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글에서 40대가 되면 사라지는 세 가지를 돌아봤다. 그것은 극T의 눈시울마저 적실 수 있을 만큼의 슬픔을 담고 있었다. 오늘은 반대로 40대가 되면 생겨나는 세 가지를 적어 본다. '생겨나는' 것이니 뭔가 희망찬 느낌이다.
40대가 되면 생겨나는 세 가지
1. 배
자랑도 고백도 아닌 것을 털어놓자면, 나는 마른 몸으로 오랜 시간을 살았다. 때때로 그것은 장점이었고 이따금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이기도 했다. 그런데 40을 넘어서면서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살이란 게 붙기 시작한 것이다. 딱히 달라진 습관이 없는 것 같은데 다르게 반응하는 인체가 신비로웠다.
문제는 그것이 한 곳으로 결집한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바지를 입을 때, 샤워 중 발바닥을 닦을 때, 발을 들어 올리는 게 어렵게 느껴졌다. 어렵사리 들어 올린들 그 체공시간도 길지 않다. 시간 내에 바지의 터널을 찾거나 발세척을 완수하지 못하면 균형이 무너져 얼른 발을 다시 내려야 한다. 그대로 버티다간 어딘가로 팝콘처럼 튕겨나갈지도 모른다.
처음엔 말 그대로 발이 무거워진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입에서 떨어진 수박씨가 가슴을 지나 그 아래의 동산에 안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작고 아담한 검은색 씨앗은, 그곳의 완벽한 굴곡과 쿠션감을 만끽하며 행복해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배의 공습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아니, 있었다는 것을.
배, 정확히는 뱃살이라고 불러야 할 그것은 갈비뼈의 강력한 통제에도 굴하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배꼽 아래로만 모이던 초기와 달리 이제는 앞뒤좌우로 흘러내릴 채비를 하고, 이따금 입맛이 싹 돌아 과식을 해버리면 자비 없이 그것을 둘레로 축적하고야 만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말은 잔혹한 낙관주의일 뿐이다.
2. 침묵
'마가 뜬다' 라는 말이 있다. 예능계에서 자주 쓰이는 은어인 것 같은데, 말과 말 사이에 공백이 생긴다는 의미라고 한다. 쉽게 말해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언제부터인가 그렇다. 내가 말을 하고 나면 침묵이 달라붙는 상황이 생겨났다. 말을 맺은 것이 아님에도 그것은 다른 이의 호흡에 올라타지 못하고 겨울바람 속 불씨처럼 사그라지고 마는 것이다.
예전,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과거와 현재의 다른 점은 대화를 나누는 주변이 나보다 어리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90년생에 가까운데,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늘어난 침묵의 원인을 세대 차이에서 찾게 되었다. 그런데 이 차이는 단순히 관심사 이상의 그 무엇이다. 뭐랄까, 내가 '다음 세대'라고 인식하는 이들은 대체로 마가 뜨는, 그러니까 말이 끊기는 상황을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다. 나는 어떤 대화로든 식사 자리를 이어가야 했던 과거의 경험들 때문인지 의도치 않게 말을 뱉고 또 침묵을 얻는다.
3. 왕년
'왕년'의 사전적 의미는 '지나간 해'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왕년은 단순히 과거의 의미만 담고 있지 않다. 그것은 '지금보다 좀 더 나았던 때',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내포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이 '왕년'이 늘어난다. 그때는 됐지만 지금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단순히 체력이나 의지의 문제로만 보기는 좀 어렵다. 가정 내 책임의 형태, 사회적인 상황들이 여러 제약을 만들고, 이는 나에게 존재하던 좋은 것들을 어느덧 왕년으로 이끈다. 물론 지금도 새롭고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와는 다른 기분, 다른 시선으로 그것을 대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왕년의 의미를 살피기 위해 검색을 하던 도중 '지금 증명하지 못하는 왕년은 의미가 없다'는 글을 보았다. 그것은 달리기에 대한 글이었고, 작은 습관의 반복이 쌓여 만드는 위대함을 다루고 있었다. 열정과 응원을 담고 있다. 하지만 노화가 안기는 거대한 흐름은, 보다 젊었던 시절의 모든 광명을 챙길 순 없게 한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순리이기에 받아들이는 과정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다만 그만큼의 ‘증명할 수 없는’ 왕년이 늘어날 뿐이다.
그래서 불혹인가
40대가 되면 사라지는 것부터 생겨나는 것까지, 이 여섯 가지를 불편하고 서운한 듯 적었지만 체감하는 현상이 그렇다는 것이고, 사실 이 변화들을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줄어든 회복력과 무거워진 몸, 한계를 뚫고 전진하다 못해 흘러내리는 배의 등장은 (사실상 처음으로) '지속 가능한 건강'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예전에 비해 그 일상은 오히려 더 깔끔하고 상쾌해졌다.
나에 대한 주변의 관심이 줄어든 상황도 그렇다. 실은 그런 (차마 무관심이라고 적을 수 없는) '덜관심'이 딱히 불편하지 않다. 침묵이 자연스러운 대화 방식은 오히려 편안한 기분을 들게 한다.
늘어난 왕년은 또다시 겸손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나만큼 다른 사람들도 반짝 빛났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 눈앞의 상대가 그다지 별 볼 일 없다고 한들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 멋진 왕년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기억을 품고 이따금 열어보며 살아간다.
공자는《논어》에서 나이 40을 '불혹'으로 정의했다.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상태'로써 성숙한 판단력과 자기 확신을 갖추는 시기를 표현한 것이다. 글쎄, 나를 비롯하여 40살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이 공자만큼 깨달음을 얻긴 어렵겠지만, 단어의 의미만으로는 얼추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40살의 나이는 진학, 취직, 결혼, 출산 등, 인생의 중요한 사건들을 대체로 지나온 상태이기 때문이다. 직접 겪지 않더라도 그로 인해 뜨겁던 주변을 보면서 어느 정도 익숙해졌거나 생각의 정리를 마친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과거의 경험들은 내 안의 공간에 타협할 수 없는 고정된 영역을 크게 늘리고야 만다. 그것들에 대한 생각을 현시점에서 바꾸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즉 내가 느끼는 불혹은 공자의 말씀에서 느껴지는 '초월'이나 '절제'와는 조금 다르다. 외부의 사건들로 인해 내 가치관이나 일상에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낮아졌음을 나타낸다. 새로운 사건들을 기반으로 나를 재구성하기보다는 이전의 경험을 기반으로 효율적인 운영을 하게 된다. 변화를 위해 투자하는 에너지보다 정돈하고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의 크기가 더 커진다. 그만큼 이미 굳어진 것들을 갱신하는 일에 신중해지며, 예상컨대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고착될 것이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말처럼, 불혹의 이러한 면모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 일상과 그 안에서의 역할을 유지하며 나아갈 수 있는 힘으로 나타난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기보다는, 자신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고집스러움이 늘어서 다른 것들이 끼어들 틈이 별로 없다고 보는 게 맞겠다. (혹시, 불통이어서 불혹인 건가.)
40대를 앞둔 후배에게
얼마 전, 30대 후반의 후배가 40대가 되는 게 두렵다며 농담스러운 걱정을 뱉었다. 뭔가 도움을 주고 싶지만 이미 그곳에 빠져있는 나로서는 위로나 응원보다는 내가 느끼는 바를 전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내가 10대 때 떠올렸던 이곳은 동산 위의 나무였다. 그런데 이르러 보니 나무는 나무인데 길에 박혀있는 가로수에 가깝다. 당시 그렸던 이미지처럼 그리 우아하거나 한가하지 않다. 다른 수많은 가로수처럼, 사람들의 주변에 존재하지만 딱히 눈에 띄지 않고, 이따금 좁은 길에 눈치 없이 박혀서는 진로를 방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동산 위의 나무만 못 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무에는 수많은 주름이 존재한다. 그것은 내가 보내온 시간의 반증이자 고유한 자산일 것이다. 길을 걷던 누군가는 나무의 이파리들을 보고 그날의 나쁜 기억을 잊게 될지도 모른다. 그곳에 잠시 기대어 내 시간이 새긴 조각을 손끝으로 느끼게 될 수도, 그로부터 소소한 위로를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차가운 지구에서 안도와 미소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그래서 그렇다. 여전히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같다. 나를 찾는 이들은 앞으로 더 줄어들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이를 위해 나를 정돈하는 시간의 반복. 그리 박진감 넘치는 일은 아니지만 나름의 품위와 깊이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