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내가 영국 땅에 발을 디딘 지 한 달 만에 중국에서 첫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이 발생했다. 첫 발생지역이 중국이라는 점과 한국의 종교집단감염, 일본의 크루즈선 사태로 아시아에 대한 혐오를 아낌없이 내비치던 유럽 대륙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이러스는 급격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곧 불바다인 유럽에서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도 도착했다. ‘조만간 의료기술에 굴복하고 말겠지’, ‘유럽은 안전할 거야’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나라 전체를 패닉에 빠뜨려, 사람들은 마치 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는 것처럼 마트에서 사재기를 하기 시작했고 이런 응급 상황에 딱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정부는 3월 중순부터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하는 락다운 조치를 내렸다. 거리는 텅 비었고 하루에 한 번 식료품 쇼핑이나 운동 이외에는 나갈 수도, 친구들끼리 만날 수도 없었다. 한창 즐겁게 다니던 바텐더 스쿨도 일시 정지되고, 일하던 가게도 문을 닫아 꼼짝없이 집에만 있어야 했지만, 다행히도 내가 살던 플랏은 2-30대 한국 여성 6명이 함께 살아 심심할 날이 없었다.
좁은 플랏에 갇히다시피 한 우리는 조금이나마 웃으며 이 상황을 잊어버리기 위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흥의 민족임을 증명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즐거운 건 꼬박꼬박 찾아오는 식사시간이었다. 다들 오랜만에 찾아온 강제 휴식을 즐기며 집에서 게으르게 시간을 보냈지만 때가 되면 어찌나 배가 고픈지 신기할 정도였다. 각자 가진 식재료를 꺼내놓고 고민하며 오늘은 이걸로 어떤 한국 음식(비슷한 것)을 해 먹을까 생각하는 시간에는 다들 눈빛이 반짝반짝했고, 메뉴가 결정되면 가장 요리를 잘하는 주방장의 지휘 아래 각자 맡은 일을 착착 해 나갔다. 밥을 짓는 사람, 채소를 손질하는 사람, 자잘 자잘 나오는 설거지를 빨리빨리 없애는 사람 등등..
수면욕이 식욕을 이기는 사람인 내가 음식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던 때는 10여 년 전 대학 시절 농활에서의 흐릿한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하루 종일 일에 치이다 밥때가 되면 그저 빠른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끼니를 해치우는 것을 목표로 하던 나였다. 음식을 먹으면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른 채 그저 간만 맞으면 후루룩 털어 넣었던 나였다. 먹는 즐거움을 모르니 음식 하는 재미도 잘 몰랐던 나였다. 하지만 나는 플랏 메이트들의 도움으로 8,000km 떨어진 곳에서 고국의 맛을 내 보겠다고 아등바등 노력하며 매 끼니 진심을 담아 음식을 준비하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짭짤한 간장에 조린 통통한 가지 밥에 후추를 뿌린 계란국. 꾸덕꾸덕한 떡볶이에 튀김 만두를 곁들여 먹은 뒤, 마무리는 김을 얹은 볶음밥. 영국의 대표 자랑거리 식재료인 감자로 만든 짜글이. 곧 찢어질 듯 속을 채운 유부초밥과 고춧가루를 팍팍 넣은 얼큰 우동. 영혼까지 갈아 만든 감자전, 계란물을 묻혀 통째로 부친 배추전과 통깨를 톡톡 얹어 고소함을 더한 두부김치. 냄비로 지은 흰쌀밥에 계란 노른자를 띄운 칼칼한 순두부찌개와, 체다치즈를 품어 오동통한 계란말이. 된장을 풀어 시원한 배춧국과 두부조림.
청양고추 대신 어렵사리 구한 베트남 고추를 넣어 칼칼함을 더하고, 마트에서 쪽파 두께의 파를 사다 숭덩숭덩 넣어 대파를 대신하기도 했다. 네모난 한 모만 사도 풍족했을 두부는 퉁퉁한 유부의 외관을 한 채 주먹 모양으로 팔리고 있었고, 떡볶이 볶음밥에 깻잎을 넣어 먹고 싶다는 말은 KFC에서 광어회를 찾는 것처럼 들렸다. 이렇게 구하기 어려운 식재료 때문에 꿩 대신 닭인 상황들이 찾아왔지만 어찌어찌 요리는 계속됐고, 카메라도 없이 우리끼리 ‘삼시 세 끼 노팅힐 편’을 찍으며 모두의 노력으로 식탁은 하루가 다르게 질이 좋아졌다.
저장과 발효 음식 민족의 후예인 주방장이 어느 날 양파장아찌를 뚝딱 만들었고, 며칠 후 숙성된 결과물을 밑반찬으로 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입을 대지 않았던 나는, 맛도 잘 든 데다가 아삭거리기까지 하는 양파장아찌를 크게 넣고 우물거리는 플랏 메이트들을 보고 젓가락을 대기 시작했다가 결국 웃음 섞인 핀잔을 들어야만 했다.
“언니 양파장아찌 안 좋아한다면서요~!”
“아니 왜.. 다들 그런 음식 있잖아. 먹긴 하는데, 싫진 않은데, 딱히 좋아하지도 않고.. 선택권이 있다면 안 먹는 음식. 난 혼자 살 때 엄마가 반찬으로 양파장아찌를 너무 많이 보내줘서 다 못 먹고 버린 적도 많다고..”
“저는… 3분 인스턴트 음식이요. 부모님이 맞벌이하셔서 혼자 너무 많이 해 먹었어요.”
“난 물에 빠진 고기 잘 안 먹어.”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곰곰이 생각하자니, 굳이 내 돈 주고 안 사 먹는 음식이 또 하나 있었다. 김치볶음밥.
어릴 적 방 두 칸짜리에 살던 다섯 식구의 방 배치는 자연스러웠다. 집 한가운데를 차지하던 길쭉한 거실과 주방에서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작은 방엔 아빠와 엄마가 하루 종일 치킨을 튀기던 피로한 몸을 뉘었고, 큰 방엔 가운데 할머니가 누우면 문가쪽으로는 남동생이 벽 가까이에는 내가 누워 한참을 뒤척이며 ‘할머니 졸린데 잠이 안 와’ 따위의 얘길 하다 잠이 들곤 했다. 일을 하는 부부를 대신해 남매를 돌보며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던 할머니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 날 엄마 아빠가 별거를 결정한 이후부터는 우리를 더욱 애틋해하며 품어주셨다.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평생 자식 뒷바라지해 다 출가시킨 후 이제는 쉴 법도 한 할머니에게 손주 새끼들 뒷바라지라는 또 한 번의 자질구레한 일이 찾아온 것이다.
별거 끝에 이어진 이혼은 어린 우리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알던 가족이라는 형태가 깨지고 엄마가 자릴 비웠어도 세상은 어찌어찌 돌아가는 듯 보였고 우리도 거기에 발맞춰야만 했다. 그중 하나는 꼬박꼬박 때가 되면 죽지도 않고 돌아오는 학교 소풍이었다. 상황이 바뀐 이후부터 나는 엄마 대신 할머니가 아침 일찍 일어나 싸주신 따뜻한 도시락을 들고 소풍을 갔다. 신나게 놀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열면, 아침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이 차게 식은 김치볶음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소풍 때 김밥을 말아 도시락을 싸 주곤 했었다. 그땐 몰랐다. 전날 일을 마친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바리바리 장을 봐야 하고, 꼭두새벽부터 시금치 데치랴, 당근 볶으랴, 황백으로 나뉜 지단 부치랴, 내가 좋아하는 햄도 그득그득 넣어주려면 엄마의 손이 쉴 틈이 없었을 것이다. 어느 집이나 그런 날엔 온 식구의 소풍 기억을 꺼내 주듯 김밥 아침식사가 기다리는데, 점심에 또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신나는 소풍날이었다.
하지만 김밥이 이렇게 오랜 시간과 많은 정성이 필요한 음식인지 그땐 몰랐고, 늘그막에 여적 일을 하셨던 그 연세에 아침부터 손주 새끼 김밥을 마는 건 꽤나 고단한 일이었으리라는 건 나중에야 깨달았다. 들어간 채소도 얼마 없이 신김치와 들들 볶인 붉으죽죽한 볶음밥을 보고 소풍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해 아픈 말을 꺼내지 않는 애늙은이가 되어있었기에 밥투정 없이 도시락을 친구들과 나눠 먹곤 했다. 그렇게 몇 년의 소풍에 나보다 더 신난 듯 따라오던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나는 어쩐지 앞으로 이 음식을 찾지 않게 될 거라는 예감을 했던 것 같다.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기 2일 전, 요양병원에 계시는 할머니를 아빠와 함께 방문했다. 한동안 병원에서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던 할머니는 오랜만에 회복해서 가족들을 만나고 외식하는 것에 더없이 즐거워하셨다. 가기 전까지 내 손을 꼭 붙잡고 잘 다녀오라며, 연신 뒷모습에 손을 흔들던 할머니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지 2주 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침 이 플랏에 살기로 결정하고 이사를 하던 나는 이삿짐을 풀자마자 바로 다시 간단한 짐을 싸서 공항으로 향했다. 가족들은 먼 곳까지 간 내가 걱정이 되어 알리지 않을 계획이었다고 했지만, 여기저기 부고 메시지를 전하던 아빠가 실수로 내게 보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을 원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2주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채로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었다. 때로는 미울 때도 있었고, 당신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었고, 항상 즐거움만 공유했던 건 아니었지만, 할머니에 대한 우리 남매의 기억과 함께한 추억은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만큼이나 애틋했다. 먼저 도착한 남동생은 입관식 때 눈물을 한 트럭 쏟았다고 말하며, 발인 10분 전에 겨우 도착해 멍하니 영정 앞에 앉아 울고 있는 누나를 다독였다. 우리는 할머니가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시간 동안 한참이나 할머니에 관련된 기억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다시 히드로 공항에 돌아온 지 4개월 후, 나는 새로운 식구(食口)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한 대화에서 할머니를 떠올렸고, 곧 김치볶음밥을 해 먹었다. 한국식품점에서 매끈한 포장지에 묶여 팔리는 김치에, 우리가 소일거리 삼아 기르던 파를 잘라 파 기름을 내고, 먹다 남은 베이컨과 찬밥을 넣어 볶은 후 마지막으로 못생긴 반숙 계란 프라이를 올렸다. 다들 백종원 셰프의 레시피에 감탄했지만, 할머니가 담갔던 김장김치가 시어 꼬부라질 때쯤 들기름에 달달 볶아 뚝딱 만들었던 그 김치볶음밥과는 아주 다른 맛이었고 나는 왠지 씁쓸함이 입가에 맴돌았다. 할머니가 떠나시기 전에 내 손으로 김치볶음밥을 한 번 해 드렸다면 좋았겠지. 까끌까끌한 입 속으로 밥과 후회를 같이 씹었다.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할머니의 김치볶음밥이 그리워도 이젠 기회가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고, 그들과 함께 할 귀중한 식사의 기회가 남아 있다. 엄마가 산더미같이 보내주던 양파장아찌를 다시 먹을 수 있는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며, 그런 엄마의 다음 생신에는 내 손으로 한 상차림을 대접할 것을 결심하며, 락다운이 풀릴 때까지 먹을 밥도둑 양파장아찌를 또 한 번 담가본다.