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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Jul 06. 2022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만난 안데르센

니하운 항구, 게피온 분수, 작은 인어상

여행을 떠나기 전과 달리 폭우가 내린 뒤 찾아온 찜통더위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2 년이나 미뤄왔던 해외여행, 열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것이 꽤나 걱정이었지만 남아있는 내  생애 가장 젊은 오늘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그저 멋진 피오르드만 떠올리며 무려 13 시간이나 좁은 비행기 좌석에 끼여 앉아 북으로 북으로 날아갔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코펜하겐이다. 거제도 바람의 언덕이나 간절곶에서 만나는 풍차를 볼 때면 으레 떠오르던 덴마크. 산이 없어 바람이 많다고 하더니 푸른 바다 옆으로 보이는 넓은 땅에는 높은 건물도 산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처음 북유럽 여행을 계획할 때 남편이,

"스칸디나비아? 바이킹들이 살던 나라잖아!"

"바이킹? 해적?"

내 기억 속에는 스웨덴이나 덴마크, 노르웨이는 그저 복지국가라는 이미지만 있었다.


지구의 북쪽 끝에 있어 평야가 별로 없고 토질이 척박해 농사가 어려웠던 그들은 주로 강 하구나 피오 르만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는데 점차 인구가 늘어나며 식량난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당시 그들은 모험 정신과 배를 건조하는 기술 그리고 항해술이 탁월했기에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다른 나라들을 약탈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최근 UN에서 발표한 세계 국가별 행복지수 평가에서 1위에서 5위까지가 북유럽 국가고,  국가 청렴도 지수에서도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다.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가 높아   58%나 되는 은 세금에도 자신이 받을 복지 혜택을 생각하며   따르고 있다고 한다.

                                                                         

붉은 벽돌의 중세 건물로 이뤄진 코펜하겐 시청사
시청 옆 광장


동화작가 안데르센

안데르센이 원래는 배우 지망생이었단다. 그러나 외모나 연기력이 따르지 못했던 그는 글을 써보려 했으나 그때의 그는 문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왕립극장 감독인 요나스 콜린이 왕립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17세라는 늦은 나이에 학교에 다녔고  글 쓰는 재능을 발휘하여 유명한 동화작가가 되었다.


그는 작가로서는 성공했으나 연이은 사랑의 실패로 결혼을 못하고 줄곧 글만 쓴 덕분(?)에 많은 동화를 남기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동화가 아이들에게만 읽히는데 그치지 않고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주변의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으로 동상을 만들려 할 때도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고, 동상 주변에 아이들이 있는 것도 싫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시청사 앞에 세운 그의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길 건너편에 있는 놀이공원인 티볼리 공원이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주변에는 늘 아이들이 있었다.


시청사 앞에 있는 안데르센 동상은 티볼리 공원을 바라보고 있다.


한껏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니하운 항구

코펜하겐은 덴마크어로 '상인의 항구'라는 뜻이다. 그 이름과 잘 어울리는 곳이  새로운 항구라는 뜻을 가진 '니하운 항구'다.  1673년 처음 운하를 개통했을 때는 선원들과 어부로 꽤나 북적였으나 점차 화물선의 규모가 커지며 폭이 좁은 운하는 그 명성을 잃어갔다. 그 후 전쟁에 쓰였던 배를 부두에 전시하는 등 지역 재생사업을 펼치자 다시 지금처럼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300여 미터 양 옆으로 알록달록하게 세워진 유럽식 건물은 색다른 분위기를 내 즐비한 카페와 식당 주점에는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한 것이 코펜하겐의 그 어느 곳보다 생기가 넘쳤다.




아름다운 운하를 둘러보는 투어가 이곳에서 출발하는지 커다란 배는 관광객들로 속속들이 채워지고 있었다. 중간쯤 걸어가다 다리를 건너며 시선을 끄는 빨간 건물이 바로 안데르센이 살던 이다. 그는 1835년 장편소설 즉흥 시인 발표 후 ‘아이들을 위한 동화’ ‘미운 오리 새끼’ ‘성냥팔이 소녀’ ‘엄지 공주’ 등 200여 편 이상의 동화를 발표했다. 전 세계인들에게 성경 다음으로 그의 동화가 읽혔다고 한다.



덴마크의 궁전

니하운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거대한 돔 지붕 앞으로 4~5층 높이의 건물이 팔각형 모양으로 둥글게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말리엔보르 궁전이다. 소탈한 성격으로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이 살고 있다.  지붕이  돋보이는 건물은 프레데릭 교회로  프레데릭 5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것이다. 바로 앞에는 이 궁전과 교회를 지은 프레데릭 5세의 동상이 있다.




국기가 걸려 있지 않으면 여왕이 없다는데 아쉽게도 국기가 걸려 있지 않았다. 한 나라의 여왕이 거주한다는 궁은 삼엄한 경계는커녕 몇 명의 경비병만이 서있을 뿐이다.


빈 궁전을 지키는 경비병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 슬 로츠 홀멘에는 한 때는 왕실의 거주지였던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있는데 현재 국회의사당 대법원 총리 관저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돌로 세워 몇 백 년이 간다는 그들의 왕궁그렇게 실용적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크리스티안 4세가 왕의 여름 궁전으로 지었다는 붉은 벽돌의 로젠보르 궁전은 기품이 느껴졌다. 한때 왕실의 거쳐로 쓰이기도 했으나 주로 화재나 전쟁 등 비상시 사용되었다. 넓고 아름다운 정원에는 산책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비키니 차림으로 스스럼없이 선탠을 즐기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곳이 해변도 아닌데..."




카스텔레 요새에서 만난 풍요의 여신을 상징하는 게피온 분수와 인어공주상

아말리엔보르 궁전을 나와 오페라하우스를 지나 해안길을 따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카스텔레 요새가 있다. 크리스티안 4세가 주도하여 프레데리크 3세가 완성한 요새로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수차례의 전쟁에서 코펜하겐을 방어해 왔다는데  현재는 성벽의 형태만 남아있다.


오페라 하우스
도심내 휴식 공간으로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카스텔레 요새


게피온 분수는 채찍을 들고 황소 4마리를 몰고 가는 여신 게피온을 형상화한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스웨덴의 길피 왕이 재미있는 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늙은 여인에게 보답으로 땅을 주고 하루 동안 황소 4마리로 경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늙은 여인이 사실은 게피온 여신이었고 그녀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황소로 변하여  하루 만에 거대한 땅을 덩어리째 파냈고 그 땅덩어리를 바다 한가운데에 내려놓자 코펜하겐이 있는 셀란 섬이 되었다. 땅을 파낸 자리는 스톡홀름의 멜라렌 호라는데 실제로 두 곳의 모양이 비슷하단다.



한적한 바다 산책길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북적여 가보니 그곳에 작은 인어상이 있다. 미끄러운 돌까지 내려가 위험천만하게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다. 물의 정령인 운디네가 인간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면 영혼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썼다는 안데르센 동화 인어공주의 주인공이다. 바다가 넓어서인지 너무 작게만 느껴지는 동상, 코펜하겐을 찾는 사람 누구나 찾아오는 곳이라지만 왠지 초라해 보였다. 사람들은 겨울이면 인어공주가 추울까 비닐도 씌워주고 목도리도 둘러준단다.



작은 인어상과 게피온 분수는 1900년 초 맥주 회사인 칼스버그사가 제작하여 코펜하겐에 기증했다고 한다.


코펜하겐은 자전거 천국

자전거 전용도로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그러나 자전거가 이곳저곳으로 다니지를 않나 자전거 전용도로에 사람들이 걷기도 하는 등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코펜하겐에서는 차조심이 아니라 자전거 조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전거가 보도 바로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전거용 신호등도 있는 것으로 보아 대중교통 수단으로 완벽하게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도 자전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덴마크의 고등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시내투어 중 큰 트럭 같은 것을 타고 환호를 지르며 지나가는 학생들이 있었다. 바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다. 덴마크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동안 공부하느라 수고했으니 최소 1년간은 세계 여행을 다니며 산지식을 얻으라고 한단다.


그때 나라에서 생활보조금으로 5,000 크로네를 주고 나머지는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부족한 경비를 충당한다. 국가의 생활보조금은 대학 가서 박사과정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또한 덴마크 사람들은 보통 네댓 개의 외국어를 할 수 있는데 이는 주입식 교육이 아닌 자율 창의력에 의한 것이란다. 이러한 교육환경이 덴마크를 디자인 천국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와는 너무 다른 환경에서 아이들이 키워지고 있었다.


졸업 후 쓰게 되는 모자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덴마크의 이런저런 이야기

덴마크는 인구 580만 명, 국토의 총면적이 430만 ha로 우리의 절반밖에 안되지만 주로 산이 없는 평지로 이뤄져 있는 데다 그린란드와 우리나라의 21배나 되는 페루 제도를 가지고 있어 실제 면적으로는 세계 10위 안에 든다.


그린란드에는 히토륨과 지하자원이 어마어마하다지만 개발을 하지 않는 것은 지구 온난화에 대한 우려와 후손들을 위해 남겨놓기 위해서다. 그동안 덴마크가 낙농업이 발달한 나라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 낙농업 비율은 5% 미만을 차지하고 있다. 산이 없어 바람이 많이 부는 덴마크는 터빙 기를 설치하여 얻은 전력으로  전체 전력의 47.5%나 충당한다고 한다.


이민을  받지 않아 덴마크의 국민이 되려면 오로지 현지인과 결혼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절차 또한 까다로운 데다 결혼 초 보증금을 냈다가 3년이 지나 국민으로 인정을 받은 후에야  맡겼던 보증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덴마크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엘리콥 율리우스 달가스는  ‘밖에서 잃은 땅을 안에서 찾아보자’라는 슬로건을 들고 육군 중령 청년들을 규합하여 후손들과 살아갈 길은 나무를 심는 일밖에 없다며 나무를 심은 결과 낙농 축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의 롤모델이 되었다.


앞만 보며 열심히 달려온 우리네 삶과 달리 꽤나 여유롭게 살아가는 그들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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