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르스후스 요새, 칼 요한스 거리, 비겔란 조각 공원, 오슬로 시청사
이번 여행의 주목적은 피오르를 보기 위해서다. 산꼭대기에 꽁꽁 얼어붙었던 빙하가 중력으로 침식되고 온난화로 녹아 U자형 골짜기가 만들어진 후 바닷물이 들어와 이뤄진 웅장한 협곡이 피오르다. 노르웨이는 피오르 지형이 발달한 대표적인 나라로 해안선의 길이가 2만 5천여 킬로미터가 넘는다. 여행하기 좋은 여름이 되면 전 세계 사람들이 그 절경을 보기 위하여 모여든다.
노르웨이는 870 년대쯤 왕권이 성립되기는 했으나 분열과 외세의 침략으로 덴마크의 통치를 받다가 나폴레옹이 패망한 후 스웨덴에 속했다가 스웨덴의 왕 칼 요한의 유화정책과 노르웨이의 독립운동의 결과 1905년 독립을 하게 되었으나 처음에는 나라 살림살이가 변변치 못해 이민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다.
1970년 유전이 발견되면서 노르웨이는 일약 부자가 되었다. 노르웨이의 땅은 우리나라의 4배 정도나 되나 인구는 총 600만 명으로 인구 밀도가 엄청 낮다. 그중 60만 명 정도가 수도 오슬로에 살고 있다.
크루즈 타고 오슬로에!
다양한 쇼와 공연이 열리고 선내 수영장에서는 수영도 하며 뷔페식당에서는 훌륭한 만찬과 주류까지 맘껏 마실 수 있다는 크루즈 여행은 나의 로망이었다.
코펜하겐에서 오슬로까지 DFDS라는 크루즈를 탔다. 비록 선실이 크지는 않았으나 두 명이 하룻밤 보내기에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선상뷔페로 열리는 식사도 꽤나 훌륭했다. 다만 어디에 가야 그 멋진 쇼를 볼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내내 온 배를 기웃거리다 겨우 찾아낸 곳은 통기타 연주를 하며 간단한 음료를 파는 곳이었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올드팝에 빠져보는 묘한 정취란....
지리적으로 위도 약 48도 이상의 고위도 지방에서는 한 여름부터 9월까지는 밤이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가, 겨울에는 캄캄한 밤이 지속되는 극야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한 날은 6월 23일로 하지였다. 그들은 '하지 명절'이라고 까지 하며 맑은 햇볕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덕분에 저녁 식사 후 9시가 되어도 출렁이는 바다를 볼 수는 있었지만 선상 일몰을 찍기 위한 나의 기다림은 너무나 길었고 새벽 3시에 해가 뜨는 바람에 밤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실제로 백야 때문에 탈수나 수면부족과 같은 문제가 생겨 그곳 사람들은 심리적 육체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신기하기만 한 자연 현상을 보니 새삼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노르웨이가 가까워지며 크고 작은 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섬의 성냥갑 같은 집과 요트는 그저 꿈에 그리던 한 폭의 그림이었다. 선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 나처럼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두 번째 크루즈 코스는 스톡홀름에서 스웨덴 투르크로 이동했던 실자라인이다. DFDS때 보다 향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무료로 제공되는 맥주를 두 잔이나 마시는 바람에 그만 객실에 돌아가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꿈꾸던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아주 곤히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아케르스후스 요새
노르웨이의 물가가 비싸서인지 인근 나라에서 배가 들어오는 경우 세관 검사가 엄격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차가 나오질 않아 인솔자에게 가방을 남겨 놓고는 항구에서 아케르스후스 요새까지 걸었다. 잠시 후 깔끔한 거리에 나타나는 중세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보였다.
바이킹의 왕 호콘 5세가 1299년 오슬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건립했다는 요새다. 성이 있는데 한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듯 벽돌로 높이높이 쌓아 올렸다. 답답해 보일 정도로 꽁꽁 닫힌 성벽을 보고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서 엘사를 머무르게 했던 것 같다. 뭉크의 '절규'라는 작품도 요새 아래의 해안도로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설도 있다.
언덕배기에 있어 아름다운 오슬로 항구와 도심 풍경이 잘 보였다.
오슬로를 방어하던 시설인 포대도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2차 대전 때는 나치 독일군에게 점령당해 노르웨이 저항군의 처형 장소로, 전쟁이 끝난 후에는 부역자의 감옥으로도 쓰였고 지금은 평화를 전시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비겔란 조각공원
비겔란 조각공원은 크기가 32만 평이나 되는 곳에 세계적인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조각에 흥미를 느꼈다는 비겔란은 이탈리아 등에서 유학하며 로댕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삶과 감정을 조각으로 표현하려 하였다.
오슬로 시가 비겔란이 살던 집에 공립 도서관을 짓는 바람에 시로부터 집과 작업실을 받게 되었다. 새 작업실에서 주변 공원의 설계를 맡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니 200여 점이 넘는 조각을 남기게 되었다. 공원은 1994 년에야 완성되었는데 그는 안타깝게도 공원의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1년 전에 죽고 말았다. 비겔란은 여기에 오는 모든 사람들한테는 돈을 받지 말 것이며 365일 24시간 개방하라고 했다.
입장 후 만나는 다리에는 좌우로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는 동안의 관계를 표현한 58개의 청동상이 있다. 다리 맨 앞 왼쪽에는 상상의 동물 이무기와 여자가 싸우고 있는가 하면 오른쪽에는 화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반면 다리 끝 오른쪽 동상에서는 남자가 결박 당해 있다. 타협할 줄 모르는 남자의 본성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여성을 표현한 것이다.
특히 다리 중간쯤 화가 난 아기 동상이 유명하다. 고추나 아가의 손이 빤질빤질하게 빛나고 있다. 그 아래쪽 정원은 둥근데 엄마 뱃속을 형상화한 것이고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나와 옹알이하고 발로 서기까지의 과정을 표현했다.
원 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 인간이 공존하는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
다리를 건너면 분수대 안의 거대한 수반을 6명의 사람이 힘겹게 받치고 있다. 나이 든 사람도 젊은이도 어렵게 바치고 있는데 이는 그 누구도 힘을 빼버리면 올바로 들고 있을 수가 없음을 표현한 것으로,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해야 가정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 주위에는 생명수 나무와 여러 인간이 얽혀 있는 조각상이 있는데 이는 사춘기와 갱년기를 지나 생명수 나무 밑에 외롭게 있다가 죽게 된다는 생을 표현한 것이다.
한 덩어리의 화강암에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 121명을 새겨놓은 모놀리텐은 이 조각공원의 정점이다. 사람이 태어나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인간의 욕망을 나타낸 것이다. 모놀리텐의 꼭대기에는 아이들이 조각되어 있다. 순수한 영혼만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던 것일까? '하나의 돌'이라는 의미로 한 덩어리의 화강암을 3명의 조각가가 14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다. 비겔란은 완성된 작품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오슬로 시청사
붉은 벽돌로 쌓은 좌우 대칭형 건물이 오슬로 시청사다. 중앙에는 노르웨이의 국조인 백조 분수가 있고 입구 회랑에는 노르웨이와 오슬로시의 신화와 역사 등을 주제로 한 부조가 늘어서 있다. 시청사 2층 뭉크의 방이 시민들의 결혼식장으로 쓰인다더니 방금 결혼식을 올렸는지 주위에는 여러 쌍의 신랑 신부들이 기념사진을 찍느라 시끌벅적하다. 그런 행사 때문에 아쉽게도 시청사 내부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노벨상 총 6개 부문 중 5개는 스톡홀름에서 진행되는데 노벨평화상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서 별도로 선정하여 매년 12월 10일 오슬로 시청사에서 시상식이 열린다. 우리나라 김대중 대통령도 2000년 이곳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오슬로 국립극장
19세기 말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추진하면서 노르웨이의 극작가들과 예술가들이 염원을 담아 1899년 국립극장을 열었다. 노르웨이의 대표 작가인 헨리크 입센의 동상도 있다.
노르웨이 왕궁과 칼 요한스 거리
칼 요한스는 스웨덴의 왕이다. 1849년 왕궁이 완공되었을 때는 노르웨이가 스웨덴의 지배를 받던 시기라 스웨덴 왕은 두나라 국왕을 겸임했다고 한다. 노르웨이가 독립한 이후 현재 하랄 5세가 거처하고 있는데 왕궁 앞의 명동과 같은 복잡한 거리는 칼 요한스 거리로 불리고 있다. 독립을 허용한 스웨덴 왕이 고마워서일까?
이날은 많은 관광객들 외에도 성 소수자들의 축제인 '프라이드 퍼레이드' 행사로 칼 요한스 거리는 시끌벅적했다. 독특한 광경에 이곳에서는 성 소수자들이 인정을 받고 있구나 하고 감탄하고 돌아왔는데 오후 뉴스에 도심의 유명 나이트클럽이자 게이바인 런던 펍 등 3곳에서 이란계 노르웨이인이 총기를 난사하는 바람에 2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부상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꽤나 자유롭다는 그곳에도 성 소수자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릴리함메르
다음 목적지인 오타로 가는 길에 들른 릴리함메르는 1994년에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곳이다. 선수촌 없이 모두 민박으로 해결하는 등 친환경 올림픽을 치른 곳으로 유명하다. 스키점프대와 나무로 만들었다는 12층의 목조 호텔 그리고 경기장 앞으로 보이는 숲과 물이 함께 한 풍경이 꽤나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