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왕고래 Jul 01. 2024

부모님의 프로필에는 왜 꽃이 있을까

변치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와, 저 산세 좀 봐."


라고 말해 버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 위였다. 그 너머 시각이 닿는 모든 경계를 산들이 에워싸고 있었고, 마치 하늘이 미리 칠해놓은 공간을 차지하려는 듯 대담하게 솟아있는 그것들이 참 멋졌다. 잠시 운전의 피로가 사그라든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 처음 가는 길도 아니고, 산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마치 그것과 초면인 것처럼 신기해한다? 왜, 어째서, 왜...!?



부모님의 프로필에 꽃이 있는 이유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나는 자연의 조각들을 보며 놀라거나 즐거워했다. 사진첩에도 이따금 그것들이 자리를 잡았다. 본래 달과 석양을 좋아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취향이 확장된 느낌이 아니었다.


나에게 생긴 변화가 의아하던 차에 별안간 부모님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떠올랐다. 항시 자연(혹은 자연을 벗 삼아 찍은 사진)이 담겨 있는 그곳. 윗세대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최근 몇 년간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 그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앞의 글들에서 다뤘듯, 나는 마흔을 넘기면서 몇 가지를 잃거나 몇 가지를 얻었다. 그 공통점은 내 의도와 다른 변화나 예상치 못한 한계를 마주친다는 것이다. 내가 변치 않는다고 해도 사회적인 반응은 그렇지 않다. 단적인 예로 예전에는 칭찬이 그 자체의 메시지만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와, 40대인데 이렇게 잘한다고요?'라는 식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법이 함께한다.


이런 경험들은 은연중에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을 구분하게 만드는 것 같다.


변하는 것은 정말 많다. 사람의 감정이 그렇고, 관계가 그렇다. 대단해 보였던 선배는 흰머리를 늘려가고, 사랑하는 이의 눈가엔 어느덧 주름이 자리 잡는다. 영원히 곁에 있을 것 같던 나의 스타는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려준다. 변화는 나를 탄생이라는 출발점으로부터 점차 멀리 놓는다. 당연하게도 그 끝에는 죽음이 있다.


변치 않는 것들도 있다. 예컨대 어버이의 사랑, 자식에 대한 걱정이 그렇다. 추억의 소중함 그리고 건조한 나의 통장 잔고도 해당된다. 그중에서 무엇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자연이다.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 하지만 그 큰 주기는 변함없다. 자연은 어김없이 일출과 일몰을 선사한다. 봄의 새싹과 여름의 무더위와 가을의 하늘과 겨울의 황량함을 갖고 온다.


자연의 이러한 특징은 나이를 먹을수록 한 개인이 겪게 되는 장면과 유사한 것 같다. 주변의 속도는 여전히 빠르지만, 나의 시간은 점점 더 천천히 흐르면서 그 호흡이 완만해지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나 역시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것, 그 흐름에 따라 언젠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그것, 내가 사라진 후에도 변치 않고 존재할 그것.


부모님께서 꽃을 남기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것을 사진으로 담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훌륭한 탓이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보다 자연이 잘 보였을 것이다. 건물과 도로와 자동차와 사람에 가려져 있던 그것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아니, 생각보다 모든 곳에.


부모님께서 자연을 담는 이유는 눈앞으로 다가온 그것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친밀감의 표현이다. 어김없이 새 생명을 뿜어내는 영속성에 대한 감탄일 것이다. 단 며칠 장렬하게 자신을 열고 온몸으로 인사하는 꽃에게 화답한다. 이번에도 잊지 않고 와주어 반갑고 기특하다고. 하늘을 향해 일제히 손을 뻗은 나무와 산들에서 확인한다. 영원한 그것이 여전히 그렇다는 것을. 남몰래 고백한다. 나 역시 변치 않고 싶은 마음, 되도록 천천히 변하고 싶은 마음을.



변치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변함없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변하지 않으려는 노력, 그러니까 그 행위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여러 글들을 보던 차, 나는 그 답을 의외의 주제인 양자물리학에서 얻을 수 있었다. 이에 따르면 물질은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가지며,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확정할 수 없는 불확정성 원리를 따른다. ‘나’는 고정된 물리적 실체가 아니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새롭게 구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포의 변화는 이러한 현상 일부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피부 세포는 약 2주마다 새것으로 교체되며, 혈액 세포는 약 120일 동안 순환 후 새로운 세포로 대체된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스스로의 물리적 속성을 '유지'할 수 없다. 내가 나라고 기억하는 모든 것들은 말 그대로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그 실체는 이미 사라진 후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얼마 전의 내가 아니다. 우리는 늘 다른 존재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변치 않는다는 것은 ‘잘 반복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내가 기억하는 나를, 추구하는 삶을 말이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연이 그 반복을 통해 변치 않음을 알려주 듯, 내가 하루하루를 온전히 반복해 내는 일이 나를 그대로 존재하게 하는 열쇠가 아닐까 싶다.



마치며


언젠가부터 그렇다. 새롭고 자극적인 순간의 기쁨보다는, 어제와 같이 무탈한 오늘들, 그 반복에서 오는 안도감이 더 가까이 다가온다. 글을 적으면서 이러한 생각의 변화조차 자연의 섭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나아가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들이 나보다 하루를 더 잘 반복하는 이유.


아마도 이것은 그 시간까지 존재했던 나로서 변치 않고 살아가려는 모습일 것이다. 동시에 자연과 함께 흐르며 긴 시간에 걸쳐 그곳으로 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