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는 단순히 앞자리가 3에서 4로 바뀌는 것 외에 한 가지 의미가 더 있다. '중년'의 초입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전에서는 '늙다'의 정의를 보면 '중년이 지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늙다: 사람이나 동물, 식물 따위가 나이를 많이 먹다. 사람의 경우에는 흔히 중년이 지난 상태가 됨을 이른다. <네이버 국어사전>
즉, 40대는 미약하게 남아있던 젊음의 종착역이자, 노년으로 가는 다리에 해당한다. 그래서 원하든 원치않든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변화가 일어난다.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세 가지를 잃어버렸다. 아, 내 의지로 일어난 일이 아니니 '사라졌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40대에서 사라진 세 가지
가장 눈에 띄게 사라지는 건 회복력이다. 이전과 달리 무리한 일정을 보낸 후 본래의 상태로 돌아올 때까지 더 긴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쉬운 예로 늦은 밤까지 일을 하거나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그다음 날 컨디션에서 이 변화를 체감하게 된다. 정도의 차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의 피로가 꽤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회복력'이라는 말 그대로 몸에 생긴 상처도 더디게 회복된다. (갑자기 슬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몇 날 며칠 잠을 줄이며 일한다던가 무턱대고 몸과 정신을 쓰다 보면 어느 날 ‘어? 왜 이러지?’ 싶은 생경한 상태를 겪게 될 수 있다. 전에 걸려본 적 없는 병이나 질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문제가 빠르게 드러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멀쩡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던 동년배들이 갑자기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접했다.
회복력. 무한하게 퍼줄 것 같았던 그것은 40대에 접어들면서 "사실은 그거 다 부채였어. 멍충아~! ㅋㅋ"라며 별안간 커밍아웃을 해버린다. 이전 같은 회복력을 기대하는 나에게 그 한계를 몇 번이고 거침없이 보여주고야 만다.
회복력의 부족은 일상을 대하는 총체적인 에너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보다 제한적이니 당연하게도 더 중요한 일에 힘을 쏟게 되고, 불확실하거나 가치가 낮아 보이는 시도에는 신중해진다. 그러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트렌드라든가 새로운 것들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키기 어렵다. 따지고 보면 과거에 일어났던 중요한 결정들의 대부분은 그저 호기심에 기웃거리면서 시작되곤 했다. 40대엔 그럴 일이 줄어드는 셈이다.
"나이."
친구에게 '40대가 되면서 사라진 것'을 물었더니 그가 답했다. 40을 넘어선 후로 자신의 나이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기억력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한 해가 넘어갈 때, 또는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지금의 위치를 기억할 때, 그 두 자리 숫자의 끝자리를 신경 쓸 만큼의 관심이 부족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관심 총량의 감소'는 내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나에 대한 외부의 반응 또한 그렇다. 40대의 개인은 한 분야나 사회에서 오랜 시간을 머문 뒤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같은 시간을 보내온 주변 사람들은 이미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새롭게 진입한 세대는 당연하게도 동산 어딘가 박혀 있는 나무를 딱히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관심의 감소는 내가 말을 할 수 있는 기회의 감소로 이어진다. 질문이 줄어드니 답변할 일도 그런 것이다. ‘안물’인 나의 관심사로 대화를 시작한들 강풍 속 성냥불처럼 빠르게 사라진다. 그렇다 보니 특히 회사처럼 젊은 층이 많은 장소에서의 대화는 자연스레 듣는 시간이 늘어난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과정이다. 나이가 들 수록 '말은 줄이고 지갑을 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예나 지금이나 나는 칭찬할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언급하는 편이다. 고래도 춤추게 하는 이것을 아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나의 주요 가치관 중 하나다. 특히 30대 때는 후배뿐만 아니라 선배나 상사에 대한 칭찬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왠지 나이가 더 많고 더 중요한 역할을 가진 위치일수록 칭찬받을 일이 더 없을 것 같아서였다.
생각해 보면 이 현상은 꽤 당연하다. 칭찬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윗사람이 하는 게 자연스러운데 나이가 들수록 위는 줄고 아래는 늘어난다. 그만큼 칭찬을 받을 기회도 줄어드는 것이다. 또한 30대의 내가 선배에게 했던 칭찬들이 받았던 오해처럼, 그것은 때때로 진정성이 없는 아부성 멘트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늘어난 후배들은 더더욱 오해를 무릅쓰고 이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
늘 칭찬이 고픈 건 아니지만, 무채색이었던 순간에 소소한 칭찬이 드라마틱한 생명력을 불어준 경험이 꽤 있다. 이것은 나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칭찬의 증발은 일상에서의 기분 좋은 이벤트들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적고 보니 관심과 칭찬이 부족해서 좀 서운해하는 느낌인데(그렇지 않다. 지, 진짜다!!) 요점은 이것이다. 이 사라진 세 가지는 공통적으로 일상을 좀 더 활력 있게 보내도록 해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다소 무모한 선택과 무리한 일정 후에도 빠르게 제자리로 회복되었다. 그랬기에 크고 작은 것들에 관심을 유지할 수 있었고, 주변의 긍정적 반응과 지지는 내가 가는 길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혹여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빠르게 회복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선순환이 일어났다.
40대부터는 이 모든 활력의 자원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심신의 효율적인 에너지 관리가 중요해진 것이다. '왕년'만 떠올리면서 설치다간 거지꼴을 면할 수 없다.
다음 편에서는 '40대가 되면 생겨나는 세 가지'를 살펴보겠다. 이번 편보다 조금은 희망적인 얘기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