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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Aug 29. 2024

잠시나마 숨통을 트게 해 주었던 자전거 라이딩

빵가게가 어느 정도 자리 잡고부터는 가게가 감옥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너무나 행복한 데 난 스무 평도 안 되는 이곳에 갇혀서 뭐 하고 있는 거지?”  

   

학원 셔틀버스를 기다리던 장난꾸러기 녀석들이 한바탕 소동을 피우고 있다. 젊은 엄마들은 어느새 친구가 되었는지 아이들은 나몰라 하고 수다 삼매경이다.  

“아이고 저 녀석들 저렇게 차도로 내려가다가는 다치지!” 

빵 포장 하던 손을 멈추며 걱정스럽게 쳐다보지만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에 금세 입꼬리가 올라간다. 


“저 부부는 왜 저렇게 두 손을 꼭 잡고 다니는 거야. 부부 맞아?”

“에고 저 아줌마들 오늘 또 어디 가나 보네”

학교 수업이 끝났는지 우르르 아이들이 몰려나온다. 교복 치마 아래 체육복 바지를 겹쳐 입은 여학생 하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남학생을 쫓아가더니 기어코 가방으로 냅다 후려친다. 그게 뭐가 그리도 좋은지 한 무리의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아이고 저런!”

     

그때 그 뒤로 멋진 유니폼을 입고 헬멧과 고글까지 장착한 사람들이 줄지어 자전거를 타고 간다. 멋진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바로 다음날 양천구청의 자전거 수업에 등록했다.   자전거 수업 첫날, 집에 있던 남편이 타던 짐 싣는 선반까지 달린 자전거를 갖고 나갔다. 그런 자전거를 가져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큰 기대를 했는데 강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저 약간 비탈진 곳을 내려오게 했다. 자전거에 올라 중심도 못 잡는데 언덕길을 내려오란다. 워낙 겁이 많은 나는 마지막 날쯤에야 겨우 내려올 수 있었다.      


중급 수업은 안양천의 신정교 아래에서 시작했다. 리드하는 선생님이 앞서 가면 줄줄이 여의도까지 따라갔다가 잠시 쉬고는 돌아왔다. 왕초보였던 나는 처음에는 안양천의 경치가 보이기는커녕 앞사람의 의자만 보며 자전거 페달을 밞았다.      


처음 자전거에 잘못 올라타면 엉덩이 살이 자전거 의자에 낄 때가 있다. 잘 타는 사람은 라이딩 중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려 다시 자리를 잡으면 되지만 나는 그 엉덩이를 들어 올리지를 못했다. 다음날이면 퍼렇게 멍이 든 데다 쓰리기까지 했다.       


그때는 오로지 집과 가게만을 오가며 사느라 가까운 안양천에 내려가 본 적도 없다. 안양천을 걸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자전거를 타고 여의도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온몸을 스치고 가는 바람은 답답한 속을 뻥 뚫리게 했고 달릴 때 느끼는 스피드는 단연 스릴 만점이었다. 지나가는 아저씨들이 틀어놓은 뽕짝소리마저도 어깨춤을 추게 했다.      


차츰 라이딩이 익숙해지자 강 속의 물고기도 보이고 길가의 작은 야생화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 열심히 연습해서 여주 시댁까지 가서 시부모님과 점심 먹고 와야지.” 

생각만으로도 나를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먹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허기와 당 보충을 위해 과일이며 초콜릿 등을 준비하다 보면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자전거를 타러 나오는 사람들은 햇볕에 탈까 온통 얼굴과 몸을 감싸고 나온다. 어쩌다 용기를 내어 혼자 라이딩을 나갔다가 잠깐 쉬려고 벤치에 앉아 있다 보면 낯선 남자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간식을 건네기도 하는 데 자세히 보면 거의 할아버지들이다. 뭘 기대하고 있는 거야?     


주말의 안양천은 시끌벅적했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세발자전거를 타고 나오지를 않나, 자전거 전용도로에서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없나! 그러니 내 실력으로 그들을 피해 가며 자전거를 타기는 어려웠다. 또 젊은 바이커들이 쌩하고 바로 옆으로 앞질러 갈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다.     


안양천에서 한강으로 진입하는 길은 거의 90도다. 진입로가 보이기 시작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직진하는 다른 자전거 사이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겁먹고 멈칫거리다 몇 번이나 넘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죽을 뻔했던 것은 양화대교 너머 선착장 바로 앞에서다. 처음 그 길을 갔을 때 바로 옆이 자동차가 다니는 차도라는 것을 몰랐다. 열심히 페달을 밟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바로 앞에서 화물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고 자전거와 함께 붕 떴다가 내동댕이쳐졌다. 멍하니 널브러져 있는데 동료들이 괜찮냐고 몰려들었다.     

창피해서 얼른 일어나 라이딩을 다시 시작했지만 그날 급정거할 때 자전거 페달이 얼마나 내 다리를 후려쳤는지 멍 이 안 든 곳이 없었고 며칠 동안은 절뚝거리며 다녀야 했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 어딘가 부러졌다면 가게에도 못 나갔을 텐데.     


그렇게 어렵게 자전거를 배우고는 그 후진 남편의 자전거를 집어던지고 멋진 자전거와 각종 휴대용품들을 새로 구비했다.  당시에 자전거를 백만 원 넘게 주고 샀으니 취미로 산 도구로는 카메라 다음으로 비싸다.      

하지만 막상 자전거를 사고부터는 핑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너무 더워서, 오늘은 비가 오는데 하며 나가는 횟수는 점점 줄었고 현관에 세워진 자전거는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을 다잡고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가 우리 귀여운 강아지를 잃고 말았다. 그 후 집에 들어갈 때마다 자전거가 눈에 띄면 당장 내다 버리고 싶었다. 

“너 때문이야. 왜 그새 바람이 빠져가지고 바람 넣다가 우리 강아지가 집 나가는 것을 못 봤잖아.”

가족들도 현관 앞에만 서면 애꿎은 자전거 한 번 바라보고 또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천덕꾸러기가 된 자전거는 제대로 라이딩 한 번 나가지 못하고 20여 년째 베란다 구석에 처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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