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떻게 작아졌을까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놀다 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아침에 눈뜨며 마을 앞 공터에 모여
매일 만나는 그 친구들
- <보물> 자전거 탄 풍경
초등학생이 되던 해에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담이 없고 네모 반듯하며 과묵한 그곳은 나를 긴장하게 했다. 두껍게 솟아있는 건물들, 그 사이로 놀이터가 보였다.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던 그곳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잔디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던 것 같다. 나의 어린 시절은 놀이터라는 작은 우주에서 시작되었다.
그때 그 놀이터
초등학생으로서의 책무를 끝낸 후, 놀이터로 달려가면서 나의 진짜 하루는 시작되곤 했다. 친구와 함께 갈 때도 있었지만 혼자 간 적도 많다. 들어갈 때는 혼자이지만 나올 때는 많은 친구와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뺑뺑이(라고 밖에 용어가 기억되지 않는 그 놀이기구)를 향한다. 케이크 모양의 원판이 팽이처럼 빠르게 회전하는 그것에는 늘 많은 아이들이 달라붙어서 원심력과의 한판 대결을 펼치고 있다. 뺑뺑이가 회전한다는 건 반드시 누군가 동력을 만들고 있다는 의미다. 손잡이를 잡고 같이 뛰면서 돌리든, 혹은 두 발을 모래바닥에 고정한 채 손으로 밀어서 돌리든, 그 자체도 놀이의 일부였다. 그래서 뺑뺑이는 멈추지 않고 돌았다. 그것이 멈추는 순간은 누군가 탑승이나 하차를 원하는 순간뿐이다. 이따금 회전 중에 날아서 하차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서 뺑뺑이는 일종의 부킹스폿이었다. 강한 회전의 스릴을 공유하면서 유대감이 생기고, 내 차례다 싶으면 내려서 그것을 돌린다. 상부상조의 미덕까지 나누는 셈. 그렇게 뺑뺑이 멤버들은 서로의 얼굴을 익히면서 그날 놀이터의 파티원이 된다. (사실 그중 대부분이 어제 그리고 그제도 봤던 얼굴들이다.) 구성된 파티원들과 미끄럼틀에서 그네로 옮기며, 혹은 놀이터 전체를 무대로 쫓고 쫓긴다.
미끄럼틀에서는 계단을 올라 경사면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행위 외에도 많은 놀이를 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눈을 (사실상 거의 간헐적으로) 감고 다가오는 술래를 피해 지정한 장소에 도달해야 하는 '탈출' 게임이 있다. 아이들은 미끄럼틀의 이곳저곳에 달라붙으며 거의 곡예에 가까운 묘기를 펼친다. 모두가 술래에게 잡혔을 때, 간신히 술래를 피해 탈출에 성공했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영화 <어벤저스>의 히어로들 부럽지 않다.
단체 놀이 외에 '고운 모래 제조'와 같은 생산적 활동도 가능하다. 미끄럼틀의 금속 경사면에 모래를 뿌린다. 손으로 그 표면을 퉁퉁퉁 친다. 그러면 무거운 입자는 모두 아래로 미끄러지고 고운 것들만이 남는다. 그것들을 손으로 긁어모은다. 모아서 어떤 용도로 썼는지, 애초에 왜 그것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 장인이 된 것 같은 진지함으로 임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묻지도 않은) 그 비법을 알려줄 때는 은근 허세도 부렸다. “야, 너 고운 모래 만들 줄 알아?"
그네에서도 앉아서 타기, 서서 타기, 누워 타기, 멀리 뛰기와 더불어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이를테면 '바이킹 놀이'가 그렇다. 두 사람이 각자의 그네에서 서로에게 발을 뻗은 후 꽉 붙잡으면 두 개의 그네가 하나의 큰 그네가 된다. 그걸 다른 친구가 밀어주는 것이다. 하늘 높이 치솟을 때의 스릴은 실로 바이킹이 따로 없었다. 바이킹에 비해 좀 더 '뭔 사달이 곧 일어날 것 같은' 스릴에 가까웠는데, 왜냐하면 만약 서로가 굳건히 잡고 있던 다리를 놓는 순간 각자의 그네는 방향을 잃고 사방으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운이 안 좋은 누군가는 옆의 기둥에 부딪히며 잠시 조상님을 만날 수도 있다.
꼭 놀이터 내부가 아니어도 놀이는 넘쳐났다. 가령 주차장의 자동차 주차선은 피구 경기장으로 쓰였다. 각 팀이 두 칸 정도를 차지하고 (불꽃 마크가 그려져 있는) 공을 던지는 것이다. 그보다 더 많은 칸을 사용하는 규모의 게임도 있었다. 술래팀은 주차선의 세로 라인에 각자 한 명씩 서고, 다른 팀은 라인에 선 술래들을 피해 마지막 칸까지 도달하는 식이다. 주차선의 본래 용도는 주차 자리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당시엔 마치 우리를 위해 어른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준 것만 같았다.
하나의 놀이터에서 이토록 많은 놀이들이 파생된 이유는 내가 살던 동네의 놀이터가 작은 규모의 보편형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놀이터는 통상적으로 미끄럼틀, 그네 2개, 시소 2개, 뺑뺑이 정도로 구성돼 있다. 미끄럼틀도 하나의 계단이 하나의 경사면으로 이어지는 단출한 형태였다. 그래서 더 재밌는 놀이를 위해 더 다양하고 창의적이 시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놀이터가 저마다 다양한 형태와 규모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동네의 놀이터에는 계단과 미끄럼틀만 여러 개가 달린 거대한 복합 기구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더 넓어질수록 더 많은 놀이를 할 수 있었기에, 나는 일종의 놀이터 탐험을 다녔다.
어느 날 내 곁으로 온 자전거는 이러한 탐험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페달만 돌리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 이마선과 목덜미의 땀을 식혀주던 바람의 촉감이 기억난다. 나는 이곳저곳 냄새를 맡는 강아지처럼 궁금한 곳들을 종횡무진 누볐다. 그렇게 나의 놀이터는, 점점 더 커졌다.
다시 만난, 작아진 놀이터
성인이 되고도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의 집들이를 가다가 아파트 옆에 있는 놀이터를 발견했다. 그것이 평소와 달리 눈에 들어온 이유는 낯선 바닥 때문이었다. 예전의 모래 바닥이 사라지고 우레탄 소재로 바뀌어 있었다. 바뀐 이유를 곱씹었다. 우레탄 바닥은 모래 바닥의 위생 문제는 물론 유지 관리 비용도 없애주는 경제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그곳으로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의 입장에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모래 바닥은 놀이터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다. 하얀 표면을 파내면 짙은 속내를 드러내는 그 녀석들은, 방금 결혼한 후 10년이 지난 부부의 소꿉놀이 반찬이 되기도 하고, 과학자의 미간으로 이런저런 실험을 하는 아이의 화학 성분도 된다. 물건을 숨겨주기도, 함정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때론 누군가와의 말다툼에 종지부를 찍고 그것을 몸싸움으로 전환시키는 신호탄 역할도 했다. 모래 바닥은, 아무리 파도 끝이 쉬이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이면서 언제 뛰어들어도 푹신하게 반겨준 구름이었다. '고운 모래 만들기'는 놀이터 일정 중 제일 마지막에 하는, 매우 아끼는 놀이였다.
놀이터의 우레탄 바닥은 나에게 큰 변화였지만, 사실 놀이터가 겪은 다른 변화들에 비하면 대단한 게 아니다. 놀이터는 긴 시간을 거듭하면서 작아졌다. 그 물리적인 크기뿐만 아니라, 놀이 공간으로서의 의미까지, 모든 게 작아진 것이다.
왜, 어떻게 작아졌을까
1990년대생부터 놀이터의 의미가 실외에서 실내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이 초등학생이 되던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 한국에서는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며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때 놀이공간의 끝판왕 중 하나인 PC방이 대중화되었다. PC방에서 제공하는 고사양의 컴퓨터와 빠른 인터넷 환경 덕에 동시 접속을 지원하는 게임들이 늘어났다. 게다가 개인용 컴퓨터(PC)의 보급도 확대됐다. 인터넷 접속 기반의 놀이 문화가 늘어난 시대다.
그 시기는 티브이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디지털 방송과 스트리밍 서비스가 본격화된 것이다. 이로 인해 집에서 접근할 수 있는 콘텐츠가 엄청나게 다양해졌고 만화나 스포츠처럼 특정 성격의 콘텐츠만 지속적으로 볼 수 있는 채널도 생겼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컴퓨터나 TV로 원하는 것들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세상. 실내 활동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생의 놀이터는 스마트폰의 대중화와 맞물려 있다. 아이폰의 등장으로 스마트폰이 본격화된 2009년은 이들의 초등학생 시기와 딱 맞물려 있다. 2000년대생에게 스마트폰과 태블릿은 단순한 기기가 아니라, 새로운 놀이의 장이었다. 그 작은 기기에서 정말이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놀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포켓몬GO>처럼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한 증강 현실 게임들이 새로운 놀이 형태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맘 때쯤 다소 신기한 놀이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실내놀이터'다. 놀이터인데 실내에 있고, 실외 놀이터보다 안전한데 비용이 발생한다. 돈 내고 노는 놀이터라니, 밖에 있던 걸 실내로 옮겼을 뿐인데 굳이 돈을 내고 이용하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놀이터의 고객이 아이가 아닌 부모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보다 안전하고 통제된, 날씨나 미세먼지 등의 환경적 요인에 구애받지 않는 공간에서 아이들을 놀게 하고 싶은 그 '니즈'를 누군가 파악한 것이다.
2010년대생의 놀이터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완전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로, 그 놀이 문화가 가상의 세계로 옮겨졌다. 제약이 없는 디지털 공간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고 그곳에 방문한 친구와 소통한다. 함께 힘을 모아 적을 처치하기도 한다. 겉보기엔 작은 네모 공간만을 보고 있지만, 그 안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의 세계가 있다.
티브이나 컴퓨터에 비해 가벼워진 놀이기구는 오히려 이들을 집 밖으로 이끌었다. 예컨대 실외 놀이터에 가보면 미끄럼틀이 아닌 벤치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스마트폰이나 친구의 것을 보면서 몰입하고 있는데, 그들이 보고 있는 세상을 시각화한다면 아마도 놀이터 아래에 수십 층 규모의 롯데월드가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실내 놀이터도 좀 더 진화했다.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님들도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카페 형태의 놀이 공간이 늘어났고, 놀이 공간 곳곳에 아이들을 케어하는 상시 인력도 늘었다. 또한 실내에서 배우는 운동들도 늘었다. 배드민턴, 축구, 달리기 등, 나에겐 외부 공간 어디에서든 할 수 있었던 것을 이제 돈을 내고 배운다.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크기
내가 우레탄 바닥을 보면서 느꼈던 서운함은 과거의 자유로운 놀이터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의 놀이터는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설계되었지만, 과거 모래 바닥에서의 무한한 상상력과 모험의 기회는 다소 줄어든 듯하다. 그렇게, 내가 기억하는 놀이터는 더 작아졌다.
하지만 시대에 맞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레탄이 어린이들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현대 사회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인 것처럼, 이제 아이들은 물리적 한계를 넘어 디지털 세계에서 새로운 놀이를 경험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는 또 다른 창조와 상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내가 기억하는 놀이터는 작아졌지만, 어쩌면 더 크고 대단한 놀이터가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