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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Apr 01. 2024

더 이상 음악을 들을 수 없다

늘어지지 않는 테이프


문득 음악을 듣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출근길이었다. 두 개의 에어팟은 떨어지지 않으려 양쪽 귓구멍에 매달려 있었고, 그리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집을 나서면서 가장 먼저 이 녀석들을 귀에 꽂는다. 그로부터 30분이 지나서야 음악이 재생되지 않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그렇다. 음악을 틀어는 두는데 그 자체에 주의를 기울인다거나 음미하는 순간이 없다. ‘음악만을 듣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어폰은 그저 주변의 소음을 막아서 내가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이유가 뭘까. 늙어서인지, 더 중헌 것들이 생겨버린 건지, 혹은 모든 게 무뎌진 건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장면으로 넘어와 버린 것 같다.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노래제목처럼,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더 화려하고 많은 선택이 있는 세상으로 말이다.


하지만 기억 속에는 존재한다. 음악으로 모든 게 채워지던 시절이 있었다. 외출을 하기 전, 카세트테이프 중에서 동행할 것들을 두어 개 선별한다. 어떤 것을 고르는 가에 따라 오늘이 달라질 것이다. 두 녀석 중 하나는 워크맨에 넣고 하나는 가방에 보관한다. '올 때는 저걸로 들어야지.' 그렇게 첫 곡과 함께 집을 나설 때의 설렘이, 분명히 기억 속에 있다.


그런데 좀 묘하다. 이 기억들이 마치 나의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처럼 먼 곳에 있는 느낌이다. 오늘 몇 가지를 다시 나의 기억으로 당겨보려 한다. 조금이라도 더 곁에 두려는 마음이다.



그 첫 번째는 카세트테이프.


이것을 얻으려면 먼저 손바닥 크기의 작고 투명한 상자를 열어야 한다. 가리비의 입을 벌리듯 손끝에 미세한 힘을 줘서 열 수 있다. 상자의 안에는 빳빳한 종이와 카세트테이프가 들어있는데, 카세트테이프에는 음악이 담겨 있고, 종이에는 그것들에 대한 소개가 적혀있다.


이 상자가 은근 특이하다. 그것이 등장하기 전에도, 그 이후로도 일상의 다른 장면에서는 사용되지 않을 매우 신기한 형태를 갖고 있어서다. 내벽의 한쪽 면에는 카세트를 꽂을 수 있도록 네모 반듯한 홈이 있고, 다른 면에는 테이프가 돌지 않도록 고정하는 돌기가 있다. 그 양쪽 면중 어느 게 뚜껑이고 어느 게 본체인지는 아직도 미스터리.



이제 카세트테이프를 꺼내보자. 네모난 몸통의 가운데로 구멍이 두 개 뚫려 있는데 마치 녀석의 눈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 가운데로 투명하게 내부 장기가 보인다. 검은색의 필름이 양쪽 눈을 중심으로 감겨 있다. 처음으로 상자에서 나온 녀석이라면 필름이 한쪽 눈에만 감겨 있을 것이다.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하면 서서히 반대쪽 눈으로 이동하며 음악을 들려준다.


놀라운 곳은 발바닥이다. 마치 신발 신는 걸 깜빡한 듯 숭숭 뚫려 있고, 양쪽 눈을 연결하는 필름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내부 장기로부터 나온 것이니 굉장히 예민하고 중요한 부분 같은데 이렇게 노출돼 있어도 되는 건가 싶다. 맘먹고 잡아 꺼내면 끝없이 나온다. 만약 카세트테이프의 용도를 모르는 사람이 이 장면을 본다면 꽤 기괴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카세트테이프. 뭔가 어설프고 연약해 보이는 이 네모 녀석은, 1970년대에 등장하여 약 30년 간 인류의 일상에 머물렀던 대단한 존재다. 그것은 우리를 웃게 했고 울리기도 했다. 이별의 아픔을 치료해 주었고, 죽음의 위기를 이겨내게도 해주었다. 카세트테이프는 우리의 모든 감각 세포를 이전보다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아마 현시대의 청소년에게 카세트테이프에 대해 얘기하면 "아~ 그거 알아요"라고 답할 것이다. “그거 레트로 감성템으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거잖아요?”라면서 오히려 친밀감을 표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세트테이프는 이미지로만 떠올리는 것과 실제 경험의 간극이 큰 물건 중 하나다.


한 번은 카세트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하지만 한 번도 그것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것에 대한 경험을 나눈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대화는 예상보다 더 길어졌다. 전제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상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음, 내가 듣고 싶은 노래가 있어. 지금 1번 노래를 듣고 있는데 4번 노래를 듣고 싶은 거야. 그러면 바로 들을 수 있는 게 아니고, 테이프를 빨리 감아서 그 지점까지 이동해야 돼. 테이프를 빨리 감을 때는 노래가 재생되지 않아. 그래서 내가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중간중간 멈추고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는 거야."


복잡했던 내 설명에 비해 돌아온 대답은 간결했다. "왜 그래야 하는데요? 검색 기능이 없어요?"

 

(왜 그래야 하냐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야...)


지금은 아날로그 감성 소환을 위한 영매가 됐지만,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던 당시의 카세트는 전혀 불편한 도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카세트를 처음 접했을 때는 기존의 오디오 수단인 LP가 가진 취약성을 해결한 획기적인 아이템이었다. 작고, 가볍고, 관리가 쉽고, 깨지지도 않고, 더 많은 장소에서 재생할 수 있었다. 심지어 녹음도 가능하다!



BGM처럼 즐기도록 해, 오토리버스


카세트테이프가 일상의 중요한 문물이 된 만큼, 그것을 보다 쉽고 편하게 즐기기 위한 시도들이 있었다. 그중 가려운 부분을 가장 잘 긁어준 변화는 오토리버스다.


한 부자가 카세트테이프를 구경하고 있다.

- 아들: 아버지, 이거 무슨 기능이라예?
- 아버지: 웃도리 벗어!
- 아들: (말없이 웃도리를 벗는다)
- 아버지: 아니, 그게 아이고! 오토리버스!

(이 유머에 입꼬리가 올라갔거나 잠시 추억이 떠올랐다면, 당신은 나의 친구, 혹은 누님, 혹은 형님, 아니면 후배님... 반갑습니다.)


뷔페에 있는 빵 굽는 기계를 떠올려보자. 한쪽면만을 익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양쪽을 모두 굽고 싶다면 반대면을 기준으로 트레일러를 한 번 더 타야 한다. 테이프도 마찬가지다. 양면에서 각기 다른 음악을 재생시킬 수 있기에 A면의 재생이 끝나면 B면으로 뒤집어 넣어야 한다. 한 면당 30분에서 많게는 45분까지 노래를 재생시킬 수 있는데, 만약 노래를 틀어두고 다른 일을 한다면 이 시간마다 테이프를 꺼낸 후 뒤집어서 다시 넣어야 한다는 의미다.


오토리버스(auto-reverse)는 이 절차를 없애줬다. A면이 끝나면 자동으로 B면을 재생시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편한가. 초반에는 테이프를 물리적으로 뒤집는 모델도 있었는데, 이내 플레이어 내부의 재생 방향을 반대로 회전시키는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오토리버스의 도입으로 인해 (30분 단위로 개입해야 했던 예전에 비해) 음악을 보다 수동적으로, 일상생활의 배경처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일종의 BGM(배경음악, Back Ground Music) 역할이 더 강해진 것이다. 오토리버스를 처음 접했을 때, 음악을 들으며 잠에 들었는데, 깨어났을 때도 계속 재생되고 있어서 놀랐었다.



취향을 한 곳으로, 더블 데크


더블 데크는 카세트테이프를 두 곳에 넣을 수 있는 장치를 의미한다. 주로 전축이나 어느 정도의 규모가 있는 플레이어에 탑재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한쪽은 재생만 되고 다른 쪽은 녹음 기능까지 지원한다. 그전까지는 녹음을 하기 위해 음악을 재생한 후 그 스피커에 다른 플레이어의 마이크를 갖다 대는 원시적인 시도를 했었다. 그런데 더블데크로 인해 한 테이프의 음악을 그대로 다른 테이프에 복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장치가 갖다 준 혜택은 그저 복사가 아니었다. 이전엔 여러 테이프에서 내가 더 듣고 싶은 것들만 모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블 데크 덕에 원하는 노래들을 한 테이프에 모을 수 있게 됐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카세트로도 일종의 '내 재생목록'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녹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때를 놓치면 들을 수 없는 라디오 방송을 녹음해 두고 다신 듣곤 했다. 아마 나의 것이 아니더라도, 당시엔 별밤을 담았던 테이프들이 꽤 많았을 것이다. 밤하늘이 아닌, 95.9㎒의 별밤.



그곳이 어디든 나만의 씬, 워크맨


카세트 플레이어는 텔레비전이나 전자레인지처럼 가전제품에 속했다. 그만큼 컸다. 대부분의 제품들이 그렇듯 이것 역시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점차 작아졌고, 어느 날 집 밖으로 들고나갈 수 있을 정도로 가볍고 작은 크기의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그 이름은 '워크맨'.


사실 워크맨(Walkman)은 소니(Sony)가 1979년에 출시한 휴대용 오디오 카세트 플레이어의 브랜드 이름이다. '워크(Walk)'와 '맨(Man)'을 결합하여, 걸으면서(즉, 워킹을 하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이후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뜻하는 일반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워크맨의 등장은 카세트와 관련된 혁신들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제한된 공간에서 스피커로 음악을 듣던 방식에서 벗어나 각자 귀에 이어폰을 착용하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는 순간, 그들은 어디에 있든 자신만의 음악 감상실을 갖게 된다. 모두에게 똑같이 다가오던 주변 환경이, 개인의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통한 실연의 미장센이 되며, 또 다른 이에게는 신나는 파티의 현장이 된다.


그래서 거리엔 다양한 형태의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머리에 붙이고 고개를 까딱거리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나 역시 그랬다. 딱히 까딱거리진 못했지만, 마치 내가 영화의 한 장면에 있는 것처럼 발끝에 슬쩍 리듬을 실곤 했다.



늘어지지 않는 테이프


사실 카세트테이프는 기존의 LP에 비해 모든 면에서 훌륭하지 않았다. 음질은 오히려 떨어지는 편이었고, 오래 들으면 손상되는 위험도 있다. 무엇보다 불편한 건 듣고 싶은 곡으로의 이동이다. 원하는 부분에 카트리지만 놓으면 바로 들을 수 있었던 LP판에 비해, 카세트는 현재 위치에서 그 음악이 있는 위치까지 물리적인 시간을 들여 이동해야 했다.


심지어 테이프가 플레이어에 끼어 문제가 발생하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그 상태에서 아무 생각 없이 카세트를 꺼내면 큰일 난다. 검은 테이프가 치즈처럼 주우우우우욱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손으로 직접 말아서 넣어야 한다. 카세트의 중앙 홈(앞의 묘사에서 눈 부분)에 연필을 꽂고 열심히 돌려서 말이다.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는 덕에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맥가이버 3급 자격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테이프를 정교하게 복구해도 한번 찝혔거나 늘어난 부분은 사운드에 뭔가 어색한 끊김을 남긴다는 것이다. 심할 경우 그 부분만 느리게 재생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신기하게도 이 문제 지점이 마치 곡의 일부인 것처럼 적응하게 된다. 시간이 더 흐르면 오히려 원곡이 어색하게 들리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MP3의 등장과 함께 역사의 유물로 사라진 카세트테이프. 이제 액정 터치 한 두 번이면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더 이상 테이프는 늘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여전히 이렇게 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카세트테이프를 사용하던 시절의 크고 작은 불편 속에서, 늘어진 테이프로, 어색한 끊김과 함께, 나는 바야흐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로지 음악 안에 몸을 풍덩 담그고 흘러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그때의 소리들이 그립다. 플레이어에서 재생 버튼을 누를 때의 딸깍 소리, 곧 노래가 나올 듯 공간감을 만들던 잡음, 테이프가 모두 재생되어 이면이 시작되기까지의 기계음들. 불규칙한 듯 하나의 리듬이었던 그것들. 원곡과 달라지면서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주던, 음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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