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글을 썼다. 정확히는 14년쯤. 정식 작가는 아니지만, 이래저래 책 대여섯 권 분량은 쓴 것 같다.
어떤 글들은 운이 좋아 책이 되었고 어떤 글은 일기장과 디지털 부산물 사이의 어떤 것이 되었다. 딱히 출판의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다. 삶이 따스해서 한 편, 서늘해서 두 편, 웃다가 세 편, 울다가 네 편 쓰다 보니 그대로 쌓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글을 쓰다보면 빙산에서 활강하듯 막힘없이 써질 때가 있는가 하면, 몇 날 며칠을 껴안고 꼬집고 싸우고 화해해도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때도 있다. 오, 글 좀 쓰는데? 라며 기뻐할 때도 있고, 글인지 굴인지 모를 것을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나마 완성이라도 하면 다행이다. 당최 무슨 내용인지 알 길이 없는 글인데, ‘내가 밥을 먹습니다', '나는 밥을 먹어요', '나도 밥을 먹걸랑요', ‘나는, 먹는다, 어쩌면, 밥을…’이라며 그럴듯한 표현만 고민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내가 글을 써도 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이 콧김으로 뿜어져 나온다. 이런 얄팍한 스킬로? 나 같은 사람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써도 된다. 써야 한다. 10년 간 글을 쓰며 느꼈던 점 세 가지를 적어 봤다. 이것은 내가 (이따금 굴이 되는) 글을 아직도 쓰는 이유다. 이것을 읽는 당신이 글을 쓰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1. 단지 쓰는 것만으로도
긴 시간 글을 쓰면서 체감한 변화는 내 삶이 더 나은 지점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나는 예전에 비해 안정적이고 편안하며 어려움을 잘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고통스러운 기억도 글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그 크기가 줄어들거나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한데 이것은 나만의 경험이 아니다. 나는 '쓰는' 행위가 가진 효과에 대해 알고 있으며 실제로도 그것을 여러 차례 겪었을 뿐이다. 다음은 글쓰기의 효능에 대한 연구결과다. 유명한 것을 딱 3개 갖고 왔을 뿐, 이미 그 효과를 입증한 연구는 많다. 특히 심리학에서는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못해 듣는 이의 귀까지 아픈 정설이다.
글쓰기가 트라우마에 미치는 영향(Pennebaker & Beall, 1986): 트라우마에 대해 15분씩 4일간 글을 쓴 결과, 대조군에 비해 병원 방문 횟수가 유의미하게 감소했으며, 면역글로불린 수치가 뚜렷이 상승함. 이러한 건강 개선 효과는 장기적으로 지속됨.
감정을 글로 표현했을 때의 효과(Smyth, 1998): 13개 나라의 글쓰기 치료 연구 분석 결과, 스트레스와 우울감이 상당히 감소했으며, 주목할 만한 학업 성적 향상도 나타남. 특히 질병이 없는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음이 확인됨.
글쓰기의 신체적, 정신적 효과(Sloan & Marx, 2004): 대학생 49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글쓰기 치료를 받은 집단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 수치가 현저히 감소했으며, 우울 증상과 PTSD 증상도 큰 폭으로 개선됨. 놀랍게도 이런 긍정적 효과는 3개월 후 추적 조사에서도 유지되었음.
사실, 이것만으로도 글을 쓸 이유는 충분하다.
2. 나를 덜어내는 일
글을 쓰는 행위는 ‘잘 덜어내기 위한 노력’과 닿아 있다. 쓸 수 있는 공간이 무한에 가까워서 어떤 내용이든 길게 적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그곳에 글자를 담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예상과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은 자신의 글을 읽으면서 시작된다. 글을 통해 나를 만나고 기억하게 되는 순간이다.
글로 만난 나는 좀 이상하다. 어색하고 인위적이며 어딘가 좀, 결여된 느낌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나은 것을 글 속에 남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여기서의 '나은 것'은 모두에게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에게 보내는, 더 나답고 의미 있는 모습이자, 기억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글이라는 건 신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는 한 원하는 것만 딱딱 써지지 않는다. 떨어지는 과일들이 땅에 닿기 전 식탁에 올리 듯, 도무지 규칙이라곤 없는 생각들을 나열하게 될 뿐이다. 그래서 덜 중요한 것을 덜어내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생긴다. 단순한 표현일 수도 있고, 문장일 수도, 혹은 하나의 주제일 수도 있다. 덜어낸다.
생각해 보면 글 속에서는 맛있는 걸 먹거나 좋은 곳에 가거나 값비싼 물건을 살 수 없다. 말 그대로 ‘적을 수는’ 있으나 실제로 행하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덜어내는 과정에서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쓸 때는 중요하게 생각되어 적었던 것들이, 덜 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쓸 때는 지극히 사소했던 것들이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가지며 그 속의 모든 글자를 비추기도 한다. 이것은 글자를 담고 덜어내는 세상의 묘미다. 현실과는 다른 우선순위를 가진, 어쩌면 그게 나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
3. 글이 닿는 곳, 닿을 곳
마지막 이유는, 글을 쓰는 게 어려울 때도 ‘결국’ 쓰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건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이다. 다소 민망하지만 더 나은 세상에 보탬에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다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또는 희생적으로 할 수 있는 인격은 되지 않는다. 그나마 성향에 맞고 안전한 방법은 글이었다. 글로 구성된 세계는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쓸 수 있다.
다만 나의 글은 이따금, 내가 예상하지 못한 곳까지 닿아, 누군가의 일상에 조금은 나은 순간을 만들기도 한다. 일부는 그런 경험에 대한 감사를 전해 온다.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내 글이 훌륭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나의 글은 새로운 사실을 담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 안에 내가 보낸 시간이 슬쩍 묻어있을 뿐이다. 독자는 우연히 글을 읽으며 이미 알고 있던 그것을 상기한다. 이 과정에서 이따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내가 보낸 시간과 그가 지나온 시간, 그리고 그의 오늘이 일순간에 이어지며 거대한 세계를 관통하는 것이다.
하여 독자가 건져 올리는 결론이나 인사이트는 내 글보다 나은 경우가 더 많다. 심지어 완전히 새로운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기가 막힌 우연은 마치 사랑의 시작처럼 위대하다.
이 소식을 전해주시는 분은, 그래서 나에게는 은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더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애쓴다. 글을 계속 쓸 수밖에 없다.
오늘도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나에게 일어난 이 모든 변화는, 다른 이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당신에게도.
< 참고문헌 >
Pennebaker, J. W., & Beall, S. K. (1986). Confronting a traumatic event: Toward an understanding of inhibition and disease. Journal of Abnormal Psychology, 95(3), 274-281.
Sloan, D. M., & Marx, B. P. (2004). Taking pen to hand: Evaluating theories underlying the written disclosure paradigm. Clinical Psychology: Science and Practice, 11(2), 121-137.
Smyth, J. M. (1998). Written emotional expression: Effect sizes, outcome types, and moderating variables. Journal of Consulting and Clinical Psychology, 66(1), 174-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