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무대, 새로운 검증
언젠가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2(이하 스우파2)>를 보다가 ‘리아킴’이라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스우파2는 여러 댄스 팀이 경연을 통해 최고를 가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리아킴은 그중 팀 '원밀리언‘의 수장으로 등장했다.
당시 그녀의 팀은 전체 팀 중에서 최하위권에 속해있었다. 뿐만 아니라 리더인 리아킴도 약자 지목 배틀이나 메인 댄서 선정 등의 개인전에서 딱히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다. 결국 다음 경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리아킴은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다.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다.
"제대로 보여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무것도 증명해 내지 못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나는 그 말이 조금 이상했다. 사실 리아킴이라는 인물은 보여주고 증명한 게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그녀는 25년 차 댄서이자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안무가다. 아래는 리아킴의 업적 일부를 나열한 것이다.
스트릿 씬과 코레오 씬 모두에서 정상에 오른 유일무이한 댄서
세계 대회에서 팝핀 우승, 락킹 준우승을 할 정도로 실력자
SM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로엔엔터테인먼트에서의 트레이닝 이력
소녀시대, 트와이스, 선미, 이효리, 마마무 등 수많은 가수들의 히트 안무 창작
대한민국 최대 댄스팀인 원밀리언의 수장
원밀리언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는 2,630만 명(이중 외국인 비율이 97%일 정도로 세계적인 인지도)
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 맞나 싶을 정도의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그녀는 왜 제대로 보여준 게 없다는 말을 했을까. 리아킴이 느꼈던 부담감의 원천을 따져보는 과정에서, 나는 그녀에게 꽤나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기에 최초의 의문이 시작된 것이다.
어째서지? 그녀가 84년생이어서? 아닌데. 설마 내가 춤에 소질이 있었던가. 댄서를 꿈꿨던 적이 있나.
그렇지 않다. 만약 지금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고 누군가 우연히 그 모습을 본다면 재빠르게 달려와 나를 부축할 것이다. 뇌 어딘가 문제가 생긴 듯 휘청거리는 모습으로 보였을 테니 말이다. 자칫 흥이라도 오르면 더 큰일이다. 한 여름 아스팔트에 맨발로 선 듯 발끝으로 이곳저곳을 터치하는 그 모습은 정말이지, '꼴사납다'라는 표현을 가장 잘 설명할 것이다. 어쩌면 현존 80억 인구 중 한두 명쯤은 그것을 예술적인 몸동작으로 볼지 모르겠다. (그 정도 희망은 괜찮잖아!) 허나 안타깝게도 그 외 대부분의 정상인에게 그것은 동작이 아닌 부림으로 보일 것이다. 몸부림. 나를 사랑하시는 부모님께서 보셔도 같다. 그것은, 몸부림이 맞다.
따라서 내가 리아킴의 부담감에 공감하는 이유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음에도, 충분히 많은 산을 넘어왔음에도 새로운 벽을 또 넘어야 하는 상황에 있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겪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새로운 무대, 새로운 검증
사회의 구성원 관점에서, 나이를 먹으며 깨닫게 되는 한 가지는 사람들이 나를 점점 더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애초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요는, 관심 없음에 대한 서운함이 아니라 나의 지난 시간이 점차 기억되지 않는 것에 있다. 주변은 점점 더 젊고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지고 그들은 과거의 나를 모른다. 혹여 언젠가 쌓았던 업적이 있다고 한들 그것을 나라는 사람과 연결하며 의미 있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진 괜찮다. 문제는 계속 새로운 틀에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로부터 왔으며 AI가 빠르게 인간을 대체하고 있는 현재에 도달하기까지 수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그 과정에서 즐겼던 순간만큼 적응하고 생존해야 했던 위기도 많았다. 이제 예전보다 더 빠르게 변하고 더 자주 회전하는 상황 속에서 일을 하고 있다. 시니어의 위치로 존재하지만 왕년의 업적으로 뻐길 수 없고, 새로운 틀에선 예전처럼 큰 에너지가 있어야 승부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점차 이런 환경에서 제 역할을 하기 버거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주로 존재하는 사회, 그러니까 회사에서는 나를 좋게 보고 있다. 감사하게도 늘 내가 이룬 것 이상의 평가를 받은 것 같다. 어쩌면 이런 고민 없이 일을 해도 좋은 평가로부터 크게 멀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심지어 이런 평가는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왜 평가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왜 계속 더 증명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일까. 마치 이미 쌓은 업적이 많음에도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해 고생을 자처하는 리아킴처럼. (다시 말하지만 내 춤은 몸부림에 속하며 나를 이 멋진 댄서에 빗댈 생각은 없다. 주제의 전개를 위한 비교이니 너그러이 넘어가주실 거죠...!? ㅠ)
누군가는 나의 이런 고민 자체를 과하다고 여길 것이다. 맞다. 내가 평가 자체에 예민한 성향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성질을 차치하더라도, 계속 증명해야 한다고 여기게 만드는 두 가지 원인을 찾아냈다. 핑곗거리일지도 모를 그것은, 나의 성장배경에 있다.
주입식 교육의 첫 번째 결과물
첫 번째 이유는 교육 과정에 있다. 스스로에게 결과물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진 않지만 사실이 그렇다. 80년대생은 주입식 교육의 첫 번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초등학생이던 시절 사교육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12년 교육의 결실이 대학교의 간판으로 정해진다는 거대한 자각이 부모 세대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간판은 이후의 삶 전반에서 그리고 곧 닥칠 취업의 문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었다.
그래서 이 교육과정을 지나온 학생들은 자신이 더 배워보고 싶은 전공보다는 좋은 타이틀의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애썼고, 취업이 잘 되는 학과의 경쟁률이 높았다. 대학교가 정해지고 나면 그다음 무대는 취업이다. 어떤 회사를 갔는지에 따라 가족의, 그러니까 부모님의 삶의 질이 달라진다. 좋은 곳에 취직하기 위해 내 전공과 관련이 없는 자격증을 수집하기도 한다.
취직 이후 이어지는 일들도 얼추 비슷하다. 연봉이 얼마라더라, 누구와 결혼을 했다더라, 결혼을 못하고 있다더라, 결혼 상대가 어떤 집안이라더라, 돈을 잘 번다더라, 아니라더라, 애를 아직 안 낳는다더라, 못 낳는 다더라, 손주가 천재라더라, 무슨 상을 받았다더라, ‘나’라는 결과물이 아직 건재하며 주류로부터 이탈하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한, 수많은 증명의 과정에 놓인다.
자식으로서의 사명
위에서 말하는 증명은 예컨대 소셜미디어에 사진이나 쇼츠를 올려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의 기대에 직결되어 있고, 그것에 부흥하기 위해 인생을 걸어야 한다. 그것의 원천이 사명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 번째 원인이다.
"나는 어머니의 자부심이다." 드라마 <미생>의 대사. 이 말은 내가 부모님 세대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나를 키워낸 은혜에 대한 보답, 그토록 귀하게 자라난 자신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다. 아마 당대의 다른 이들도 그럴 것이다. 부모님의 희생과 노력을 인정하고, 그에 부응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작게는 가정에서 그렇고, 이는 점차 확대되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 안에서 훌륭한 개인으로 존재해야 하며, 동시에 집단의 성공에도 기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내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내면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증명'이라는 것은 자기만족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지금의 10~20대가 이런 평가로부터 자유롭다는 건 아니다. 다만 80년대생들이 좀 더 서툴고 직접적인 교육의 과정을 지나왔고, 상대적으로 부모 세대의 요구에 순응적이다. 그들의 집단주의적 노력이 달성했던 성과를 보면서 자랐다. 나 역시 그 산물로써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태도가 있을 뿐이다.
40대로써 증명한다는 것
글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나는 그 제목을 <나이를 먹어도 계속 증명해야 하는 이유>로 적었다. 증명해야 하는 세상 속에 있고, 원치 않더라도 그것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련 자료를 탐색하고 생각하며 그것을 글자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알게 됐다. 나는 원치 않음에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게 아니라, 그저 여전히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부모님의 자식으로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직장에서는 좋은 선배이자 후배로써, 더 나은 모습까지는 고사하고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늘 거쳐왔던 그것이 수면 위로 떠오른 이유는 최근 에너지가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고, 뇌가 받쳐주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40대는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시기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런 식의 환경적 결핍에서도 비롯되는 듯 하다.
나에게 다가온 이 고민을 40대 안에서의 사고와 여건에 맞게 잘 풀어내야겠다는 생각이다. 여전히 사회 속에서 가치 있게 존재하고자 하는 마음을 마주하니, 한편으로는 반갑다. 잘 기억나지 않는 뇌, 보다 빠르게 지치는 몸에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속삭여 본다.
리아킴이 여러 번 무너지고 좌절하는 동안 팀원들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하며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이만큼까지 바닥을 쳐보니까 오히려 팀원들이 소중함이 보여요." 그녀는 말했다. 그만큼의 바닥을 쳐본 적도 그 정도의 리더 역할을 해본 적도 없지만, 나에게도 있다. 좋은 사람들, 나를 좋게 바라보는 팀원들. 감사한 마음으로 좋은 기억을 계속 쌓아가야겠다.
리아킴은 충분히 두려워했고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팀 원밀리언은 아쉽게도 스우파2를 우승하진 못했지만,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레전드 무대를 남겼다. 나에게 준 깨달음에 대한 감사를 표하며, 그 무대로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