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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시선

by 왕고래 Dec 30. 2024


그 리조트는 보홀 파니글라오 섬의 해변가에 있었다.


1층 야외 공간에는 작은 수영장이 있었는데, 수영장의 한쪽 벽이 해변과 맞닿아 있다. 그 벽의 수심은 리조트 쪽에 비해 꽤 깊었다. 그래서 윗면에 팔을 깊숙이 걸어 매달리면 바닥에 닿지 않는 발까지 온몸이 길게 늘어졌다. 딱 적당한 중력이 하반신 이곳저곳의 근육을 풀어주어 편안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수영장 벽에 매달려 눈앞의 광경을 관람했다.


나는 먼 곳으로 뻗으며 수면이 더 짙어지는 바다를 보았다. 그 끝 수평선 위로 광활한 하늘이 퍼져있고, 누군가 일부러 수놓은 듯 길게 늘어진 구름의 물결을 보있다. 수평선에 걸친 배들은 이곳과의 거리 때문인지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내 눈곱보다 작았고, 어떤 것은 그보다 더 작았다. 마치 크고 작은 차들이 수평선 위로 줄지어 가는 것 같았다.


그 아래로 시선을 내리다 보면 좀 더 큰 배들이 있다. 그것들은 새끼손가락 손톱 크기쯤 된다. 더 가까운 바다엔 사람들이 있다. 이곳의 파도는 매우 잔잔하여, 그들은 대체로 물속에 몸을 담그고 머리만 내밀고 있다. 그 모습이 재밌다. 수면 위로 꽃봉오리 같은 게 둥둥 떠있는 느낌이랄까.


땅 위에는 야자수와 연두색, 주황색 파라솔이 있다. 그 아래로 사각 테이블 그리고 잎을 엮어 만든 의자들이 있다. 어떤 이는 그 의자에 앉아서 노란색 망고주스를 마신다. 다른 이는 빨간색이다. 수박주스인 걸까. 또 어떤 이들은 그보다 아래의 빈백에 누워 맥주를 마신다. 별 다른 대화 없이 선글라스 너머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수평선의 눈곱들을 보고 있을지도.


그리고 나는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피부색이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이 공간에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고 눈앞을 스쳤다. 그보다 아래에는 비둘기들이 있다. 흰색 비둘기가 많아서 우리나라의 그것보다는 덜 부담스러운 느낌이다. 그리고 작은 참새들도 보인다. 걷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지 두 발로 콩콩 뛴다. 잠시 멈추면 머리를 여기저기로 부지런히 돌리며 뭔가를 찾는다.


참새는 누군가 자리를 비운 테이블에 올라 아주 작은 감자칩 부스러기를 입에 물었다. 인간에겐 음식이라 하기 어려울 만큼 작은 크기이지만 이 존재에겐 그렇지 않다. 입을 채 다물지 못하고 아 벌리고 있다. 혹여나 그것을 돌려달라고 할까 봐 바닥으로 뛰어내린다. 테이블 밖에서는 주인이 없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것을 바닥에 놓고 몇 차례 고쳐 문후 어딘가로 날아간다. 문득 이 작은 새가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치바에서는 허밍과 리듬이 어우러지는 미디엄 템포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지금쯤 음악이 떠오르겠지만 사실 음악은 수영장 벽에 매달리던, 아니 그보다 더 이전부터 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토록 풍성한 자극의 공간에서 한참을 그렇게 매달려 있었다. 이따금 아무것도 보지 않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내 몸은 지면으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여행자의 시선


브런치 글 이미지 1


여행자의 시선을 즐긴다. 고작 반나절의 시간이 이토록 많은 정보로 전달되는 까닭은 내가 그곳의 이방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그곳과 분리되어 있다. 익숙했던 일상도 꽤 멀리, 그러니까 수평선의 눈곱 배들보다도 더 멀리 있다. 즉, 존재했던 곳과 지금 존재하는 곳 모두로부터 분리되는 셈이다. 그래서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에 마음 놓고 집중할 수 있다. 여행자의 시선이란 이렇다. 낯선 장소의 이방인으로써 완전히 혹은 미묘하게 다른 장면들을 담는 것이다. 영원할 수 없기에 더 귀한, 그 시간이 참 좋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다.


한 달에 한두 번씩은 떠난다. 그것은 1박 2일의 짧은 일정일 수도 있고, 일주일에 가까운 긴 여정일 때도 있다. 텐트와 잡동사니를 싸들고 떠날 때가 있는가 하면, 잘 정돈된 숙소를 향할 때도 있다. 이따금 바다 위를 날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시간을 위해서는 그에 앞서는 일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동 비용부터 숙소 그리고 식사나 활동까지, 모든 여행에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다를 건너가려면 주머니 깊숙한 곳의 쌈짓돈을 끌어모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행의 이유는 돈을 버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 여행을 위해, 혹은 그보다 더 긴 여행을 위해 마땅히 오늘의 수고를 감당한다.


누군가 말했다. 돈이 많았다면 매일 여행만 다니면서 살 수 있었을 거라고. 하지만 나에게 이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린다. 여행과 일상은 독립적인 경험이며, 어느 한 가지가 다른 것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다. 오히려 상생적이다. 반복되는 일상이 있어 여행이 특별해지는 것이고, 다가올 여행이 있어 일상을 견디는 재미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같다.


사실 내가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모든 장면들 속에도 일상이 있다. 야자수 아래서 음료를 마시던 이들의 하루, 수평선 위 작은 배 위에서 일하는 이들의 시간, 감자칩 부스러기를 물고 날아가던 참새의 순간까지. 여행에서 돌아오면 나 역시 그런 일상으로 돌아올 뿐이다. 누군가의 여행지가 될 수도 있는 이곳에서, 나는 또 다른 여행자의 시선을 꿈꾸며 하루를 채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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