 가져온 자유와 독립은 홀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늘렸다. SNS나 톡 어플로 서로의 소식을 확인할 수 있으니 직접 대면의 필요성이 낮아졌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도 점차 줄어들었다. 오늘 우리는, 서로의 단편적인 모습을 공유하며 살고 있다.
각오와 경각심을 잔뜩 담은 듯 썼지만, 사실 이런 현상들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화카드를 들고 앞사람의 순서를 기다려야 했던 시절부터 살아온 '내가' 바라보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세대는 그 방식과 속도에 맞게 살아갈 것이다. 이들에게 직접 대면하는 방식의 소통은 내 시절의 그것과 전혀 다른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
80년생의 독특함
유년기의 시작을 코로나로 보낸, 가장 최근의 인류인 알파 세대는(2010년대생) 언택트 수업을 처음으로 진행했던 초등학생이다. 이들은 다양한 모임을 온라인으로 하는 게 어색하지 않다. 주제가 있는 대화는 물론 파자마 파티 같은 것들도 영상 통화로 진행한다. 휴대폰의 온라인 게임이나 메타버스 공간에 빠르게 적응하며 그것을 즐길 줄 안다. 앞으로는 XR(확장현실)이 이전보다 빠르게 발전할 거라고 한다. 소통의 대상은 더 생생하게 눈앞에 존재하게 될 것이고, 알파 세대는 이 역시 꽤 쉽게 받아들일 것이다.
반면에 80년생들은 그 과정에 대해 크고 작은 걱정을 더할 것이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느끼고 있다. 디지털 속 상대방이 즉각적이고 생생해질수록 직접 만나기 위한 유인은 낮아진다는 걸.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지난 시절을 통해 배운 가치들이 여전히 내면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제한적인 상황에서의 인내와 기다림, 직접 대면하는 시간의 중요성 같은 것들 말이다.
이렇게 보면 80년생들이 괜한 걱정을 더해 적응을 늦추는 것 같지만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점이 있다. 사실 이들은 지난 시간 동안 가장 많은 소통 도구를 직접적으로 경험했다. 그리고 당시의 세대 중에서 가장 빠르게 그것들을 적응해 왔다. 이와 같은 시간들은 80년생들에게 독특한 특징을 남겼다. 과거의 방식들에 대한 가치를 중요히 여기면서도 새로운 문물을 빠르고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이런 능력은 새롭게 등장하는 도구들의 강점을 취하면서도 소통의 본질적인 의미는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다. 사람 간의 깊은 관계와 기술적인 진화 사이에서 그 가치의 균형을 균형을 유지하는 긍정적 영향력을 가질 것이다. 다음 세대들과도 밀접하게 닿아서 소통할 수 있다. 어쩌면 90년생보다 00년생을 더 잘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중거의 라면 맛처럼, 그리운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의 가치는 오늘의 시간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새로운 세상으로의 유산으로 스며든다. 그러니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80년생이라면 한 번쯤 기분을 냈으면 한다. 그 시대로부터 존재해 온 것만으로 갖는 긍정적 영향력이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