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매킨토시 탄생 30주년 행사를 참석하면서
이번 주 애플에서 새로운 맥북을 발표하겠다는 "Hello, Again" 행사를 전 세계 기자들이 초대장을 보내어서 많은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어떤 새로운 혁신을 통한 맥북이 나오는지 외신들이 조금씩 루머들을 보내고 있는데요, 사전 행사 글로 지난 2014년 1월에 쿠퍼티노 디 앤 자 대학교에서 개최되었던 "맥 탄생 30주년 파티 행사"를 다녀온 것을 다시 편집하여 올립니다.
퍼스널 컴퓨팅의 역사 중에 IBM PC 호환 기종 (MS-DOS와 Windows 운영체제를 사용함) 더불어 오늘날까지 수많은 혁신의 경쟁을 펼치고 있는 전설의 애플 매킨토시 개발자들을 만나는 것이 여한 설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우버를 불러 샌프란시스코에서 쿠퍼티노로 약 1시간 정도 걸려 갔던 기억이 납니다.
참고로 저는 모태 애플 팬보이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처음 컴퓨터를 봤을 때가 1983년, 어느 컴퓨터 학원에서 삼성전자 SPC-1000이었습니다. 좋은 부모님 덕분에 저는 BASIC부터 COBOL까지 약 5개월 정도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 해에 주위의 부자인 친구들이 대우전자 MSX 컴퓨터를 구입하기 시작했고, 중학교 다닐 때쯤 애플 II 컴퓨터를 다른 친구 집으로 보았을 때 모니터와 키보드가 일체 된 컴퓨터가 특이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영상 원본: https://www.youtube.com/watch?v=lSiQA6KKyJo
맥 탄생 30주년 파티가 시작되면서
공교롭게도 이 디 앤 자 대학교는, 1984년 1월 24일, 나비넥타이를 매고 스티브 잡스가 처음으로 매킨토시를 소개한 장소였습니다. 행사의 막이 시작되자, 그 당시의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를 소개하는 비디오가 나왔습니다. 이 비디오는 약간은 촌스럽기 하지만 80년대의 유명했던 영화 ‘욕망의 전차’의 주제곡이 울러 퍼지면서 참석한 사람들 모두들 그때를 회상하는지 박수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스티브 잡스는 인공지능 ‘시리(Siri)’를 꿈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안녕, 난 매킨토시야! 이것은 비밀을 누설해도 좋을 만큼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어!”라고 매킨토시가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날 행사는 스티븐 레비(우리에게는 In the GooglePlex 책 저자로 잘 알려졌음)가 전체적인 사회를 보았습니다. 이윽고 오리지널 매킨토시 하드웨어 디자인 팀과 소프트웨어 개발팀이 나와서 그 당시 근무환경과 혹독한 프로젝트 뒷 야기 들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출연한 산업공학 디자인팀들은 그 당시 맥을 어떻게 하드웨어 디자인을 했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현재 미국 마운틴 뷰(구글 캠퍼스가 아주 가까움)에 있는 컴퓨터 박물관에 기증된 1984년 첫 모델인 매킨토시 128K는 그 당시 다른 PC와 달리 페어차일드 반도체와 마이크로 칩으로 구성된 8개의 트랜지스터와 더불어, 올-인-원(PC 본체와 모니터가 하나로 구성된 제품)으로 구성된 것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오늘날 이 매킨토시는 인터랙션 디자인(Interaction Design)과 휴먼 컴퓨터 인터랙션(HCI)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렇다면, 왜 매킨토시라 불려졌는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매킨토시’는 원래 제품 출시 때 정하는 브랜드명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Apple I, II 그리고 리사(Lisa)에 이어 뭔가 새롭게 신선한 것이 없나 생각에 작명한 것이 ‘매킨토시’ 코드명을 스티브 잡스가 그대로 이름을 부르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애쉬튼 커처의 ‘Jobs’ 영화에서 보듯이, 매킨토시는 1979년 제프 러스킨 박사로부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지금은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개발 언어로 유명한 오브젝티브 C/C++ 언어는 맥에서 완전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지원하는 스몰토크(Smalltalk) 언어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나의 추론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현장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오늘날, 맥은 사실상 여러분의 일상 속의 한 부분으로 차지하고 있습니다!”
앤드 필드는 그날 행사에서 대미를 장식할 만큼 인상 깊었습니다. 그 당시 애플에서 매킨토시는 메인 프로젝트가 아니었습니다. 쿠퍼티노 본사, 애플 캠퍼스가 아닌 서니베일 블랜드 3 빌딩이라고 곳에서 해적 깃발을 꽂고 지냈다고 합니다.
일을 하지 않을 경우, 가끔은 프리즈비 원반을 던지는 놀이를 하거나, 사내 밴드를 만들어 노래 부르면서 매우 자유스럽게 매킨토시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한편, 그날 컴퓨터 박물관 시니어 큐레이터, 댁 시니어스라는 사람은,
맥은 뛰어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과 히피(60-7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자유주의)의 문화에서 탄생되었다!
라고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매킨토시 개발 팀은 보스턴 컴퓨터 소사이티 커뮤니티에 발표했던 때를 잊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때가 프레젠테이션이 역사상 가장 빛났던 스티브 잡스의 발표가 아니었나 모두 입을 모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80년대에 스티브 잡스는 미래에 IBM에 의해 독점적인 PC 시장이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면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비유하면서 역설하였고, 이때부터 직접 맥을 살 대중들을 위해 현장에서 데모를 보여 주기 시작한 것이 30여 년이 흐른 지금에서는 전 세계에 인터넷으로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중계되는 키노트 행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발표장은 말로만 하고 추후에 제품을 보여 주었는데, 행사장에서 직접 리얼 데모로 맥으로 가정에서나 사무실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구체적인 시나리오와 더불어 애플리케이션인 맥 페인트와 맥 워드 프로세서가 동작하는 것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대중에게서 환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이후 맥은 PC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전문가들의 도움 없이 미국 학교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그 시연회에서 스티브 잡스와 함께 데모를 보여주었던 맥 페인트를 개발했던 빌 앳킨슨은,
우리는 단지 돈을 버는 목적으로만 맥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어요. 다만 우리는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맥을 개발했습니다.
라고 말로 이 행사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 날 저와 같이 앉아 있었던 관객들은 5분 동안 박수가 끊이지 않았고 몇몇 참석자들은 일어서서 기립박수까지 표했습니다. 정말 제가 덕중의 제일 덕이 양덕이라고 애플 양덕의 한 중심에 앉아 있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윈도와 매킨토시는 영원한 애증(?)의 관계
매킨토시이야 말로 애플의 흥망성쇠를 잘 말해주는 제품도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90년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95와 비슷하여 스티브 잡스는 ‘빌 게이츠가 우리는 것을 훔쳐갔다!’라고 말할 만큼 서로가 닮았기 때문입니다.
아닐까 다를까 사회자 스티븐 레비는, 카피캣이라고 불렸던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윈도 운영체제에 대해 한 마디씩 해달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2000년 초반, 빌 게이츠가 과연 애플이 무엇을 했는가?라고 애플이 한 일이 대해 평가 저하를 했을 때, 나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운영체제는 높은 품질의 제품이 아니었다 라고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자마자 우레와 같은 관중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덧붙여, “우리는 예술품을 만들었다.”라고 그곳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의했습니다.
고 스티브 잡스는 어떤 보스였나?
회사 생활에서 보스에 대해 이야기가 없다면 앙코 없는 찐빵이겠지요! 사회자는 스티브 잡스는 어떤 매니저였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 나갔습니다. 필자는 수많은 인터뷰와 책 속에서 스티브 잡스가 괭장히 ‘명령하달’만 하는 스타일인 줄만 알았는데, 현장에서만 들어보니 아니었습니다.
정리하자면, 그는 동료들의 합리적인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으며, 어떠한 이슈가 생기면 꼼꼼히 혀를 내 두를 만큼 문제를 정의하고 풀어 나갔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코딩 한 번도 안 한 엔지니어지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인터페이스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이든지 언제나 앞서 나가며 그리는 데 능한 ‘비전너리(Visionary)’ 였다고 최초 매킨토시 개발팀들은 앞다투어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첫 매킨토시 프로젝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최초 맥의 타임 쉐어링(Time-Sharing)을 책임 진 패티 캐욘은 그 당시를 떠 오르면서 ‘산고의 고통의 순간이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첫 버전 맥을 끝냈을 때, “그것의 내 배 속에서 나은 진배없는 나의 아기였어요!”라고 약간 울음 석힌 말투로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참고로 그녀는 현재 60대 할머니입니다.
끝으로
행사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 갈려는 참에 나의 옆자리에 같이 관람하던 노부부는, 장장 1시간 동안 나에게 맥은 자기의 삶 속에서 보물과 같은 존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맥 때문에 와이프도 만나고 아이들을 키워서 결혼을 시켰다고 하는데, 30년이라는 세월은 한 세대가 태어나 또 다른 부모가 될 수 있는 긴 세월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또한 엄마와 아빠와 함께 손 잡고 온 2시간 내내 캔디 크러쉬 사가 게임만 했던 5살짜리 꼬마부터, 이제 결혼을 막 하여 아기를 업고 온 신혼부부와, 하얀 머리가 아름답게 물들어진 내 옆자리 노부부 까지, 그날 약 2,500명 정도 참석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스티브 잡스’ 아니 ‘애플’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닌가? 지금도 그들의 입으로 또 다른 매킨토시,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자기와 함께 한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필자는 30년 동안 하나의 브랜드명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킨 애플이라는 회사도 놀라웠지만, ‘제2의 애플’이라고 불려지는 커뮤니티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훌륭한 팬덤 문화를 가진 애플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술은 한 회사가 개발할 수 있지만, 문화는 한 회사로 만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용자의 열정이 온 세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필자는, 먼 훗날 애플 아이폰과 자웅을 겨누었던 삼성전자 갤럭시를 만들었던 개발팀들이 나와서 그때의 에피소드를 웃고 울며 들어보고 싶어 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기술 사회의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문화 속에서 우리의 창조가 전 우주로 꽃 피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